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76
76화 생활비로만 10만 달러
선배와의 대화를 준비하기 전 내게는 해결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를 위해 난 방과 후 카페에 왔다.
호록―
오늘 고른 음료는 고구마라테. 달달하면서도 고소한 것이 일품인 음료였다. 음료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종이를 다 읽은 필립의 입이 열렸다.
이곳에 온 이유. 그건 합격 사실에 대해 라고시안에도 알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학교를 포함해 내가 알려야 하는 두 곳 중 하나에 라고시안이 들어갔으니까.
“전액 장학금이군요. 그것도 졸업할 때까지 무한정인.”
“예, 그렇게 저도 알아들었어요.”
“보통은 4년이라는 제한이라도 걸기 마련인데…… 이건 신 작가님이 무한정 에일대 학교에 다녀도 지원해 주겠다는 이야기네요.”
“……그렇게 오래 다닐 생각은 없는데요.”
사람을 뭐로 보는지 모르겠다. 남들이 4년 다니는 학교를 뭐 40년이라도 다닐 거라고 여기는 건가.
떨떠름한 내 어조에 필립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에일대가 돈이 많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파격적일 줄이야.”
“그래서 딱히 라고시안의 지원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필립을 지금 만나고 있는 이유. 그건 이전 라고시안과의 계약에서 내게 제시한 조건 때문이었다.
“에일에서 장학금을 다 준다고 하는데, 굳이 라고시안의 돈을 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이건 부모님도 동의하신 부분이었다. 라고시안과 에일 중 어느 쪽에 지원받을지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역시 이걸 준비해 오길 잘했군요.”
“……또 뭘 준비해 오신 건데요?”
내 말을 들은 필립은 씩 웃으며,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라고시안은 참…… 늘 뭔가를 준비해 오네.’
지난번 만난 이들의 대표인 슈이 라고시안. 아트 딜러라 불리는 그 또한 나와의 만남에서 준비한 자료들을 꺼내 들었다.
오늘도 필립이 미리 준비해 왔다며 종이를 주는 걸 보니, 확실히 이들이 세계적인 갤러리로 살아남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단 이걸 봐 주시죠. 작가님.”
종이는 꽤 두꺼웠다. 그러나 그중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숫자 0의 향연이었다.
“10만 달러? 생활비만으로요?”
“예, 원래 작가님의 대학 학비로 지원해 드리려고 했던 금액을 그대로 지급하겠습니다.”
라고시안은 이전에 내게 에일대 진학 시 학비를 책임지겠다고 장담했다.
근데 그 학비가 학교에서 나오니, 아예 이를 생활비로 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졸지에 용돈으로 한국 돈 1억이 넘는 돈이 생기게 생겼다.
“……제가 장학금을 받을 줄 아셨나 봅니다? 이런 걸 미리 준비해 오시고.”
“에일대가 명문이긴 하나, 괜찮은 작가는 그보다 더 귀하죠.”
“그건…….”
“그리고 작가님은 수집가들과 대중 모두에게 어필할 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고요.”
“……제가요?”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림이 잘 팔린다는 이야기는 있었다. 그렇기에 수집가라 불리는 이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건 짐작 가능했다.
그런데 대중이라니?
“아직 사람들은 제 이름도 잘 모를 것 같은데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것도, 라고시안의 전속 작가가 된 것도. 이 계통에서 일하는 이들은 잘 알았다.
하지만 정말로 대중에게까지 내가 친화적인지 묻는다면 난 회의적이었다.
가장 대중의 대표적인 예시인 내 친구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내가 정말 그 정도로 대단했다면, 애들은 걸 그룹보다는 날 더 신기하게 여기지 않을까.
의혹에 가득 찬 내 질문에 필립은 웃음을 터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내 눈빛이 웃긴 모양이었다.
“작가님의 이름은 잘 몰라도 작품은 압니다. 놀랍게도 저희 라고시안의 홈페이지에 작가님에 대한 문의가 많거든요.”
“홈페이지면…….”
“예, 진짜 VIP들이 통하는 루트는 아니죠. 이건 그냥 그림에 관심을 가지는 일반인들입니다.”
그림을 구하는 큰손들은 라고시안의 직원들에게 직통으로 작가 정보를 요구했다.
즉, 홈페이지를 통해 작가의 다른 작품을 물어보거나 전시회 일정을 물어보는 건 아니란 뜻이었다.
