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01
제100화
부채를 쥔 여상구가 광장을 가로질러 불청객들에게 나아갔다.
청와옥으로 들어가라는 그의 지시를 뿌리치고 노덕과 노미현 부녀도 다른 이들과 함께 뒤를 따랐다. 십여 명의 외인은 학익진을 펼치듯 횡으로 길게 늘어서서 삼보장 인사들을 기다렸다.
좌에서 우로 그들을 훑어본 노미현은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마령 문가의 도객들이었다. 모두 열세 명이었고 한 명을 뺀 나머지는 전부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었다. 한 명은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노미현이 단번에 그들의 신분을 파악한 것은 그를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풍뢰도 문상현이었다. 문상현은 다섯 명 밖에 없다는 이십 대 용호의 일인이자 마령 문가의 미래로 불리는 신성이었다. 노미현은 전날 만수보에서 그녀를 끊임없이 훔쳐보던 문상현의 모습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노미현은 소름이 돋았다. 오월이 가기 전에 마령 문가의 도호들이 삼보장을 찾을 거라던 진천의 예측이 떠올라서였다. 진천은 단순히 시기만 맞춘 것이 아니었다. 삼보장에 올 이들이 대부분 구인결에 나타나지 않았던 노인들일 테고 그들의 방문목적이 우호적인 교류나 친선을 위한 것과는 거리가 멀 거라고도 했다. 노미현은 도객들의 의복에서 진천의 말이 옳았음을 알았다.
그들은 마령 문가 특유의 백색무복 대신 칙칙한 흑의를 걸치고 있었다. 소매에 자색 띠도 없었고 가슴에 마령 문가를 상징하는 반월도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불온한 의도를 품고 있지 않다면 굳이 가문의 제복을 입고 오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노미현은 심장이 떨렸다. 목전의 노인들은 진천이 예견한 대로 강호에서 은퇴한 전대의 고수들일 터였다. 기실 지난달에 진천이 곽건과의 일전에서 당한 내상이 낫지 않았음에도 서둘러 원주 강가를 찾았던 것도 마령 문가의 보복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북천도왕의 윤허를 얻어 강가의 일원이 된다면 마령 문가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할 거라는 계산이었다.
강가에서의 일이 틀어졌으니 대책이 무산된 셈이었지만 노미현은 크게 두렵지는 않았다. 진천이 다른 대안을 마련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음중(陰重)한 가운을 발산하는 노도호(老刀豪)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리가 절로 후들거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렬로 늘어선 마령 문가의 도객들과는 달리 삼보장 식구들은 공처럼 동그랗게 뭉쳤다. 여상구가 홀로 앞으로 나갔다.
“고명하신 분들께서 이 누추한 곳에는 어인 일이시오? 미리 통보를 주시지. 마중은 나가지 못하더라도 귀빈들을 접대할 음식은 장만할 수 있었을 텐데.”
십삼 인의 중앙에 선 백염백발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네가 도화각주더냐?”
“그렇소만. 귀하는 뉘신지?”
노인은 여상구의 질문을 묵살하고 자기 할 말만 했다.
“하남신룡이란 아이는 어디 있느냐?”
여상구는 노인이 풍뢰도 문상현으로부터 전음을 받았음을 알아차렸다.
“내 아우님은 잠시 볼 일을 보러 나갔소만. 헌데 이 야밤에 무슨 일로 본 장을 찾았소이까? 보아하니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노인이 여상구의 너스레를 중단시켰다.
“그 아이는 언제 돌아오느냐?”
여상구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느물거렸다.
“그야 모르지. 올 때가 되면 올 거요. 그런데 내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계속 묻기만 하다니 좀 심하지 않소? 이곳의 주인은 엄연히 우리들이 아니오? 객들은 객들다운 예의를 보여야 할 것 같소만.”
마령 문가의 도호들에게서 일제히 분기가 피어올랐다. 여상구는 겁을 먹기는커녕 덥지도 않은데 부채질을 하며 그들의 약을 올렸다.
중앙의 노인이 양팔을 들어 금방이라도 발도할 태세인 동료들을 자중시켰다.
“듣던 대로 맹랑한 놈이로구나. 그래, 네 질문에 답해주마. 나는 청운이다.”
삼보장 진영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청운도군(靑雲刀君) 문병직(文炳直)은 단순한 원로가 아니었다. 그는 마령 문가의 전대 가주이자 원주 강가와 전쟁을 불사할 만큼 극렬하게 대립했던 인물이었다. 북천도왕에게 밀려 정맹의 맹주 위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삼사십 년에 걸쳐 정파 무림 무력 서월 이 위에 꼽히던 초강자이기도 했다.
