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03
제102화
청운도군의 과거사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진천이 입을 뗐다.
“설명을 드리기 전에 먼저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말해 보거라.”
“구인결이 벌어진 전후사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신지요?”
“알 만큼은 안다.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게냐?”
“방금 아랫사람들이 입을 피해를 꺼려 귀측에서 구인결의 형식을 빌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그 점을 아시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본가가 아니라 백도방이 구인결을 제안했다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
진천은 청운도군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표정만으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허 노야에 따르면 청운도군은 고강한 무공만큼이나 심계가 깊은 인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청운도군도 필생의 경쟁자로 여겼던 북천도왕에 대한 호승심을 이기지 못해 그 자신과 가문을 위기로 내몰았다. 그 과정에서 새우등이 터진 민초들이 부지기수였다. 진천은 그들 중에 허 노야의 가족이나 친인들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짐작했다.
잠시 침묵하던 청운도군이 대화를 재개했다.
“네 주장을 더 들어보자.”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였고 흔들림 없는 눈빛이었지만 진천은 그렇기에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청운도군은 진실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기실 현재 마령 문가를 이끄는 자들이 전대의 원로들에게 구인결의 내막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발산도군이라면 모를까 청운도군에게 어설픈 조작은 통하지 않을 터였다.
청운도군은 구인결이 어떻게 성사되었는지 뿐만이 아니라 삼보장 인사들이 참여한 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한 보고를 받았을 것이었다. 백도방주 유재현이 마령 문가에 실토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전모를 아는 이를 상대로 떠드는 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지만 진천은 유치한 놀이에 응하기로 했다.
“두 달여 전 백도방주가 저를 찾아와서는 귀측과 문제가 생겨 곤경에 처했다며 도움을 요청하더군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귀측이 요구하는 황금 일만 관의 배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귀측을 상대로 결사항전을 할 작정이니 같이 싸워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각오가 진짜였기에 저는 고심했습니다. 저와 제 친인들이 힘을 보탠들 귀측을 당해낼 리 만무하거니와 애꿎은 이들이 희생될 공산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희들만이 아니라 수백, 수천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을 쥐어짠 것입니다.”
청운도군의 누리끼리한 동공에 청광이 서렸다.
“구인결을 떠올린 게 너라는 말이더냐?”
진천은 헷갈렸다.
천연덕스러운 질문이 아니었다. 청운도군은 정말로 몰라서 물어보는 듯했다.
‘정말로’ 그렇다면 두 가지 이유가 있을 터였다. 유재현이 마령 문가에 구인결을 제안할 때 자신의 발상인 것처럼 떠들었거나 아니면 마령 문가의 현 수뇌부가 그 부분에 대한 보고를 누락했거나. 진천은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렇습니다. 당시 백도방주는 악에 받친 상태였습니다. 그가 백도방도 전체를 전화(戰禍)의 불구덩이로 내몰 거라는 데엔 의문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귀측에서 대항하는 무사들을 봐 줄 리가 없기에 저로서는 파국을 막을 방도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마침 그 얼마 전 백도방과 저희 간의 오인결이 있었기에 저는 그때의 해법을 당면한 난제에 적용시키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백도방주를 설득할 수 있었고 귀측도 받아들였기에 구인결이 성사된 것입니다.”
“혹시 삼보장과 백도방 간에 있었다던 오인결도 네 작품이더냐?”
“금강권과 제가 의논하여 구상한 일입니다.”
듣고 있던 고량은 전적으로 진천의 묘책이었음을 밝히고 싶었으나 끼어들지 못했다.
간단한 질문 하나만 던지고는 청운도군이 입을 다물자 진천이 말을 이었다.
“저희가 백도방에 협조한 이유는 그 전의 오인결에서 백도방주와 한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오인결을 취소하고 인질로 잡았던 저희 친인을 풀어주는 대가로 저는 앞으로 백도방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를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당시 이미 귀측의 압박을 받고 있던 백도방주는 차후에 벌어질 사태를 염두에 두고 저희를 이용하고자 했던 듯싶습니다. 물론 저와 제 친인들은 그러한 사정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백도방주가 찾아와 원조를 종용했을 때 그 언약에 발목을 잡힌 저희는 그들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허면 앞으로도 백도방의 원군이 될 참이냐?”
청운도군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지만 진천은 결정적 대목임을 알았다.
“백도방주와의 신의는 이미 깨졌습니다. 저희는 이제 백도방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점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진천의 단언에 석상처럼 표정에 변동이 없는 청운도군을 제외한 도호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진천은 청운도군 또한 내심으로는 안도했으리라고 확신했다.
아마도 지금 배수의 백도방은 마령 문가가 보낸 도객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마령 문가는 이미 백도방을 장악했을지도 몰랐다. 그런 그들로서는 배수와 지척인 주안에 터를 잡은 삼보장의 무리가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느껴질 터였다. 후환을 확실히 없애기 위해 마령 문가가 최강의 전력을 보낸 것도 당연지사였다.
권왕 때문에 삼보장의 핵심들을 제거한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긴 어려웠으나 뜻밖의 성과를 거둔 청운도군은 퇴각을 결정했다.
“내가 들었던 것과는 약간 다르지만 네 주장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음을 인정하겠다. 어느 쪽이 제안을 했건 본가가 구인결을 치르기로 한 건 백도방의 죄를 묻는 과정에서 발생할 살육을 피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너희가 무도한 자들을 거들어 본가에 끼친 피해는 심히 유감이나 저간의 사정을 참작해 불문에 붙이겠다. 본가의 아이들에게도 타이를 터이니 향후로는 서로 간에 적대하지 말고 잘 지내기를 바란다.”