“물론 완전한 일반인들이라기보단 그림을 좋아는 일반인이겠지만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서 저희도 작가님의 다음 전시회를 크게 열어 볼 생각입니다.”
“……잠깐만요. 아트 페어 말고도요?”
난 이미 홍콩의 아트 페어에 나가기로 한 상태였다. 거기에도 몇 작품을 내야 하는데, 또다시 전시회라니. 대체 뭘 얼마나 벌이려는 건지 알수가 없었다.
“예. 그러니, 그림…… 많이 그려 주셔야 할 겁니다. 후후.”
기분 탓일까.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작품을 달라고 외치는 누군가가 등 뒤에서 보이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저희의 상황이 이러니, 에일대라고 해서 작가님이 안 귀할 리가 없죠.”
내가 어깨를 부르르 떠는 그 순간. 필립은 원래 하던 말로 되돌아갔다.
“하물며 그 작가가 이제 고작 스물도 안 된 예비 대학생이라면, 더더욱이요.”
그는 에일대가 왜 내게 장학금을 주는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아시지 않습니까. 작가님. 현대 미술은 점점 대중에게 외면받는 상황이죠.”
조선에서도 궁의 높으신 분들과 양반들이 즐겼던 게 미술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먹고살기 바빠 그럴 겨를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또한 내가 살았던 시대부터는 변화의 움직임이 보였다. 백성들도 점점 그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니. 그렇게 나오던 그림이 민화였고, 속화였으며, 풍속화였다.
“그런데 지금처럼 그들만의 리그로 살아남는 데는 결국 한계가 있지요. 그걸 다른 이들이라고 해서 모르지 않습니다.”
돈이 많은 이들,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이들. 많은 이들이 즐기던 미술이 점점 더 그렇게 변화하고 있었다. 현대 사회에서 미술은 점차 가진 이들의 전유물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이에 대한 위기감은 그 계통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더 잘 느끼는 법. 그렇기에 많은 미술관이나 갤러리들이 대중 친화적인 전시회를 하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죠. 예전부터 살아남아 내려오는 작품들은 결국 대중의 선택을 받은 작품들이니까요.”
전생을 겪었기에 난 이 말을 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뇌리에 남는 미술. 그건 결국 어떠한 시대에도 대중의 인상에 박히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작가님. 그 생각을 대학들도 합니다. 허니, 그들의 고민은 더 깊죠. 미래의 인재를 키우고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제가 장학금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군요.”
“예, 에일대 입장에서 작가님은 모처럼 만에 찾아온 기회니까 말입니다.”
“기회요?”
“에일대가 밀어주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온 거물. 자본에 잠식되다 못해 절여지고 있는 현대 미술계에서 그렇지 않은 존재.”
“……제가요?”
오늘 유난히 이 말을 많이 하는 기분이었다. 대체 내가 언제부터 이런 말들을 들을 위치가 된 건지 모르겠다.
“예, 작가님이요. 작가님의 그림에는 교묘하게 과거의 향수와 현대의 감각이 잘 녹아 있거든요. 그러니 양쪽 다를 잡을 수 있는 힘이 있죠.”
“양쪽 다 잡을 수 있는 힘이라…….”
“현재의 대중들은 난해해져만 가는 현대 미술보다는 과거의 작품을 더 좋아하거든요.”
현대 미술가보다는 과거의 화가들 이름을 건 전시회가 더 잘되는 게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각 갤러리도 과거 유명 작가들의 그림을 구하기 위해 혈안인 상태였다
“그런데 작가님의 작품에는 신기하게도 그 부분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어쩐지 예전의 정취가 느껴지기는 한데, 세련되었거든요.”
최대한 감춘다고 해도 작가의 색채는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 딴에는 가장 이 시대에 맞춰 그린다고 생각했는데, 남들이 보기엔 그게 아니었다니.
필립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다른 이들 눈에도 예전의 느낌이 남아 있는 듯 보였다.
“과거의 느낌이 남아 있다니, 그건 몰랐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늘 내 그림을 보면 신선하다고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잘 그렸다고만 하실 뿐이었으니.
다른 사람의 평가도 비슷했다. 동양적인 면모가 보인다는 소리는 종종 들었지만, 과거의 정취가 남아 있다는 평은 드물었다.
“최근 작품에는 거의 느끼기 어려운 감상이죠. 예전 건데 세련된 느낌이 든다는 건.”
이 정도로 내 그림에 대해 분석해서 듣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렇기에 난 필립의 말에 저절로 귀가 기울여졌다.
