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0
제9화
고량의 지척에 이른 진천이 그의 명치에 수도(手刀)를 찔러 넣음으로써 첫 공격을 알렸다.
물러서거나 상체를 비틀어 피하는 대신 고량은 주먹으로 맞받았다. 기세 좋게 달려들고도 강 대 강의 충돌을 원치 않는지 진천이 손칼을 회수하고 오른발 뒤축으로 돌며 고량의 우권을 비껴 냈다.
회전과 동시에 진천은 어깨로 고량의 가슴팍을 치받았다. 고량은 이번에도 팔꿈치로 맞불을 놓았다. 진천은 미련 없이 이 보 후퇴했다. 고량이 서슴지 않고 진천이 양보한 공간을 채우고 들어갔다.
고작 이 합의 공방만으로 우열이 판가름되었다. 짧은 전초전 이후 고량은 줄기차게 몰아붙였고 진천은 속절없이 밀려났다.
그러나 두 사내의 진퇴는 일직선상이 아닌 원형에서 이루어졌다. 왼 다리가 불편함에도 진천은 절묘한 보법을 선보이며 반경 일 장의 원을 벗어나지 않고 고량의 강력한 권공을 상대했다.
진천이 고량의 맹공에 버틸 수 있는 것은 보법 덕분만이 아니었다. 그의 몸은 고량의 주먹이 닿을라치면 버드나무 가지처럼 부드럽게 휘어지며 얄밉도록 아슬아슬하게 흘려 내었다. 마치 강풍을 맞은 갈대 같은 유연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회피만으로는 한계가 자명했기에 진천은 간간이 반격을 가함으로써 고량의 흐름을 끊었다. 특히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 튀어나오는 발차기로 번번이 위기에서 벗어났다. 타격을 허용하는 순간 뼈가 부러질 각오를 해야 했기에 고량은 진천의 우족이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면 거리를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고량이 가졌던 초반의 우세는 사오십 초가 흐른 후 백중지세로 바뀌었다. 진천은 뛰어난 신법을 십분 활용하며 전권(戰圈)을 넓게 썼다. 고량은 현란한 진천의 발놀림을 제어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렇더라도 주도권이 진천에게 넘어갔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권기(拳氣)가 일렁이는 고량의 양 주먹은 여전히 위력적이었고 진천은 좀처럼 그의 품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겉으로만 맴돌았다.
다소 지루한 공방전이 이어졌지만 창인의 장한들과 염방의 무리는 넋을 잃고 관전에 몰두했다. 그들은 진천과 고량이 주고받는 수단들이 얼마나 높은 수준인지 알 만큼은 되는 고수들이었다. 자고로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었다.
박빙의 승부에 변화가 생긴 것은 일백 초가 경과했을 시점이었다. 안개처럼 뿌연 권기를 둘렀던 고량의 주먹이 갑자기 수박처럼 커졌다. 지켜보던 이들 중 누군가 탄성을 질렀다.
“아아! 궈, 권강(拳剛)이다!”
신충의 외침에 중인의 눈들이 휘둥그레 떠졌다.
권강이라니.
강기를 구사한다는 건 초절정의 경지에 들었다는 뜻이었다. 하남 무림을 포함한 삼대변방(三大邊方) 무림에는 한 명도 없을 터이고, 중원 무림을 통틀어도 팔십을 넘기 힘들 터였다. 설마 목전의 권객(拳客)이 그 정도로 엄청난 강자였단 말인가.
놀람이 가시기도 전에 더욱 충격적인 장면이 중인의 눈앞에 펼쳐졌다. 커진 주먹을 몽둥이처럼 휘두르던 고량이 공중으로 도약한 진천의 무릎에 턱을 강타당하고는 통나무 쓰러지듯 뒤로 넘어간 것이었다. 실신한 듯 고량은 일어서지 못했으나, 진천은 무슨 영문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한순간에 승패가 갈리고 공터엔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 * *
털보 장초는 노덕을 집 근처까지만 데려다주고는 허 노야의 낯짝을 보기 싫다며 부리나케 가 버렸다.
노덕은 홀로 방에 들어섰다. 조인상이 변함없이 침상에 누운 채로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게, 노 장주. 몸은 좀 괜찮은가?”
“어제는 추태를 부려 부끄럽소.”
“아닐세. 내가 너무 몰아간 것 같으이. 그간 자네의 마음고생이 여간 아니었음을 알겠네. 내키지 않으면 말하지 말게나.”
“이제 와서 무얼 감추겠소. 다만 내 얘기를 늘어놓기에 앞서 알고 싶은 게 있소.”