현재 청운도군의 세수(歲數)는 일백을 헤아릴 터였다. 이미 십여 년 전에 금분세수(金盆洗手)했다고 알려진 왕년의 도호가 삼보장에 출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무림에 적잖은 파문이 일 게 틀림없었다.
여상구는 의지와 무관하게 뒷목이 뻣뻣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이내 긴장을 풀었다. 청운도군이 엄청난 거물임에는 분명했지만 이쪽이 가진 패는 그보다 훨씬 막강했다.
부채를 접어 가슴팍에 집어넣은 여상구가 포권을 했다.
“말로만 듣던 청운도군을 뵈니 영광이외다. 그런데 두 번째 질문에는 아직 답을 주지 않았소만.”
“갈!”
마령 문가의 도호들 중 성질이 급한 이가 호통을 치며 칼을 뽑아들었다. 청운도군이 그의 바로 왼편에 선 일행의 팔을 잡았다.
“기다려라, 병완(炳完).”
삼보장 인사들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다른 노인들보다 상대적으로 체구가 큰 노인을 바라보았다. 발산도군(拔山刀君)까지 오다니.
발산도군 문병완은 마령 문가가 보유했던 전대의 두 용좌(龍座) 위(位) 도군 중 일인이자 정파 무림 최강의 패도(覇刀)로 위명을 떨쳤던 도호였다. 발산도군은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은 성정으로도 유명했다.
쇳덩이 같은 간담을 자랑했지만 여상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산도군은 수틀리면 권왕의 이름을 들먹이더라도 불문곡직 칼을 휘두를 위인이었다. 진천과 권왕이 도착하기 전에 그를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는 뜻이었다.
육촌 동생을 말린 청운도군이 여상구를 노려보았다.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몇몇 아이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함이다.”
“무슨 책임 말이오?”
“우선 하남신룡이라는 아이는 무도한 무리를 편들어 본가의 행사를 방해하는 죄를 범했다. 다음, 너는 비무에서 살수를 쓰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인면요괴는 인간의 일에 끼어들어 흉악성을 보인 자체로 처벌받아야 한다.”
말귀를 알아듣는 가린이 분노의 콧김을 뿜어내었다. 하수린과 노미현이 양 옆에서 통나무 같은 그의 팔뚝을 잡고 진정시켰다.
여상구는 콧방귀를 뀌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자제했다.
“하나만 더 물어봅시다. 당신들이 원하는 건 우리 셋뿐이오?”
“그렇다. 사행(邪行)에 동조한 과오가 작지 않으나 다른 아이들에겐 죄를 묻지 않겠다.”
여상구는 마령 문가의 수작이 가소로웠다. 아량이 아니라 차포부터 떼어낸 다음 나머지 기물들을 잡아먹겠다는 심산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정파 연하려면 누구보다 먼저 사파 무림의 우두머리인 남천도군의 손자부터 처단하겠다고 나서야 마땅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무의미함을 알고 있었으나 여상구는 시간을 끌기로 마음먹었다.
“내 의제와 요괴의 경우도 귀측의 주장이 맞는지 따져보아야 할 테지만 나는 심히 억울하구려. 내가 살수를 썼다면 화월도군의 팔 대신 머리를 잘랐을 게 아니오?”
여상구의 문제제기에 대한 답은 청운도군이 아니라 발산도군에게서 나왔다.
“닥쳐라, 이놈. 어디서 흰소리냐? 찬우의 목을 자르지 못한 건 네놈의 무공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네놈이 과거의 은원을 빌미 삼아 공공연하게 살의를 드러냈음을 모르는 줄 아느냐? 어디 나한테도 그 알량한 살기를 뿌려봐라.”청운도군이 몸을 돌려 당장 여상구에게 달려들 것처럼 기세등등한 발산도군을 가로막았다.
“진중해라, 병완. 내가 주재하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발산도군은 청운도군의 만류에도 노기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소, 형. 저놈들이 순순히 혈도를 내주고 포박에 응할 것 같소? 특히 저 흉측한 요괴는 본가로 끌고 갈 것도 없이 이 자리에서 즉참해야겠소. 비키시오. 나는 당장 창이의 원수를 갚아야겠소.”
발산도군은 가린의 패대기 질에 척추가 부서지고 끊어진 파혼도 문수창의 친부였다. 마령 문가의 차기 가주로 유력시되었거니와 조만간 도군에 올라 정맹의 용좌에 들 것이 확실시되던 문수창은 구인결에서 당한 부상으로 모든 야망을 접어야 할 처지로 전락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원래의 무공을 회복할 가능성이 극히 희박했기 때문이었다.
