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00
제99화
수백 개의 권영(拳影)이 너른 석실을 가득 채웠다.
권왕의 주먹은 보통 사람보다 약간 큰 정도였으나 강기가 서려있었기에 수박보다 커 보였다. 진천은 우박처럼 쏟아지는 권왕의 권강을 피해 요리조리 달아났다.
권왕과의 비무는 기본적으로 가린과 행했던 수련과 동일했다. 진천은 권왕의 주먹에 걸리면 패배한 것으로 간주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가린처럼 진천을 잡기 위해 날래게 움직이는 대신 권왕은 석실의 중앙을 차지하고선 진천의 움직임에 따라 방향만 바꿔가며 주먹질을 해댄다는 것이었다.
진천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며 팔영보를 극성으로 펼쳤다. 가린과 연습할 때와는 달리 이따금 권왕에게 접근해 절멸도로 반격하기도 했다. 권왕은 그의 호신강기에 균열을 일으킨 절멸비의 위력에 놀란 후부터는 진전의 공격을 경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 이후로는 과감하게 권강의 태풍을 뚫고 거리를 좁힐 때마다 진천은 어김없이 권왕의 주먹에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권왕이 마지막 순간에 공력을 거두지 않았다면, 그리고 여상구가 끝끝내 고사해 돌려주지 못한 천잠갑의가 아니었다면 매번 중상을 입었을 터였다.
권왕과 비무수련을 하며 진천은 절대지경의 위엄을 절감했다. 권왕은 두께와 높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철벽이었다. 마치 여덟 살 때 처음으로 장초 아저씨와 겨루었을 때와 흡사한 느낌이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상대의 털 끝 하나 건드릴 수 없음을 확인하는 데서 오는 무력감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그러나 진천은 각오를 다잡았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처럼 여겨졌지만 오 년 만에 장초를 넘지 않았던가. 권왕과 장초를 비교할 순 없지만 장초에게 그랬듯 언젠가는 권왕에게 이를 수 있을 것이었다. 오 년은 무리이더라도 오십 년이나 걸리지는 않을 터였다.
진천은 중대한 국면을 맞이했음을 직감했다.
지난 며칠 간 그를 괴롭히던 근질거림이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살갗이 아니라 뼛속에서 우러나오는 가려움이었다. 진천은 이 미칠 것 같은 가려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것은 무력이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기 직전 나타나는 전조였다. 가려움이 해소되면 무위가 상승할 터이고 그렇지 못하면 장기간의 정체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었다. 진천은 일 년 전 자신의 두개골과 척추를 박박 긁어버리고 싶은 욕구를 견디며 최초로 절멸도를 구현했던 순간의 전율을 생생히 기억했다. 그날 절멸참을 꺼내지 못했다면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했을 거라는 것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진천은 집중했다. 지금은 지난 삼 년 간 제자리걸음이었던 팔영보의 진일보 여부가 달린 시점이었다. 여기서 나아가지 못하면 오랫동안 아쉬움을 달래야 할 게 틀림없었다.
진천은 바늘도 빠져나갈 여지가 없을 것 같은 권강의 폭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전에 없던 모험이었다. 그의 눈빛을 유심히 살펴보던 권왕은 공세를 한층 강화시켰다. 진천이 중대한 고비에 들어섰음을 간파한 것이었다.
진천의 몸에 강기의 폭우가 쏟아졌다. 진천은 화연을 발했다. 한 줄기 연기로 화한 그의 신형이 소낙비 안에서 어지러이 회전했다. 비환으로 펼치는 춤사위였다.
진천은 몰아지경에 빠졌다. 권왕도 보이지 않았고 자신에 대한 의식도 없었다. 오로지 그의 동체를 짓이기기 위해 날아오는 주먹그림자들만이 선연했다.
일종의 황홀경에서 진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권왕의 주먹이 이렇게 느렸던가. 아니면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떠올릴 찰나 진천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권왕의 권강에 어깨를 맞고는 이 장 높이의 공중에서 그대로 곤두박질 쳤다.
권왕은 바닥에 널브러진 진천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넋이 나간 듯 멍한 얼굴을 한 진천을 건드리지는 않고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처진 눈을 끔벅거리던 진천이 실성한 듯 헤벌쭉 웃었다. 권왕은 한편으로는 안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악했다.