진천이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접었다.
“하해와 같은 관용에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무림말학 진천,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진천의 예의에 훈훈해진 분위기가 못마땅한지 권왕이 초를 쳤다.
“이렇게 시시하게 끝나면 안 되지. 아까 자네들이 여기에 온 까닭이 세 가지라 하지 않았나? 내 아우 말고 둘을 더 잡아간다고 했던 것 같던데. 누구, 누구였지?”
청운도군이 당혹감을 드러내자 진천의 저자세에 불만이었던 여상구가 냉큼 일러바쳤다.
“저하고 가린입니다, 어르신.”
권왕이 여상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잡아간다고 했지?”
“저는 비무에서 살수를 쓴 죄 때문이고 가린은 그냥 요괴니까 죽여야 한다더군요.”
까끌까끌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권왕이 다시 청운도군에게 시선을 맞췄다.
“늙으니 기억력이 예전만 못한 모양이군, 청운. 하루도 아니고 일다경 전에 한 말을 까먹다니. 잊은 걸 알려줬다고 내게 고마워하지는 말게. 어디 우리가 남인가? 이 정도야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지. 여하간 볼 일은 마치고 가야지? 저 두 아이를 잡아가려는 이유를 알았으니 이제 내 아우의 해명을 들을 차례인가? 어서 해 보거라, 아우야.”
마령 문가 도호들을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권왕의 심술에 진천은 절로 쓴웃음이 났다.
양 진영에서 이십여 쌍의 눈이 진천의 입에 집중되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노릇을 하고 있던 소중걸도 흥미가 인 듯 귀를 기울이는 기색이었다. 진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화각주는 살수를 쓰지 않았습니다.”
마령 문가 도호들 일부가 분기를 분출했다. 그들 중 왼 뺨에 길고 깊은 칼자국을 새긴 노인이 침묵하는 청운도군을 대신해 반박했다.
“화월과 싸울 당시 저 아이는 시종여일 명명백백한 살기를 뿜어냈다고 들었다. 이를 부인할 셈이더냐?”
진천은 그의 몸에 꽂히는 몇 줄기 암기(暗氣)에 대응하지 않고 침착하게 풀어나갔다.
“그날의 결과는 양패구상이었습니다. 제 의형인 도화각주는 중한 내상을 입었고 화월도군께서는 팔이 잘렸습니다. 안타까운 일이나 한편으로는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동귀어진으로 끝났을 참사가 그 정도로 그쳤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날 도화각주는 뚜렷한 살기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살의를 거두고 목 대신 팔을 베었습니다. 살인을 삼가달라는 저의 당부를 상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궤변이로다. 저자가 화월의 목을 치지 못한 것은 배려의 발로가 아니라 능력 부족 탓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화월도군 어르신의 태도가 그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더냐?”
“최후의 공방이 끝난 후 화월도군 어르신은 패배를 자인했습니다. 우수를 잃었으나 좌수가 온전하기에 운신불능에 처한 도화각주를 해할 수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왜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분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 의형이 마지막 순간 목 대신 팔을 쳤다는 것을. 자신은 심장을 겨냥해 탄강을 쏘았는데 도화각주는 방향을 틀었음을 인지한 월화도군 어르신은 부끄러움을 느꼈을 듯싶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패배를 선언한 것입니다. 이번 출정 전에 화월도군께 듣지 않으셨는지요? 만약 그랬다면 그분은 필히 도화각주에 대한 처분을 두고 화를 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런 이유로는 제 의형에게 죄를 묻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했을 터이고요.”
진천과 언쟁을 벌이던 칼자국 노인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권왕이 벌건 잇몸을 드러내 히죽거리며 마령 문가 도호들의 염장을 질렀다.
“이에 관해 더 따질 사람 있나?”
모두들 묵묵부답이었다. 권왕이 일자 눈을 찡그렸다.
“내 말을 무시하는 건가?”
청운도군이 마지못해 응답했다.
“본가로 돌아간 후 화월에게 확인해 보겠소, 권왕.”
“확인은 무슨. 딱 봐도 처음부터 억지였구먼. 막말로 피 터지게 싸우다 보면 누구나 살기를 표출하는 법 아닌가? 그걸 빌미로 저 아이를 치죄하려 들다니 궁색하기 이를 데 없군. 천하의 문가가 어쩌다가 밴댕이 소갈딱지들의 소굴이 되었나, 그래.”
모욕감에 마령 문가 도호들의 안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아무도 권왕을 상대로 칼을 뽑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권왕이 일방적으로 여상구와 관련된 사안을 종결지었다.
“이건 해명이 됐고 다음 건 뭐였지?”
여상구가 알려주었다.
“가린입니다, 어르신.”
“아하, 그렇지.”
권왕이 손을 올려 진천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저 요괴 문제는 어떻게 다룰 참이냐, 아우야?”
진천은 청운도군 뒤편의 발산도군을 흘긋 쳐다보았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이를 악물고 있는 양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권왕의 등장 이후 죽은 쥐처럼 얌전해진 발산도군이 폭발 일보직전의 모습을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진천의 뇌리 속에 서너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재빨리 그것들을 검토한 진천은 그 중 하나를 골랐다. 발산도군은 가린에게 패대기쳐지는 바람에 회복난망의 중상을 당한 파혼도 문수창과 근친일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둘은 부자지간일 지도 몰랐다.
자신의 대비가 얼마나 안이했었는지 깨달은 진천은 뒤늦게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