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81
81화 이번에야말로 사라는 하늘의 계시
끝내 연락이 되지 않아 이메일을 남긴 지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 뒤에 난 드디어 에드워드 감독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을 수 있었다.
“감독님? 에드워드 감독님이 맞으십니까?”
전화에 찍혀 있는 익숙한 이름. 국제 전화로 온 전화를 받자마자 난 상대방이 에드워드 감독인지 확인부터 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보니까 메일도 확인 안 하셨던데요.”
“후욱, 훅. 미안합니다, 신 작가님.”
질문에 다짜고짜 사과부터 하시는 감독님. 그런 감독님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열정이 가득해 어딘가 활기가 넘치던 예전의 목소리와 달랐다. 가래가 낀 듯한 잔뜩 가라앉은 음성이라니.
난 직감적으로 이 감독님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목소리가 많이 안 좋으신데요? 그리고 갑자기 미안하시다니, 그게 무슨 소리이십니까?”
“쿨럭. 본의 아니게 작가님의 그림이 경매에 나갔습니다.”
에드워드 감독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부터 말하기 시작했다.
다만 그 내용은 예상과 달랐다. 본의가 아니었다니. 이해할 수 없는 그 소리에 좀 더 설명을 들을 필요성이 느껴졌다.
“본의가 아니시라고요? 감독님께서 경매에 내신 게 아니란 뜻이십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그 그림을 경매에 낼 리가 없지요, 후우.”
점점 더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는 에드워드 감독. 그런 그에게 좀 더 질문을 하려는 순간. 상대방의 말이 좀 더 빨랐다.
“일단…… 작가님, 제가 아직 병원이라 길게 통화는 어렵습니다.”
“병원이요?”
내가 되물어 보는 순간. 전화기 너머에서 어렴풋한 음성이 들려왔다. 영어로 된 문장이었지만, 알아듣는 데 문제가 없었다.
[여보, 자세한 이야기는 제가 할게요. 당신은 그냥 쉬어요. 수술이 끝난 지도 얼마 안 된 사람이 무리하지 말고요.] [그렇지만, 작가님에게 설명을…….] [제가 저지른 일이니, 제가 말씀드릴게요. 당신은 얼른 눕기나 해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 사람이 뭔 전화를 그리 길게 하려고요.]잠시간의 실랑이 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에 전화기에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더 이상 에드워드 감독이 아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 작가님. 남편에게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전 이 사람 와이프인 비앙카라고 합니다.]또랑또랑하게 들리는 여인의 음성. 난 그녀가 에드워드 감독으로부터 전화를 건네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먼저 작가님의 작품을 크리스티 경매에 내놓은 건 이 사람이 아니라 접니다. 그때는 저도 정말 정신이 없어서 그만…….]그 뒤로 줄줄이 나오는 사연. ‘경화수월’이 크리스티 온라인에 나오게 된 이유를 그제야 파악할 수 있었다.
[남편이 갑자기 쓰러져 수술만 받지 않았어도…… 그 일은 없었을 겁니다.]“잠깐만요. 쓰러지셨다고요? 그리고 수술은 또 무슨…….”
[무슨 놈의 느낌을 받은 모양인지, 밤샘 촬영도 모자라, 밤샘 편집까지 하다가…… 결국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긴급 수술에 들어갔고요.]들려온 이야기는 심상치 않았다. 난 에드워드 감독이 죽다가 살아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정도가 되니 몇 주간이나 연락이 두절된 모양이었다.
[급한 대로 남편의 수술을 위해 돈을 이리저리 최대한 끌어당겨 쓰게 되었는데…….]다시 태어난 이 시기의 의료는 조선에 비해 월등하게 발전해 있었다. 예전이라면 당장에 죽었을 사람조차도 살려 놓을 수 있는 기술력. 그게 있었으니까.
그중에서도 미국의 의료 기술은 탁월했다. 쓰러져 의식을 잃은 사람도 방금처럼 통화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 정도였기에.
다만 문제는 그 비용이리라. 내가 알기로 미국의 의료비는 대한민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형편이 넉넉한 감독이어도 당장의 큰 현금은 마련하기 어려웠던 듯 보였다.
[급한 대로 돈은 당겨썼습니다만…… 문제는 앞으로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 눈에 들어온 게 이이 옆에 있던 그림이었어요.]에드워드 감독이 직전까지 영화를 위해 끼고 있었던 그림. 그렇기에 그녀에게 그림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난생 그림 같은 건 수집하던 사람이 아니란 걸 그때 알았어야 했는데…….]허, 설마하니 이런 사연일 줄이야. 난 우선적으로 에드워드 감독의 건강 상태부터 물어봤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게 바로 건강 아니겠는가.
