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91
91화 기업과 아트의 만남
어머니께서는 잠깐 한숨을 내쉬셨다. 그러더니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을 입에 담으셨으니.
“후,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박현민 화가라고.”
“박현민 선생님이요?”
“후…… 그래, 맞아. 기억하니?”
“당연히 기억하죠. 같이 비엔날레도 나갔는걸요.”
벌써 10년 전이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박현민 선생님과 함께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일은.
그 당시 어렸던 나와 젊었던 선생님. 이제 내가 이만큼 자랐으니. 선생님께서는 중년을 바라보고 있으시리라.
가장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는 시기. 그건 예전에 필립이 말한 것처럼 중년부터였다. 작품의 세계는 그 깊이를 더해 가고, 체력도 아직 짱짱할 때니까.
그런데 난데없는 슬럼프라니. 그 박현민 선생님이? 내가 속으로 생각하는 사이. 어머니께서는 어찌 된 영문인지 설명하셨다.
“그럼 그분의 스승님이 엄마와 아는 사이인 거는 기억나?”
“예, 그걸 기억하지 못할 리가요.”
박현민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 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인맥 덕분이었으니.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근데 무슨 일인데요? 갑자기?”
“요즘 그 언니 고민이 많은가 봐. 본인 제자가 아주 극심한 슬럼프에 빠져서 말이야.”
이야기의 요지는 간단했다. 극심한 우울감에 빠져 작품에 대한 그 어떤 활동도 하고 있지 못한다는 소리였으니까.
‘작품 활동을 아예 못 하는 건가?’
“진짜 그 박 선생님이 슬럼프라는 거에요?”
“그래, 맞아.”
‘음. 그러고 보니, 그때도 좀 자신감이 없으신 편이긴 했지.’
당시 어린아이였던 내게도 꼬박꼬박 작가님이라고 불러 주셨던 박 선생님. 성격도 좋고 친절하셨으나 성격적인 단점이 있긴 하셨다.
자아가 강한 다른 미술가들에 비해 늘 자신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셨으니.
그나마 당시 최고의 상이라는 황금사자상을 받은 뒤에는 그런 면이 많이 사라지신 선생님이셨다.
하지만 어째 보아하니, 그 자신감 저하라는 고질병이 다시 생기신 건지도 몰랐다.
‘으흠.’
보송보송한 수염을 깔끔하게 밀어 맨들맨들해진 턱. 난 그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잠겼다.
‘약간 시간이 남을 것 같기는 한데.’
한창 전시회가 진행 중인 지금. 이 시기가 내게 여유를 주었다. 마침 이때 내 귀에 선생님의 이야기가 들려온 건. 하늘의 뜻인지도 몰랐다.
다른 화가에게 도움을 주는 일. 그건 꽤 좋은 일이었기에.
몇몇 사람들은 말한다. 오지랖 넓은 행동 하지 말라고. 남의 슬럼프가 뭔 상관이냐고. 본인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씀이었다. 나 혼자만 독불장군처럼 잘나서는 이 업계가 오래갈 수 없었다.
조선 말기에 풍속화가 어찌 발전할 수 있었겠는가. 나 혼자만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김홍도가 있었고, 다른 화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 같이 그 시대를 만들었기에 지금의 나도 있을 수 있었으니.
그걸 아는 난 결심했다. 슬럼프에 빠진 화가에겐 다른 이의 환기가 종종 도움이 되는 법.
“어머니, 박현민 선생님의 폰 번호 말이에요. 그대로이실까요?”
“왜? 설마…… 전화해 보게?”
“네, 저랑 궁합도 좋은 선생님이셨으니. 한 번쯤 연락을 드려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다른 화가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겠다는 아주 사소한 계기. 난 이게 뭘 만들어 낼지 이때까지만 해도 까맣게 몰랐다.
* * *
기업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물건을 많이 판매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는 본부. 그게 바로 마케팅 본부의 할 일이었으니.
