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95
95화 그게 결정적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늘 내 걱정을 하셨다.
처음에는 그림에 재능을 보여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잠시. 너무 빨리 명성을 얻고 있다며 오히려 우려의 눈길을 보내셨다.
‘그 걱정이 이해가 되는 걸 보면, 확실히 나도 나이가 든 거지.’
육체적인 나이가 어릴 뿐. 이미 전생에서 꽤 나이를 먹어 본 나였다. 그렇기에 할아버지의 걱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심지어 이번 생의 난 큰 실패가 없었으니.
전생의 실패가 도화서에서 나온 일이었다면, 이번 생은 정말 아무런 난관이 없다시피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술술 풀리다 보니 이 자리까지 왔으니까. 앞으로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걸 옆에서 보고 계시니, 걱정이 되시는 것이리라.
이를 알고 있는 난 짜증 대신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를 안심시켜 드리면 더 좋을 것 같았기에.
“제가 묻힐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제가 이길 수도 있죠. 예술은 모르는 법 아니겠어요?”
“그거야 그렇다만…….”
“뭐. 저야 이기면 대박이요, 져도 본전이라고 여겨서 수락했죠.”
스넬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 상표인지 알고 있었다.
이 나라를 포함해 드넓은 세계에서 현재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도.
그러나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이기에 난 오히려 거침이 없었다. 내가 언더독인 입장이었으니까.
“만약 져도 된다는 마인드로 하는 거면…….”
“에이, 할아버지. 제가 그럴 리가 있어요? 저 지는 것 싫어한다는 거 아시면서.”
일부러 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부담이 없을 뿐. 승부욕이 없는 게 아니었다. 일단 대결을 한다면 반드시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나였다.
물론 이 소리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기다 걱정은 스넬이 해야 할 걸요? 제가 이기면 체면이 말이 아닐 테니까요.”
같은 시즌에 두 개의 콜라보가 나오게 될 경우. 서로 비교가 되는 건 어린아이도 할 법한 일이었다.
즉, 스넬 또한 내가 만든 스마트폰과 비교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으니.
“흘흘, 그 자신감은 보기 좋구나.”
“헤헤헤, 그쵸?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남이 날 칭찬하는 건 그렇게 듣기 민망했다. 그러나 난 내 스스로 칭찬하는 것에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이런 내 성격 때문에 흑역사도 생겼다. 조선에서 만들어진 미인도가 시와 함께 서울의 한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런 내 성향은 잘 고쳐지지 않았다. 어쨌든 내 웃음에 할아버지는 예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여셨다.
“네가 그리 말하니 좀 안심이 되는구나. 그래도 뭐든 필요하면 이 할애비에게 말하려무나. 도와주마.”
참으로 든든한 말씀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침 내게는 할아버지에게 부탁드릴 게 있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법. 난 냉큼 할아버지의 옆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할아버지, 혹시 할머니와 같이 여행 가실 생각 없으세요?”
“여행?”
두 눈을 동그랗게 뜨시며 의문 어린 눈빛을 보이시던 할아버지. 이내 무언가를 떠올렸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셨다.
“너…… 이번에 미국에서 하는 전시회에 아직 보호자가 필요한 게지?”
정확하셨다. 그러시더니 귀신이라도 빙의하신 듯 내 속내까지 꿰뚫어 보시는 게 아닌가.
“네 엄마나 아빠보단 이 할애비가 낫다고 봤구나. 흘흘.”
“아버지께서는 이번에야말로 교수 임용 준비하셔야 하기에 안 됩니다. 그쪽은 제가 거절이에요.”
시간 강사로 오랫동안 일하신 아버지. 드디어 교수가 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다고 들었다.
그런 귀한 기회를 앞두고 있는 아버지와 함께 미국에 갈 수는 없었다.
“그럼 다른 한쪽은?”
“어머니도 어려우세요. 이제야 겨우 본인 사업 본격적으로 하고 계시는데 거기에 초를 칠 수는 없죠.”
“으흠, 그거야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시는 할아버지. 그 반응을 보며 난 아예 쐐기를 박았다.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요, 할아버지. 다음부터는 이제 저 혼자도 잘 갈 수 있거든요.”
“하긴 대학에 가면, 이제 너 혼자 왔다 갔다 할 테지.”
한편으로는 길고 어떤 면에선 짧았던 내 유년 시절. 그게 조만간 끝을 맞이할 것이다.
이 시대의 기준으로도 내가 성인이 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니.
“그러니까요. 손주가 보내 주는 효도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이번에 같이 가시는 게 어떠세요?”
“흘흘, 네 할머니에게 한번 물어보마.”
그 대답 속에는 이미 반쯤 승낙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난 활짝 웃으며 남은 마카롱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 * *
스넬은 꽤 큰 규모의 대기업이었다. 그에 따라, 라고시안이 들은 소식을 스넬이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은 당연히 오대전자에서 추후 두 가지 콜라보를 한 번에 진행한다는 걸 알았다. 자연스럽게 보고서 또한 결재 라인에 올라왔으니.
“이게 뭔 소리야?”
“뭐 말입니까?”
“아니, 오대전자에서 제안한 그 콜라보. 우리 말고도 다른 쪽이랑도 한다는 거야?”
“예, 뭐라더라. 무슨 화가라고 봤었는데…… 잠시만요.”
유명 디자이너의 이름은 줄줄 외우고 있는 스넬의 소속 직원이었지만, 의외로 순수 미술 화가 쪽은 좀 약했다.
그 때문일까. 윤성 신이라는 이름을 관심 있게 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320만 달러는 그리 큰돈이 아니었으니까.
“여기 있군요, 라고시안 소속의 화가랍니다. 최근 경매에서 좀 비싸게 팔린 그림의 주인공이기도 하고요.”
