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04
제103화
진천은 권왕이 나타나기 직전 발산도군이 발산하던 흉포한 기세가 단순한 위협용이 아니었음을 알아차렸다. 권왕을 자극하는 언사를 뱉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죽림에 은신하고 있던 권왕이 암기를 쏘아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는 불문곡직 칼을 휘둘렀을 것이었다.
진천은 발산도군과 같은 변수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음을 반성했다. 마령 문가의 원로들이 청운도군처럼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예측 가능한 행동을 할 것이란 전제 자체가 허술한 토대였다. 가령 외가와의 일이 잘 풀려 외조부의 위세를 등에 업었을지라도 발산도군의 발호(發號)를 억제할 수 있었을는지 의문이었다. 권왕의 경우도 현신했기에 망정이지 그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만으로는 발산도군이 터뜨릴 노화를 완벽하게 진화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진천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친인들이 그의 엉성한 대책의 희생양이 되었을 터였다. 권왕이 지닌 무게감이 마령 문가에 통하리라는 판단은 착오가 아니었으나 발산도군 같은 이들이 일으킬 돌발 사태에 대한 방책이 부족했다. 그가 삼보장에 귀환하기 전에 불상사가 벌어졌을 공산이 컸다는 뜻이었다.
“가린은, 요괴가 아니다. 가린은, ‘사우 오란’이다.”
후방에서 날아온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외침이 진천의 상념을 깨뜨렸다.
진천이 나서기도 전에 발산도군이 가린을 향해 맞고함을 질렀다.
“닥쳐라, 요괴. 대가리를 부숴버릴 테다.”
양 진영에서 가린과 발산도군을 말리느라 난리가 났다.
여상구와 하수린이 팔다리에 매달렸음에도 그들을 달고 달려오던 가린은 진천에게 가로막히고서야 발을 멈췄다. 마령 문가에서도 세 명의 도호들이 달라붙어 분기탱천한 발산도군을 붙드느라 안간힘을 썼다. 발산도군이 발광하는 바람에 청운도군까지 거들어야 했다.
진천은 으르렁거리는 가린을 달랬다.
“내게 맡겨라, 가린.”
“가린은, 싸운다.”
“지금은 아니다, 가린. 조금만 참아다오.”
진천에 대한 신뢰 때문인지 가린이 다소 누그러졌다.
발산도군을 진정시킨 이는 권왕이었다.
“싸움 구경도 나쁠 것 같진 않지만 내 아우의 해명을 듣는 게 순서 같군. 내 의견에 이견이 있는 자는 나와라. 나하고 둘이 무림의 방식대로 합의를 보자.”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힘으로 누르겠다는 엄포였다. 물불 가리지 않기로 유명한 발산도군이었지만 권왕이 허풍을 떠는 작자가 아님을 헤아릴 정도의 이지는 있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힘을 빼자 청운도군 등도 한숨을 쉬며 그를 놓아주었다.
“그런데 아우야, ‘사우 오란’이라는 게 뭐냐?”
권왕의 질문에 진천은 난감해졌다. ‘천신(天神)’이라는 광오한 의미를 그대로 전한다면 권왕이 폭소를 터뜨릴지도 몰랐다. 그 웃음은 가린으로 하여금 권왕에게 이빨을 드러내도록 만들 게 뻔했다.
“수호자라는 뜻입니다, 큰 형님. 그는 ‘아타’라는 부족을 지키는 용사이자 그들의 우상입니다.”
“흠, 그렇구나. 역시 우리 똑똑한 아우는 모르는 게 없다니까. 자, 그럼 저 덩치를 요괴라 부르며 그래서 죽여야 한다는 문가의 주장에 대한 항변을 해보려무나.”
진천은 발산도군에게로 눈을 돌렸다.
“가린의 말처럼 그는 요괴가 아닙니다. 체구가 드물게 크고 생김새가 보통 사람들과 조금 다르다고 해서 요괴라 부른다면…….”
웬일인지 권왕이 흥분하며 진천의 말을 잘랐다.
“당연하지. 남다른 외형을 두고 난쟁이니 요괴니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대는 종자들은 모조리 주둥이를 뭉개줘야 하느니라. 이 의견에 이견이 있는 놈은 내 주먹맛을 보여주지.”
마령 문가 도호들은 찍소리도 못했다.
자기가 방해해 놓고 권왕이 진천을 쪼았다.
“어째서 뜸을 들이느냐? 어서 계속해라.”