오늘도 거기선 날카로운 말들이 서로 오가는 중이었다.
“이건 안 돼.”
마케팅 본부의 1부 부장님 양종수 부장.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파일을 내려놓았다.
“예? 왜요?”
그에게 반문 중인 안정민 과장. 그는 양 부장님의 말에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아트 콜라보는 진짜 좋은 방법 아닙니까? 기업과 아트의 만남은 이제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에요.”
아트 콜라보.
이걸 하는 기업들은 날이 갈수록 늘고 있는 추세였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덩치가 큰 기업일수록 생각보다 트렌드를 쫓기 힘들었다.
준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잘나가는 작가와의 협업이 효율성이 좋았다. 아트 콜라보는 이를 실행에 옮기는 방안이었으니.
“MZ세대들에게 이거만큼 잘 먹히는 게 없는 거 아시잖아요.”
MZ세대가 소비의 주축으로 떠오르며 아트 콜라보는 점점 더 활성화되는 중이었다. 그 시즌 중에만 나오는 희소템. 그게 MZ가 보는 아트 콜라보였으니까.
“그거 다 한때였잖아. 요즘 들어 이거 하는 기업이 어디 있어? 했다는 것도 다 최근이 아니잖아?”
“하지만 최근에 SJ―Ⅱ에서도 협업을 한걸요.”
“그게 벌써 2년 전이잖아.”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안 과장이 말끝을 흐리며 맞장구를 쳐 주자, 양 부장은 신이 난 듯 줄줄이 본인 의견을 꺼내 놓았다.
“우리 본부장님 매일 트렌트 타령하시는 거 몰라?”
마케팅 본부장. 그는 늘 마케팅도 트렌드를 따라가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 트렌드라는 게 다 어디서 한 번씩 한 걸 좋아한다는 점이었지만. 그러다 보니 꼭 근거 자료를 필요로 했다.
“이런 감 떨어진 거 들고 같이 올라갔다간 불호령 떨어질 거야.”
“그건…….”
“난 딱 질색이야. 정 원하면 어차피 같이 들어갈 거 그 앞에서 이야기해 보든가.”
“……안건에 올리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말해요.”
팀장 이상급들이 참석하는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기적으로 하는 회의인 만큼 안 과장 또한 팀장 대행으로 또한 참석할 예정이었으니.
하지만 그러면 뭘 하겠는가. 거기서 그나마 입이라도 뻥끗할 수 있는 건 부장급들 이상이었다.
팀장이 말을 하려면 위에서 말해 보라고 시키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하물며 안 과장은 팀장 대행일 뿐. 진짜 팀장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하지 말라는 거지. 안 과장도 팀장 달아야 하지 않겠어?”
보신제일주의. 회사원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기도 했다. 안전한 방향으로 가야 그나마 피해를 덜 보는 게 세상의 이치였으니까.
안 과장은 결국 양 부장과 함께 조용히 회의실로 향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시죠.”
언뜻 보면 회의는 분명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평소라면 양 부장의 말대로 적당히 넘어갔을 회의. 이상하게도 오늘의 본부장님은 좀 다른 듯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본부장님 표정이 왜 저러시지?’
분명 가만히 회의를 잘 듣고 계셨다. 각 부의 부장들이 말하는 내용을 귀담아듣는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부장들의 표정도 굳어 갔다. 눈치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온 이들이었으니. 본부장의 표정이 시시각각 안 좋아지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본부장의 입에서 차가운 어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러분들 월급이 얼마인지 제가 말해 줘야 합니까?”
월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다음에 나올 말이 뭔지 모를 부장들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마케팅을 못해서 제품이 안 팔리면 그 비싼 월급들 다 못 받을 텐데요.”
“…….”
“그런데 고작 이런 아이디어밖에 안 나오다니. 조만간 정리 해고라도 들어가야 좋은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겠군요?”
분명 존댓말로 하고 있음에도 듣는 이들을 괴롭게 만드는 어투였다.