“감독님은 좀 괜찮으신 겁니까? 아까 얼핏 들었을 때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으셨는데요.”
[다행히도 수술이 무사히 잘 끝나서 2주 만에 깨어났습니다. 하느님이 도우셨죠.]정신을 차린 게 2주 만이라니. 정말로 위험했던 모양이었다.
[문제는 수술비였어요.]그 뒤의 내용은 내가 대략적이나마 짐작한 대로였다.
[당장에 쓸 수 있는 돈은 다 끌어다가 일단 썼는데……. 그러고 나니 조만간 돈이 부족할 게 예상되어서 그만.]생명이 위급했을 정도의 대수술. 그걸 미국에서 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리라.
[그렇다고 환금성이 어려운 것들을 당장 팔기는 어려워 보였고요.]많은 투자가가 미술품을 찾는 이유. 그게 이것이었다. 미술품은 부동산 등 다른 물건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환금성이 좋은 편이었기에.
“아니, 어차피 전 그림을 팔았기에 제게 죄송할 일은 아닙니다만.”
이건 진심이었다. 심지어 그 그림의 경우 내 입장에서는 꽤 괜찮게 가격을 받은 편이었다.
라고시안의 전속이긴 했으나, 그곳에서 전시회를 한 것도 아니었고 의뢰도 내가 받은 것이기에 수수료는 고작해야 5% 정도였으니.
그 외의 금액을 전부 내가 받은 이상, 난 그림의 처분에 대해 뭐라 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그것보다도 얼른 쾌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난 한참 동안 연락 두절이었던 에드워드 감독님과의 통화를 마칠 수 있었다.
* * *
라고시안의 필립이 내게 찾아온 건 며칠이 지나서였다.
“이미 에드워드 감독님 측과 이야기가 잘되었습니다.”
필립의 말은 그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바쁜 나의 시간을 빼앗기 싫다며 직접 작업실로 찾아온 그. 필립은 당장 경매 이야기부터 했다.
역시나 라고시안은 이 경매에 대한 관심이 나보다 높았다.
“감독님께서 그리되신 건 안타깝지만…… 저희 측에서 보면 솔직히 이 상황이 나쁜 건 아닙니다.”
“나쁜 게 아니에요?”
“예. 에드워드 감독님의 건강도 회복하고 있겠다, 영화도 편집이 끝났다고 하니까요.”
쓰러지기 전 마지막 열정이라도 불태우신 듯. 에드워드 감독님은 그야말로 미친 속도로 영화 한 편을 만들어 내셨다.
철야에 철야를 거듭해 나온 영화. 그게 이번 에드워드 감독님의 작품이었다.
“근데 이거 괜찮은 거예요? 그림이 주인도 모르게 경매에 올라간 거나 다름없는데.”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크리스티 입장에서 그 그림을 안 받을 이유가 없죠.”
필립의 말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나와 달리 그는 별다른 의혹을 가지지 않은 듯 보였다.
“거기다 감독님 입장에서도 영화를 다 찍으셨으니, 아쉽긴 해도 그림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신 거기도 하고요.”
“그래요?”
“예, 사실 이건 작가님과 감독님 모두에게 괜찮은 일이거든요.”
“어째서요?”
“마케팅적인 측면에서 보면, 서로 윈윈이긴 하거든요.”
그러면서 필립은 왜 이 경매가 양쪽에게 다 이득인지 설명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이런 말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유일한 단점은…… 작가님의 그림을 가지고 싶으신 감독님의 마음을 접어야 한다는 거죠.”
“저로서는 차라리 아예 비싸게 팔렸으면 하네요. 감독님의 병원비에 더 보탬이 되도록.”
내 말에 필립은 입꼬리를 올려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자신만만하게 입을 여는 것이 아닌가.
“이왕 이리된 것 약간의 조절만 하면 딱이겠군요.”
약간의 조절. 난 그 말만 듣고도 필립이 하려는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영화 개봉에 맞춰 보겠습니다, 작가님. 감독님께서 깨어나신 이상, 아주 급할 필요는 없죠.”
그건 사실이었다. 경매의 시작은 그녀의 불안감이 원인이었으니. 에드워드 감독님이 정신을 차린 이상, 상대적으로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시너지를 아주 톡톡히 내줄 겁니다.”