육촌 형인 문병직에 가려 가문의 이인자로만 살아야했던 자신의 좌절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온 정성을 쏟았던 막내아들이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자에게 재기난망의 중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발산도군은 절망과 증오감으로 두 달 가까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복수를 실행하기 전까지는 죽는 날까지 불면증에서 해방되지 못할 터였다.
발산도군의 칼에서 가공스러운 도기가 분출되자 여상구 등이 황급히 기막을 펼쳐 노덕과 노미현 부녀를 보호했다. 초절정의 고수들은 기운만으로도 삼십 보 떨어진 범인을 압살할 수 있었다.
청운도군은 길을 터주는 대신 발산도군을 엄히 꾸짖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병완. 성급한 행동으로 그토록 많은 낭패를 보고 가문에 누를 끼쳤으면서도 아직도 그 버릇을 못 고쳤느냐? 여기까지 와서 네 멋대로 굴 참이면 나는 더 이상 너를 아우로 여기지 않겠다.”
청운도군의 단호함에 발산도군은 이를 갈면서도 투기를 갈무리했다. 그와의 의절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외부인들에게 가문의 갈등을 노출시키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저 요괴는 내 몫이오, 형님.”
발산도군의 목소리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청운도군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를 달랬다.
“물론이다, 병완. 금방 마무리를 지을 테니 조금만 더 참아라.”
여상구에게로 돌아선 청운도군이 핵심사항을 꺼내들었다.
“하남신룡이라는 아이는 언제쯤 돌아오느냐?”
“나도 잘 모르오.”
“잠시 외출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디로 간 게냐?”
“봉천에 갔소. 아, 기루에 간 건 아니니 오해는 마시구려. 내 개인 장원을 쓰고 싶다기에 그러라고 했소. 오늘 중으로는 돌아올 거요.”
“정말이냐?”
“그렇소.”
청운도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중인은 그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진천이 오기 전에 여상구 등을 제압할지 아니면 좀 더 인내심을 발휘할 것인지를 두고 저울질 하고 있음에 분명했다.
장내에 기묘한 정적이 깔렸다. 이윽고 결론을 내린 청운도군이 입을 열었다.
“일단 너와 요괴를 먼저 잡아두어야겠다. 경고하건대 저항하려 들지 마라. 다른 아이들이 다치는 걸 원치 않는다면 순순히…….”
청운도군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여상구가 비장의 패를 내밀었다.
“그건 곤란하오. 아, 잠깐!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더 들어보시오. 내 의제는 권왕 어르신과 함께 돌아올 거요. 두 사람은 보통 인연이…….”
발산도군의 격앙된 고함이 여상구의 뒷말을 뭉갰다.
“터진 주둥이라고 감히 권왕을 팔다니. 네놈이 정녕 염왕을 알현하고 싶은 게로구나.”
여상구가 맞받아쳤다.
“팔긴 뭘 팔아. 그리고 자꾸 놈, 놈 하지 마시오, 발산도군. 이리 젊어 뵈도 나도 환갑이 넘었소.”
청운도군의 눈짓에 따라 발산도군 좌우의 도객들이 분기탱천한 그의 양팔을 잡고 여상구에게 돌진하려는 그를 저지했다.
청운도군이 여상구를 쏘아보았다. 정신이 불안정한 자라는 보고를 받았지만 광인이라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의기양양한 꼴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허장성세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헛소리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또 있었다. 전날 만수보의 구인결에서 난데없이 남천도왕이 등장하리라고 누가 예상을 했겠는가. 권왕이 오늘 삼보장에 나타난다고 해도 아주 놀랄 일은 아니었다.
판단을 내리지 못해 당혹스런 가운데 청운도군이 고개를 돌렸다. 차례로 모든 이들의 눈이 정문 쪽을 향했다.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을 본 삼보장 인사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한 사람은 진천이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권왕이 아니었다.
“어째서……?”
소중걸을 본 적이 없었기에 여상구는 ‘권왕이 아니라 장마와 함께 오는가.’라는 뒷말을 붙이지 못했다. 하지만 사각 턱에 고리 눈을 한 사내가 소중걸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여상구는 입이 바싹 말랐다. 권왕이 실제로 현신하는 것과 말로 그와의 친분을 주장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더욱이 진천은 전날 강가에서 돌아왔을 때처럼 다리를 절고 있었다. 일진이 사나울 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여상구의 이마주름이 선명하게 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