진천의 표정이 평상시로 돌아왔다. 자신의 옆에 쪼그려 앉은 권왕을 본 진천이 벌떡 일어섰다. 권왕이 진천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앉아라, 아우야. 올려다보기 목 아프다.”
진천은 권왕의 명에 순응했다. 그의 낯에 물든 희열감을 인지한 권왕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네 녀석이 여간내기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만 이렇게 대단한 물건인 줄은 몰랐구나. 여기서 나하고 손을 섞은 지 사흘이 지났더냐? 아니면 나흘? 며칠 만에 괄목상대의 성취를 이루다니 내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구나. 방금 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느니라. 이러다가 천무대제에 이어 무림사(武林史)에 제이의 무신(武神)이 탄생하는 거 아니냐?”
권왕의 과장된 언사에 진천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제가 어찌 감히 천무대제에…….”
“됐다. 괜한 겸양일랑 삼가래도. 뭐, 천무대제까지는 너무 갔을지 몰라도 네 무재는 능히 석년의 무황과 비견할 만하다. 허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로다. 그런 천재는 다시 못 볼 줄 알았거늘.”
진천은 바닥에 손을 짚고 머리를 조아렸다.
“모두 큰 형님 덕분입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너를 다듬느라고 지난 사나흘 간 내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모른다.”
진천은 권왕의 공치사가 허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권왕은 그의 경지에 맞춰 세심하게 버거운 시련을 제공해 주었었다.
“아까 네 녀석 눈빛이 예사롭지 않기에 설마 했는데 정말로 단박에 뛰어오르다니. 얼마만의 비약이더냐?”
“삼 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사오 단계쯤이라던 팔영보가 육칠 단계로 올라선 게냐?”
“잘 모르겠지만 새로운 지평에 들어섰음은 확실한 듯싶습니다.”
“아무튼 축하한다, 아우야. 이제 어지간한 놈들은 네 옷자락도 건드리지 못할 게다.”
“감사합니다, 큰 형님.”
진천은 다시 절을 했다.
팔영보의 급작스러운 향상은 팔 할이 권왕 덕분이었지만 진천은 가린의 공도 상당함을 인정했다. 보름 동안 밤마다 후원 연무장에서 그를 상대로 쏟았던 땀이 바탕이 되지 않았더라면 여기서의 기연도 없었을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시초는 의형 여상구였다. 두 달여 전 바로 이 장소에서 그와 생사를 오가는 흉험한 일전을 치르며 진천은 팔영보의 효능과 한계를 확인했었다. 그 이후 창천도군과의 비무, 그리고 원주 강가에서의 위기상황을 거치는 동안 팔영보는 알게 모르게 발돋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최적의 시기에 권왕이라는 최고의 인연을 만나 최상의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진천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련의 행운들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오늘 얻은 망외의 성과는 엿새 후로 다가온 소중걸과의 대결에서는 물론이고 무림이라는 험난한 세계에서 생존하는 데 큰 힘이 되어 줄 터였다.
해가 지자 삼백여 일꾼들이 썰물처럼 삼보장을 빠져나갔다.
삼보장주 노덕을 비롯한 여덟 사람은 이곳저곳에 등을 걸고는 청와옥 앞에 모여 진천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오늘은 소중걸이 진천과의 대결을 예고하고 떠난 지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모두의 얼굴에 짙은 긴장감이 배어있었다. 가린과 하수린을 압도하던 소중걸의 강렬한 인상이 뇌리에 화인처럼 찍혀있는 탓이었다.
근래 강호는 소중걸에게 군더더기 없는 장마(掌魔)라는 별호를 부여했다. 그로써 소중걸은 일약 장마류(掌魔流)를 대표하는 마인으로 우뚝 섰다. 그의 정확한 나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른 살은 넘지 않았으리라는 추정이 중론이었다. 이십 대에 마도사류(魔道四流)의 일인자로 꼽힌 이는 마련의 현 지존인 마왕(魔王) 권상명(權尙明)이 유일했다. 소중걸은 벌써부터 삼백 년 이래 최강의 마존(魔尊)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권상명을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장마 소중걸과 하남신룡 진천 간의 우열은 당금 무림 최고의 관심사들 중 하나였다. 한 달여 전만 해도 창천도군이라는 거물을 물리친 하남신룡을 우위에 두는 여론이 우세했으나 지금은 완연한 역전 분위기였다. 하남신룡의 승리에 외적 변수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의구심이 널리 퍼진 데다 마련의 마두들이 소중걸의 별호에 반발하지 않았다는 풍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같은 편이라도 약자라면 가차 없이 깎아내리고 밟아버리는 마인들의 특성 상 그들의 그러한 태도는 소중걸을 장마류 최강의 무인으로 인정한다는 반증이었다. 검마와 도마(刀魔), 그리고 독마(毒魔)는 창천도군에 비해 이름값이 아래가 아니었다.