좀 비싼 그림.
그들이 보는 320만 달러짜리 그림은 딱 그 정도였다. 스넬이 유명인의 소장품이 되면 그 이상의 가격도 자랑했으니.
그들에게 아직 신윤성의 이름은 그다지 와닿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런 질문도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근데 왜 그런 화가랑 같이한다는 거야?”
“글쎄요, 저희는 그냥 그렇다고 이야기를 들은 것뿐이라서요.”
“그 정도로 오대전자의 돈이 썩어 나는 줄 알았으면, 계약할 때 좀 더 뜯어내는 건데. 쩝.”
스넬은 이미 충분히 많은 계약금을 오대전자로부터 받았다. 꽤 콧대 높다고 자부하는 그들조차도 혹하게 만들 정도의 금액이었으니.
“그건 그렇고, 이게 왜 보고서로 올라온 거야?”
“혹시나 저희가 조치를 취해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올렸습니다.”
“그건 잘했네. 난 확실한 거를 좋아하긴 하지.”
고개를 끄덕이는 상사를 향해 그는 슬쩍 질문을 던졌다. 이미 예상하는 대답이 있었음에도 확인 차원이었다.
“그럼 이렇게 된 이상 뭔가 조치라도 취할까요?”
“조치 뭘 하게? 우리가 뭘 어쩌겠어?”
“예를 들면, 저희 쪽도 홍보에 박차를 가하는 게…….”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리랑 붙으면 흔적도 없이 깨질 텐데. 알잖아? 그런 화가 널리고 널린 거.”
겨우 그 정도가 아니었다. 수도 없이 많아서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 모든 작가들을 짓밟고 승자가 되었기에 지금의 스넬이 있을 수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 스넬의 대외협력팀 팀장은 입가에 묘한 비웃음을 지었다. 조소를 보내는 대상은 명확했다.
“오대전자가 왜 이런 멍청한 결정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우리 할 일만 하자고. 어차피 결과는 뻔할 테니까.”
티끌만큼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 그런 상사의 태도를 보며 그는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저 반응을 보니, 이건 이후에 폐기 처분 해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 *
아트 바젤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아트 페어를 개최한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건 역사가 긴 스위스에서 열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을 꼽으라면 이쪽. 바로 아트 바젤 인 홍콩을 내세울 수 있었다.
일단 개최만 하면 온갖 아시아의 수집가들이 출동을 하는 게 현실이었으니. 당연히 많은 갤러리들은 아트 바젤 홍콩에 참여하길 바랐다.
그러나 아트 바젤의 승인하에 참여할 수 있는 만큼. 매우 극소수의 한정된 갤러리들만이 아트 페어에 초대가 되었다.
그에 따라 자연히 그 근방의 위성 아트 페어들이 늘어났다. 거기 참석하지 못하는 갤러리들은 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트 바젤 홍콩에 온 사람들이 겸사겸사 들리길 바라는 것.
그게 일명 위성 아트 페어라고 불리는 행사들의 현주소였다.
문제는 어지간한 화가는 이 위성 아트 페어조차도 참가하기 어렵다는 것에 있었다.
일단 대형 갤러리에 소속이 되거나 초대가 되어야 했으며, 몇 번의 전시회를 통해 좋은 작품을 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이런 어려움을 그야말로 피부에 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후우…….”
박현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으며, 전화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제발. 제발.’
오늘 소규모 아트 페어 중 하나인 아트 센트럴. 그 초대 작가 명단이 나오는 날이었다.
‘이거도 안 되면 진짜 큰일인데.’
그의 스승이 슬럼프로 알고 있을 정도로 요즘 그는 풀리는 일이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요즘이 아니었다.
한때 대한민국 최초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주역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 그러나 10년의 세월은 길었다.
왕년에 잘나갔다고 해도 이 세계는 버티기 힘들었으니. 실제로 그의 작품 활동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어려워져만 갔다.
대대적으로 언론에 났던 현민이었음에도 지금은 전시회조차 제대로 하고 있지 못했으니까.
드르르륵―
폰에서 그의 생각을 깨뜨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번호를 확인한 그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신중한 표정으로 수화기 속의 목소리를 듣던 그. 점차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작가님. 이제 아트 센트럴의 초대 작가시군요.]단단한 어조로 축하의 인사를 건내는 상대방. 그러다 보니 오히려 호기심이 올라왔다.
“어…… 저야 무척이나 기쁩니다만…….”
아트 센트럴의 초청 작가. 그건 지금의 현민에게는 절대로 쉬운 게 아니었다.
“분명 어려울 것 같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죠, 분명.]“그런데 어떻게…… 아니. 물론 불만이 있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냥 정말로 궁금해서요.”
[궁금하실 법합니다. 저희 또한 의외였으니까요.]그렇게 말한 상대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여는 게 아닌가.
[작가님의 황금사자상 수상 경력이 컸습니다.]“예? 황금사자상이요?”
이미 10년도 더 된 기록이었다. 그런데 그게 컸다니.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였다. 그게 정말로 강한 영향을 지금까지 줄 수 있었다면, 현민이 이렇게 있을 리가 없었다.
황금사자상은 분명 대단한 상이었다. 하물며 그 당시에는 대한민국 최초였으니 더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엄연히 유통 기한이 있었다. 이 업계는 상 하나만 가지고 한평생 잘 먹고 잘살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기에.
그 순간이었다. 그의 귀에 매우 익숙한 이름이 들려온 것은.
[작가님, 신윤성 작가와 작업하신 적이 있으시죠? 그게 결정적이었습니다.]신윤성 작가.
10년 전 그와 함께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해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주역.
그러나 지금의 그와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벌어진 작가님. 그 귀한 성함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