고소를 지은 진천이 말을 이었다.
“겉모습으로 요괴라 단정할 수 없다면 행위로써 규정해야 할 터인데 이점에서도 가린은 그 혐의와는 무관합니다. 그는 백일 전쯤 밀림의 본거지를 떠나 저를 찾아 중원으로 왔습니다. 주안에 이르기까지 사십 일 동안 그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요괴에게 피해를 입은 이들에 대한 소문이 있었던가요? 있다면 명백한 조작이라 확언할 수 있습니다. 가린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사내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누구에게라도 손을 댔다면 반드시 제게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권왕이 다시 진천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듣자하니 꽤나 괜찮은 녀석이로구나. 이름이 가린이라고? 마음에 든다.”
권왕의 감상에 발산도군의 안색이 썩은 대춧빛이 되었다.
진천은 마무리를 지었다.
“여기에 온 이후 두 달 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사해보면 아실 테지만 가린에게 해를 당했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가린의 행적으로 볼 때 그를 요괴라 칭하고 그걸 빌미로 처단하려 드는 것은 부당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권왕이 판정을 내렸다.
“나는 내 아우의 의견에 동의하네만 자네들은 어떤가?”
청운도군을 비롯한 마령 문가의 도호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발산도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자는 친선비무에서 내 막내아들을 죽이려고 했소. 무지막지한 살수를 썼단 말이오. 그 아이는 그자의 무도한 짓거리에 불구가 될 처지에 놓였소. 당신 같으면 참겠소, 권왕?”
권왕이 진천에게로 답변을 떠넘겼다.
“네가 말해주려무나, 아우야.”
진천은 발산도군을 주시했다.
“그 일은 저희로서도 안타깝기 그지없는…….”
진천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발산도군이 호통 쳤다.
“같잖은 소릴랑 집어치워라. 패악을 저질러 치명적인 피해를 준 후 유감이라고 떠들면 감읍이라도 할 줄 아느냐? 사람을 죽인 후에…….”
진천도 발산도군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가린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기실 그날 살의를 실행에 옮긴 쪽은 가린이 아니라 파혼도였습니다. 가린은 정수리를 쪼개오는 칼을 어깨로 받아 가까스로 일도양단의 참사를 모면했습니다. 파혼도를 낚아챘을 때 가린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그에게 같은 방식으로 되갚아줄 수도 있었지만 살인을 하지 않겠다는 저와의 약속 때문에 자중했습니다. 따라서 가린을 비난할 어떠한 근거도 없습니다.”
언변으로는 진천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자각한 발산도군은 뱃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분노로 인해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네가 뭐라고 지껄이건 나는 기필코 내 아들의 원한을 갚아야겠다.”
진천이 냉정하게 대꾸했다.
“그건 어르신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파혼도의 일로 가린에게 보복하시겠다면 나중에 따로 오십시오. 혼자서 말입니다. 그러면 저희도 어르신의 행사를 방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천의 언사에 깃든 경멸감에 발산도군의 낯빛이 불그죽죽해졌다. 상황을 관망하던 청운도군이 수습에 나섰다.
“발산과 그자의 대결은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최소한의 참관인을 둔 가운데 진행하자꾸나. 시간은 추후 우리가 통보할 터이니 장소는 너희가 정하도록 해라.”
진천은 청운도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그 일전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저희와 귀측이 묵은 앙금을 털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를 바랍니다.”
여간해선 심경을 노출하지 않는 청운도군이 대놓고 반색했다.
“물론이다. 구인결로 인해 감정이 상했지만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아야 할 터. 발산과 그자의 사적인 대결과 무관하게 앞으로 본가는 삼보장과 친선을 다질 것이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권왕이 별안간 손뼉을 쳤다.
“오랜만에 보는 흐뭇한 광경이도다. 뭐, 팔 할은 멋진 중재에 나선 내 공이지만. 아무튼 수고했다, 아우야. 자네도 수고했네, 청운.”
연배가 위인 자신에게 수고 운운하는 권왕의 언사에 청운도군의 심사가 비틀렸다.
“다 권왕 덕분이오.”
청운도군의 반어법에 권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가 인정해주니 기쁘긴 한데 뭔가 꺼림칙하구먼.”
권왕이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청운도군이 화제를 돌렸다.
“권왕의 ‘수고’ 덕분에 우리 일은 바람직하게 정리된듯하니 이제 강호의 신성들이 용무를 보도록 하는 게 어떻겠소?”