“뭘 말인가?”
“염방의 무리와 고량, 그 아이는 어찌할 작정이오?”
“여기도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네. 법도 있고 판관도 있다는 말일세. 마을의 대표자들이 모여 그들의 처분을 두고 의논할 걸세. 나도 일원이지만 보다시피 몸이 이래서 참석할 수가 없구먼. 중지에 따르겠다고 일러두었네.”
“혹시 그들을 죽일 참이오?”
“창인에는 사형이 없다네. 죽을죄를 지었어도 죽을 일은 없다는 뜻이지.”
“아, 다행이오.”
“꼭 그렇지는 않네. 그자들은 무공을 폐지당하고 이십 년가량 뇌옥에 갇히게 될 공산이 다분하네. 자네도 그다음 수순을 짐작할 테지? 떵떵거리며 살던 무인들은 그 꼴이 되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잖은가. 장담컨대 그들 중 대부분은 몇 달 이내에 자결을 택할 걸세.”
노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내 의질만큼이라도 선처해 줄 수 없겠소? 조 형은 이곳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잖소. 간곡히 청컨대 부디 그 아이를 살려 주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닐세. 가령 내가 그의 방면을 원한다고 해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네. 나는 열 명의 대표 중 하나일 뿐일세. 다수가 결정하면 따라야 하네.”
“그래도 뭔가 방법이 있지 않겠소? 미안하지만 조 형이 아무 힘도 쓸 수 없다는 말은 믿기 어렵소.”
“허어, 이 사람도 참.”
“그 아이가 이런 식으로 망가지면 나는 죽어서도 의형을 볼 면목이 없어지오. 제발, 나를 도와주오. 조 형.”
“왜 그렇게 자네와 척을 진 그자를 구제하려 드는가?”
“다 내 잘못이기 때문이오. 제 부친을 닮아 협객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정심한 성품을 가진 그 아이가 그렇게 삐뚤어진 건 구 할이 내 탓일 거외다. 그러니 벌은 내가 받아야 마땅하오.”
“아무래도 자네 이야기를 마저 들어야겠구먼. 부담스럽겠지만 어제 중단된 부분부터 다시 시작해 볼 텐가?”
표 나지 않게 심호흡을 하며 노덕이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막 고통스러운 회상을 시작하려는 찰나 조인상이 가로막았다.
“잠깐 기다리게. 천아를 불러 같이 듣는 게 낫겠네. 어차피 나중에 내가 내용을 전해 줘야 할 텐데 이중으로 수고할 필요는 없잖은가. 자네니깐 귀띔해 주네만 천아는 이곳에서 나보다 훨씬 거물일세. 그 아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의질을 구하려는 자네의 바람을 이루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될 걸세.”
노덕은 조인상의 권고를 반겼다. 그로서는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한 게 하나둘이 아니던 차였기에 노덕은 진천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염방주와 내 의질을 물리친 걸 알고 있소, 조 형?”
“자네가 오기 전에 대충 들었네.”
“정말 놀랐소. 조 형의 언질도 있고 해서 강하리라고 짐작은 했소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소. 약관도 안 된 청년이 조만간 용호에 뽑힐지도 모르는 금강권을 꺾다니. 이 일이 알려지면 세상이 뒤집어질 거요.”
“이해는 하네만 과장이 심하군, 자네. 잠시 호사가들의 귀와 입을 즐겁게 해 주기야 하겠지만 세상이 뒤집어질 일은 아닐세.”
“그렇지 않소, 조 형. 더욱이 그는 부상 중이 아니오? 정상이 아닌 몸으로 내 의질을 이겼다면 실제 무력은 그 이상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소?”
“뭐, 그야 그렇겠지.”
“그만한 고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경우는 없소. 그는 필시 은거고인의 비전을 이었을 터. 대체 그의 사부는 누구요?”
“말하기 곤란하네.”
“비밀이란 뜻이오?”
“꼭 그렇지는 않네만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껄끄러운 구석이 있구먼. 나중에 그 아이에게 직접 듣게나.”
“……알겠소. 객잔의 주인에게서 그가 고귀한 혈통이라고 들었는데 그건 알려 줄 수 있소? 그는 어느 가문 출신이오?”
“흠, 그 질문에 관해서는 확실한 답을 줄 수 있네.”
조인상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길바닥에 떨어진 임자 없는 당과를 발견한 아이 같은 눈으로 보지 말게나. 그것이야말로 비밀이란 말을 하려던 참이니까. 천이 어미가 노상 자랑하면서도 정작 지아비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문 탓에 아무도 모른다네. 물론 천아야 알겠지만 천하의 효자답게 죽은 제 어미의 함구령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네. 그렇지만 머지않아 밝혀지리라 보네. 자네의 공이 지대함세.”