노미현이 침묵의 울타리를 깨뜨렸다.
“이길 수 있겠죠, 청로?”
주체와 대상이 빠졌지만 다들 그녀의 말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여상구가 그의 상징과도 같은 이마주름을 잡았다. 그러자 삼십 대 초반의 미남자가 갑자기 중년의 흉한으로 탈바꿈했다.
“당연하지, 이것아.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 그놈은 오늘 염왕을 보러 가게 될 게다. 아니지, 아우님이 그놈을 죽일 리는 없으니까 장공을 쓰지 못하도록 손모가지를 잘라버리는 정도로 끝나겠구나. 아무튼 아우님의 승리는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니라. 그러니 쓸 데 없는 걱정일랑 날려버리고 나처럼 느긋하게 즐기려무나.”
“흥, 허세를 부리려면 이마나 펴고 말해요. 자기도 잔뜩 굳어있으면서.”
“이것아, 이건 긴장이 아니라 열광의 표시니라. 아우님이 장마라는 거창한 꼬리를 단 쥐새끼를 때려잡는 광경을 상상만 해도 초야를 치르는 새색시처럼 심장이 콩닥콩닥하는구나.”
“쳇, 비유를 해도 꼭. 징그러워요. 그리고 그자는 쥐새끼가 아니에요. 무시무시한 맹수라고요. 청로는 그날 여기에 없었으니까 그자가 얼마나 강하고 흉포한지 보지 못했잖아요.”
“정말로 위험한 건 나처럼 살기를 흘리거나 그놈처럼 겉으로 사납게 구는 종자들이 아니다, 이것아. 아우님이야말로 진정으로 무서운 사람이야. 아우님은 창천도군과 벽력도문의 개새끼 같은 강적들을 상대하면서 한 순간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입씨름만 잘하지 머리채를 붙잡고 싸운 적도 없을 너는 결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건 절대다수의 무인이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능력이니라. 전날 나를 찾아온 아우님과 처음 비무를 했을 때 생사지경에 처하고도 일절 흔들림 없는 아우님의 눈을 보고는 등골이 오싹했더랬다. 필설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포였다. 감동이기도 하고.”
여상구가 참았던 소피를 보는 취객처럼 몸을 부르르 떨자 실소한 노미현이 친인들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의도대로 그녀와 여상구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다 어느 정도 긴장이 누그러진 기색들이었다. 하지만 하수린의 안색만은 여전히 어두웠다.
“왜 이렇게 늦죠?”
하수린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아무도 답변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예정대로라면 진천은 진즉 돌아왔어야 했다. 그의 지각은 그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는 일없이 동료들을 걱정시킬 사람이 아니었다.
여상구의 이마를 가로지른 주름이 깊어졌다.
“권왕 어르신이 아우님과 함께 있네. 천하의 누구도 아우님을 해할 수 없다는 말일세. 그러니 아무 염려 말고…….”
눈썹을 찌푸려 갈매기를 만든 하수린이 여상구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바로 그 점이 우려스러워요. 권왕께서 진 공자에게 특훈을 시킨다고 했다면서요? 무리를 하다가 부상이라도 당했다면…….”
여상구도 하수린의 말을 끊었다.
“재수 없는 소린 하지 말게. 부정적인 생각 자체가 고약한 알을 낳는 법일세. 오늘 같이 중요한 날에는 특히 입조심을 해야 한단 말일세.”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하수린은 반박을 자제하고 입을 다물었다. 여상구와 언쟁을 벌일 계제가 아니었다.
별안간 가린이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왜 그래, 가린?”
매일 가린에게 생닭을 챙겨주며 그와 친해진 차소영이 물었다. 가린의 대답이 나오기 전에 여상구가 품에서 태극선을 뽑아들었다. 다들 그를 따라 정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문으로 들어서고 있는 이가 소중걸이 아님은 안력이 약한 노덕과 노미현도 알 수 있었다. 방문자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일견에도 열 명은 넘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