“어…… 그게 가능한 겁니까? 우리 마음대로 경매의 일정을 조절하는 것이요.”
영화의 개봉과 맞추겠다니. 그냥 들어도 쉬워 보이진 않았다. 경매와 영화 개봉 시기를 둘 다 조절해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가능합니다. 경매의 물건이 주목받는 건 크리스티 또한 바라는 일일 테니까요.”
필립은 오늘 본 이래 가장 자신만만한 눈빛을 빛냈다.
“이건 우리 라고시안이 잘하는 일입니다. 맡겨 주시죠, 작가님.”
그 자신감 넘치는 말을 들으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이건 라고시안이 가장 잘하는 업무라고 생각되었기에.
* * *
스테파니 니콜라.
할리우드에서 호주 출신의 미녀 배우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그녀의 취미는 조금 별났다.
영국의 타블로이드지 ‘더 선’에서 수집광 중 하나로 소개될 정도로 그녀는 꽤 취미 생활에 열정적이었다.
‘어디 보자, 요즘은 또 뭐가 올라왔으려나.’
다른 배우들이 귀금속이나, 스포츠카 같은 걸 모을 때 그녀는 그림을 모았다.
이 얼마나 고상하고 우아한 취미란 말인가. 그 때문에 요즘 같은 휴식기에는 종종 경매 사이트들을 둘러보는 게 그녀의 낙이었다.
예전과 달리 집에서 편안하게 그림을 볼 수 있다니. 그녀처럼 바쁜 사람도 충분히 경매를 즐길 수 있었다.
‘휴, 요즘은 별로 마음에 드는 게 없네.’
그녀가 그림을 고르는 기준은 지극히 간단했다.
“이거다!” 하는 느낌이 올 것. 해당 작가의 유명세나 작품의 세계관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중요한 건 그녀 본인의 느낌뿐이었기에.
하지만 이 취미가 오래될수록 점점 더 그녀의 심미안을 만족시키는 그림은 찾기 어려웠다. 돈이 있으면 뭘 하는가. 마음에 드는 물건이 하나도 없거늘.
‘오늘도 뭐 별거 없나 본데.’
무심한 표정으로 스크롤을 내리던 그녀. 그 순간 슥 스쳐 지나간 그림이 있었다.
‘어?’
순간 멈칫한 그녀는 다시 스크롤을 위로 올렸다. 방금 뭔가를 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그림……. 왜 이렇게 익숙하지?’
방금 지나간 그림. 다시 본 그 작품은 그녀의 눈에 굉장히 익숙했다. 마치 어디선가 본 것처럼 말이다.
‘예전에 봉사 활동 가서 본 쿠바의 풍경인가?’
문제는 정확히 어디인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분명 본 기억이 있었으니. 이게 바로 데자뷰인가 싶었다.
‘분명 익숙한데…… 어쩐지 묘하게 느낌있네. 이 그림 얼마지?’
관심이 동한 그녀는 결국 홈페이지를 클릭했다. 그림의 상세한 정보를 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들어온 작가의 이름. 신기하게도 이 또한 분명 어디선가 본 듯했다.
‘윤성 신, 윤성 신이라……. 아, 거긴가?’
돈과 의지가 있는 그녀. 스테파니가 사기로 마음먹은 그림 중 갖지 못한 건 몇 없었다.
그 덕분일까. 그녀는 생각보다 손쉽게 작가의 이름을 어디서 봤는지 찾을 수 있었다.
‘역시나! 라고시안의 그 그림 작가네!’
한번 사려고 했다가 안 판다고 해서 실패한 그림. 그 작품의 주인이었다.
‘이건 운명이야. 이번에야말로 사라는 하늘의 계시지.’
속으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그녀는 일단 추정가를 보았다. 그리고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다랗게 변하고 말았다.
“7만 달러에서 10만 달러? 이거 왜 이렇게 싸?”
라고시안에게 그야말로 부르는 대로 주겠다고 했는데도 그들은 그 그림을 팔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착한 가격에 같은 작가의 그림을 발견하다니. 놀란 그녀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고 말았다.
정말로 하늘이 그녀를 도와주려는 모양이었다. 안 그러면 갖고 싶은 물건이 이렇게 저렴한 가격에 떡하니 나타날 리가 없었기에.
‘경매가 언제야? 일정에 무조건 표시해 두자.’
LA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와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