“사실 그게 저희가 서둘러 작가님과 전속 계약을 한 이유기도 합니다.”
이제야 말한다는 듯 필립은 미소와 함께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작가님의 작품을 보고 확신했죠. 과거와 현대를 잘 조화시킬 수 있는 작가라고.”
몰랐다. 하긴 생각해 보면 황금사자상을 받은 작가는 2년마다 한 명씩 나왔다. 하지만 그 모든 작가와 라고시안이 전속 계약을 하는 건 아니었다.
나와 계약을 진행한 건 저쪽에서도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걸 필립을 이제 와서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저희가 본 걸 에일대도 봤을 겁니다. 저희가 1등 갤러리라면, 거긴 1등 대학이니까요.”
본인의 회사에 대해 자부심이 있는 필립. 그는 당당하게 세계 최고란 말을 입에 담았다.
“만약 에일이 이걸 놓치는 대학이었다면, 지금의 학교 명성을 유지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저흰 작가님이 장학금을 받으시라고 예상할 수 있었죠.”
그는 내게 종이 뭉치를 더 밀어 주었다. 좀 더 자세히 보라는 그 손짓에 내 시선은 다시 종이로 쏠렸다.
“그렇다고 해도 생활비라니…… 이게 되는 거군요.”
“그냥 용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차피 저희 입장에서는 그대로 지원될 돈이었으니, 안 될 건 없지요.”
필립의 말을 들으며 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지난번에 한 계약과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장학금 대신 생활비라는 말이 들어갔을 뿐.
“음,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서명해도 되는 거죠?”
“물론입니다, 작가님.”
그렇게 난 빈손으로 가서 종이 뭉치를 받아 올 수 있었다.
* * *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도 졸업했겠다, 고등학생도 되었겠다, 한창 두근거릴 시기였다.
이때가 아니면 놀지도 못한다!
악명 높은 고등학교 3학년은 입시 준비하느라 놀지를 못한다. 그럼 고2는? 고3을 준비한다고 못 논다.
유일하게 놀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게 고1이니. 이 생각에 가득한 아이들은 이 기간을 허투루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알림판에 붙은 내용은 보통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중 예외도 몇 있었으니.
“선배와의 대화?”
“나 이거 언니에게 들은 적 있어. 이미 졸업한 선배가 와서 나름 재미있는 이야기 해 준다고 들었는데.”
“그래?”
“응. 질문해도 다 받아 주고, 대학교에 대한 이야기도 엄청 재미있게 해 준다던데?”
몸은 놀아도 정신은 종종 미래를 걱정한다. 그게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의 생활이었다.
이들이라고 대학교, 혹은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이 학교는 명문대를 많이 간다고 유명한 학교. 부모님들의 기대치가 있으니, 아이들 또한 이에 대해 늘 신경 쓰고 있었다.
“어라? 이거 자습 시간에 하네?”
“원래 그럴걸?”
“아…… 그냥 듣지 말까. 자습 시간에 그나마 자야 하는데.”
“근데 이거 이전이랑 좀 다른데?”
“뭐가? 한국대 대신 에일대로 바뀐 거 아님?”
평소에 오는 선배와의 대화는 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명문대인 한국대에서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대신 미국의 명문대 학생이 오는 듯 보였다.
“아니, 강의 장소가 특이해서. 보통은 교실이었는데?”
“어? 그러게. 왜 미술실이지?”
“그러게. 에일대 미대생이라고 미술실에서 하는 건가?”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저번에 온 음대 선배님도 일반 교실에서 했어.”
그러고 보니 그랬다. 음대라고 해서 이야기를 피아노를 치면서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보통은 피피티 같은 거나 틀어 놓고 말하기 쉬운 교실이나 강당에서 많이 했다.
“그럼 진짜 왜 미술실이지? 거긴 피피티 틀기도 어려운데?”
미술실은 미술 도구들이 많았다. 덕분에 공간은 엄청나게 넓었지만 그뿐. 강의를 하기 좋은 장소는 절대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기 좋은 곳이었지.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들 모르는 정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미술실이라…… 어쩐지 재미있을 것 같은데? 나 신청할래.”
“그럼 나도 하지, 뭐. 같이 들어 볼래.”
약간의 호기심이 이겼다. 에일대와 미술실.
하나의 어그로도 모자라 두 개가 더했으니. 한창 궁금한 게 넘쳐 나는 학생들의 신청이 몰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