“무슨 말이오?”
“어제 자네가 ‘용호’ 운운하는 바람에 그 아이의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갔지 뭔가. 자네를 돕고 싶다는 명분을 대긴 했지만 천아가 중원에 가고자 하는 목적은 용호단(龍虎團)에 들기 위함일세.”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소.”
“알고 보면 간단한 이야기일세. 천이 모친은 그 아이에게 정맹의 용호가 되고서야 가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못 박아 두었다네. 일종의 족쇄였네. 자네도 알다시피 용호단의 일원이 되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다음으로 어려운 일이니까. 수십만에 달하는 정파의 후기지수 중 극소수만이 가능한 위업이 아닌가.
천아는 진즉 창인의 일인자가 되었네. 그 탓에 오히려 자기의 정확한 무력을 측정할 길이 없었더랬지. 그래서 원래 계획대로 사부들의 유학(遺學)을 완성한 연후에나 강호에 나갈 생각이었는데 자네가 용호에 뽑히기에 충분한 무력의 소유자라는 ‘고량’이라는 척도를 제시했으니 귀가 솔깃할밖에. 이제 그자를 꺾었으니 오랫동안 그 아이를 이곳에 가둬 두었던 빗장이 풀린 걸세.”
“그의 부모에게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모양이구려. 그나저나 ‘사부들’이라면 그를 키운 이들이 둘 이상이라는 말이오?”
“엄밀히 말하자면 열 명. 아니, 스무 명 이상이지. 하지만 정식으로 사제지연을 맺은 작자들은 둘일세.”
“작자들? 어째서 그런 표현을 쓰는 거요?”
“그야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이니까 그렇지. 그치들에 대해서는 입에 담기도 싫으니 그만 묻게나.”
“객잔 주인 말로는 조 형이 그의 모친을 데리고 들어왔다던데.”
“털보 놈이 별 얘기를 다 했구먼. 그녀와 특별한 관계는 아닐세. 전날 문가의 추적을 피해 대륙 각지를 전전하다 그들을 따돌리고 최종적인 안식처로 택했던 영암에서 우연히 만났다네. 영암은 마령의 지척이지만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 아닌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땐 흔한 거지인 줄 알았네. 그런데 놀랍게도 외관은 물론이고 목소리마저 완전히 변한 나를 알아보더군. 나는 전혀 그녀가 기억에 없는데 말일세. 내 삐딱한 성정을 아는지 정체를 폭로하겠다고 위협하기보다는 자기를 도와 달라며 애원하더군.
나는 그녀 역시 나 같은 도망자임을 간파했다네. 동병상련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련한 느낌이 들더구먼. 그것과는 무관하게 그녀에게 들통이 났으니 영암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었네. 그래서 창인으로 데려가 달라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네.”
“허어…….”
“부녀 행세를 하며 중원을 종단한 끝에 반년 후 하남 무림에 들어섰다네. 여러 차례 아찔했던 순간들을 겪었으나 어찌어찌 고비를 넘겼다네. 한편 창인에 오는 동안 그녀의 배가 점점 불러 오더군. 나를 처음 만났을 땐 이미 임신부였다는 게지. 공교롭게도 오늘 여기 쳐들어온 염방의 본거지인 오란에서 천아를 낳았다네.”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더니 순전히 거짓말이었구려. 조 형은 그의 모자에게 은인이나 다름없구먼.”
“허허, 낯 뜨겁네, 이 사람아. 은인이라니, 행여나 그런 소리 말게. 그녀가 무덤 속에서 뛰쳐나올까 봐 두렵구먼.”
엄살만은 아닌 듯 조인상이 짧은 콧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모친도 보통 여인이 아니구려. 아이까지 밴 몸으로 그 험한 강호를 헤쳐 나오고 이 궁벽한 곳에 이르러서도 그 아이를 경이로운 무인으로 키워 냈으니. 실로 훌륭한 여인이외다.”
조인상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죽은 이를 두고 험담하고 싶지는 않네만 그녀는 그런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는 여인일세. 별의별 독종들을 다 겪었지만 내 평생 그토록 모질고 성질 더러운 종자는 처음 보았네. 그녀는 사갈 같은…….”
비난이 과하다 싶었는지 조인상이 말끝을 흐렸다.
조인상과 여인 사이에 모종의 알력이 있었음을 짐작했으나 노덕은 더 캐묻지 않고 진천의 성장 과정으로 넘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밖에서 침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입니다, 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