한참 동안 부장들의 멘탈을 가루로 만들겠다는 기세로 말하던 본부장. 그의 다음 타깃은 아무래도 팀장들인 모양이었다.
“부장님들보다 젊으신 우리 팀장님들도 이 정도 생각이 전부이신가요?”
“…….”
“아니면, 제가 한 분씩 호명해야 새로운 아이디어를 주시려나요.”
1년에 몇 번 있지도 않은 게 이 정도의 분위기였다. 그렇기에 다들 눈에 띌세라 숨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본부장의 입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온 것은.
“거기 제일 젊으신 과장님. 안정민 과장님 맞으시죠?”
그는 속으로 기함했다. 본부장이 왜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일개 과장일 뿐, 팀장도, 부장도 아닌데.
“다음 팀장 후보로 거론된다고 들었는데요.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역시나 승진 후보자이기 때문에 기억하고 계신 거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겨우 과장의 이름이 왜 본부장의 머리에 박혀 있겠는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그는 입을 열었다. 회사에서 본부장은 그야말로 제2의 하늘이었으니까.
“본부장님, 실은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습니다.”
뭐라도 말해야 했다. 이럴 때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면, 팀장 자리가 더 멀어지는 법이었으니까. 그러나 그의 말에도 본부장 측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여기 올라오지도 못했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 아니에요?”
“요즘에는 잘 안 쓰는 방법이라…….”
“그럼 들을 것도 없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전 정말로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의 트렌드에도 맞고요.”
트렌드. 마케팅 본부장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였다. 이를 사용하며 그는 입을 열었으니.
역시나 이건 분명 효과가 있었다. 방금까지 들을 생각도 없던 본부장의 입에서 질문이 튀어나왔으니까.
“그게 뭡니까?”
“콜라보레이션입니다.”
“콜라보요?”
“예, 아트와 기업 간의 콜라보는 늘 괜찮은 판매 전략입니다.”
“그렇긴 하죠. 명품 브랜드들도 종종 하니까요.”
루이비통, 구찌, 디올 등 각 브랜드가 주기적으로 아트 콜라보레이션을 하는 이유.
그건 가짜 명품과의 차별성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온 그들만의 한정판은 상품 가치를 계속 올려 주는 좋은 수단이었으니까.
가짜는 따라 할 수도 없고, 할 시간도 없었기에. 한정적인 시간 동안 한정적인 수량만을 뽑는 아트 콜라보.
이건 기업의 효과적인 마케팅 수단이긴 했다. 문제는 생각보다 이걸 할 만한 작가가 많지 않다는 것에 있었으니.
요즘은 기업이 화가보다 더 유명한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어지간한 대기업은 적당한 작가를 찾기 어려웠다.
기업의 이름값에 맞는 화가는 이미 죽었거나, 나이가 너무 많기에. 이런 식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난관이 많았다.
그러나 안 과장은 비장의 무기처럼 당당하게 한 화가를 꺼낼 수 있었다.
기업의 이름값에 걸맞게 유명해지고 있는 동시에 이런 콜라보를 진행해도 무리가 없을 만한 살아 있는 젊은 화가. 그런 존재가 엄연히 현실에 있었으니까.
“요즘 아시아권에서 아주 인기인 예술가가 있습니다. 어쩌면 본부장님께서도 아실 수도 있으신 분이시죠.”
“그게 누굽니까?”
“혹시 신윤성 화가를 아십니까?”
신윤성 화가. 만약 본부장이 그를 모른다면 꽤 설명이 길어질 수 있었다.
아까 양 부장이 이 방안을 탈락시켰다. 그렇기에 지금 그의 손에는 아무런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았으니.
그렇다고 이 와중에 밖에서 자료 좀 가져오겠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이를 잘 알고 있는 안 과장은 침을 꿀꺽 삼키며 본부장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시각적인 자료 없이 설득하기 위해선 상대방이 어느 정도의 기본 지식은 있어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