청운도군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광장 한 구석에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소중걸에게로 향했다.
진천은 소중걸에게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그와의 거리가 십이삼 보로 줄어들자 발을 멈추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진천의 사과를 무시하고 소중걸이 물었다.
“다리는 왜 그런가?”
“좀 다쳤소.”
소중걸의 고리눈이 사나운 빛을 쏘아냈다.
“나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건가?”
“그럴 리가 있소. 오히려 당신과의 비무에 대비해 열심히 수련하다가 무리를 했던 거요.”
진천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소중걸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전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면 비무를 미루자.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가?”
진천이 처진 눈을 치떴다가 내렸다.
“그럴 것까진 없소. 약간 불편한 정도일 뿐 당신과 겨루는 데는 지장이 없을 거요. 먼 길을 왔을 텐데 그냥 오늘 합시다.”
“…….”
“나중에 핑계로 삼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그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좋소.”
“좋다. 시작하자.”
“여기서 말이오? 원한다면 우리끼리만 비무를 해도 좋소. 후원에 적당한 연무장이 있으니 그리로…….”
진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권왕이 끼어들었다.
“무슨 소리냐, 아우야. 그걸 보려고 예까지 달려왔는데 비무를 비밀리에 치르겠다고?”
진천이 권왕을 설득했다.
“그에겐 이곳이 적진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켜보는 눈들이 부담이 될 수 있으니…….”
소중걸도 진천의 말을 끊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권왕이 감탄했다.
“허, 그놈 기백 보소. 막가 같은 겁쟁이가 웬일로 간담이 튼튼한 후인을 키웠을까.”
소중걸의 턱에 세 가닥 가로주름이 잡혔다.
“막가가 장왕을 이르는 것이라면 잘못 짚었소. 나는 그의 후인이 아니오.”
권왕의 일자 눈이 동그래지며 안구가 튀어나올 듯했다.
“뭣이라? 내가 허리가 꼬부라진 늙은이의 지팡이더냐? 잘못 짚긴 뭘 잘못 짚어. 막가의 후인이 아니면 그렇다고 고하면 될 일이지 어린놈의 말본새가 어찌 그 따위냐? 아무리 막돼먹은 마졸이라지만 강호의 존장을 대하는 법도 모르느냐?”
“…….”
“그래도 저놈이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네. 에이, 내 이놈을 확!”
소중걸이 일순 신형을 크게 휘청거렸다. 경신을 발해 칠팔 장의 거리를 단숨에 지운 권왕이 그의 면전에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일만 근의 압기가 그를 짓눌렀지만 소중걸은 무릎을 꿇지 않고 버텼다. 진천이 황급히 달려가 권왕을 말렸다.
“진정하십시오, 큰 형님.”
“내가 왜?”
진천은 권왕을 제지하기 위해 내키지 않는 말을 해야 했다.
“큰 형님께서 그를 핍박하면 뒷말이 많을 것입니다. 제가 설혹 비무에서 이기더라도 사람들은…….”
권왕은 말귀를 알아들었다.
“알았다. 어린놈의 행태가 방자하기 이를 데 없지만 너를 위해 잠시 눈감아 주마. 후딱 해치우거라.”
소중걸을 쏘아본 권왕이 물러났다.
본의 아니게 소중걸과 손을 내밀면 닿을 거리에 서게 된 진천의 면상에 권왕으로 인해 가빠진 그의 숨결이 와 닿았다.
“정말 여기서 해도 괜찮소?”
진천의 물음에 소중걸이 즉답했다.
“그렇다.”
진천은 소중걸에게서 떨어져 광장의 중앙으로 갔다. 삼보장 인사들에게 합류했던 권왕이 마령 문가 진영을 향해 윽박질렀다.
“뭐해들? 비켜서지 않고. 옛정을 생각해 공짜 구경을 시켜줄 참이었는데 안 되겠군.”
행여나 권왕이 비무 관전을 허락하지 않고 쫓아낼세라 마령 문가의 도호들이 부랴부랴 진천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당금 무림 최강의 후기지수를 결정할뿐더러 장차 무림사에 손꼽힐 절대무존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초신성들의 역사적인 일전을 놓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죽립을 바닥에 내려놓은 소중걸이 고된 밭갈이를 마치고 우리로 돌아가는 일소처럼 느릿느릿 원형의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진천과 삼사 장 떨어진 곳에 멈춰선 그가 양손을 치켜들자 팽팽한 긴장감이 장내의 공기를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