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05
제104화
진천은 인사의 형식도 생략하고 장공을 날릴 기세인 소중걸의 김을 뺐다.
“잠깐.”
치켜든 팔을 그대로 둔 채 소중걸이 물었다.
“뭔가?”
“비무에 앞서 얘기해두어야 할 게 있소.”
“…….”
“이 대결은 그녀와 무관하게 당신과 나의 무력을 견주는 친선비무가 될 것이오.”
“약속을 지키지 않겠단 말인가?”
“나도 그녀도 약속을 한 적이 없소. 당신의 일방적인 선언이었을 뿐.”
“너의 동의 따윈 필요 없다.”
“설령 당신이 나를 이긴다 해도 그녀를 취하는 건 불가하오. 그녀가 누구를 선택할지는 전적으로 그녀의 의사에 달려 있소.”
소중걸이 고리눈을 사납게 치떴다.
“너도 태양신맥인가?”
마령 문가 도호들이 술렁거렸다. 소중걸의 말은 그가 태양신맥이라는 뜻이었다. 천만인에 하나 꼴로 난다는 태양신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재를 특징으로 했다. 역대 천하제일인들 중 상당수가 태양신맥의 소유자였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였다.
한편 청운도군 등은 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웠던 대화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남편봉이 구음절맥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구음절맥과 태양신맥은 서로 간에 최상의 짝이었다. 태양신맥의 사내만이 구음절맥의 음기를 감당할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보아하니 장마는 하남편봉을 제 여인을 삼을 요량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하남신룡과 연분을 맺은 모양이었다. 장마는 마인의 방식으로 그녀를 하남신룡으로부터 빼앗을 작심인 것이었다.
마령 문가 도호들의 시선이 진천에게 집중되었다. 설마 그도 태양신맥이란 말인가.
진천이 소중걸과 중인의 의문에 답했다.”나는 평범한 사람이오. 기맥 같은 건 없소.”
소중걸의 고리눈이 일그러졌다.
“그런데도 그녀를 탐내는가?”
진천이 실소했다.
“탐내지 않소.”
“그런데 어째서 끼어드는가?”
“당신이 그녀를 원하는 건 당신의 자유요. 하지만 당신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어디까지나 그녀의 권리요. 그녀가 당신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고 강제하려 든다면 용납할 수 없소. 그래서 나선 거요.”
소중걸의 동공에 청광이 번득였다.
“잡소리를 듣느라 시간만 버렸군. 강자에의 복종은 철혈의 율법이다. 나는 오늘 너를 누르고 그녀를 데려가겠다.”
분기를 억누르고 있던 하수린이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누구 맘대로. 죽으면 죽었지 너를 따라가지 않을 테다.”
하수린 못지않게 인내심을 발휘하던 권왕이 비무개시를 종용했다.
“말로 안 되면 주먹으로 해결하는 게 무인의 방식이 아니더냐. 자, 담소는 그쯤 나누고 이제 그만 싸우거라.”
권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진천에게 쇄도하며 소중걸이 장공을 발출했다. 두 줄기 시뻘건 회오리바람이 진천을 덮치며 비무가 시작되었다.
젊은 용들의 쟁투를 지켜보는 청운도군 문병직의 노안에 그늘이 내렸다.
저것이 어찌 약관 전후의 청년들의 무위란 말인가. 강기를 머금은 장공이라니. 비영문의 문주라도 흉내 내기 어려울 신법이라니.
청운도군은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장마의 장심에서 숨 돌릴 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장공은 전성기 때의 그라고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파괴력을 현시했다. 적중을 허용하면 호신강기가 박살나는 수준을 넘어 진체마저 으깨질 게 뻔했다.
장마가 장차 팔대무왕을 능가하는 절대무존이 되리라는 강호의 평가는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절망감을 안겼던 북천도왕조차도 스무 살 언저리에는 초절정의 경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남신룡은 장마와는 또 다른 충격을 안겼다.
그는 정면충돌을 삼가고 현묘하면서도 기괴한 신법을 과시하며 장마의 파상공세를 회피하고 있었다. 마치 폭우를 빗겨내는 바람 같았다. 일견 장마의 공격에 맞불을 놓지 못하고 도망만 다니는 형국으로 보였으나 청운도군은 하남신룡이 불리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방어일변도인 그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청운도군은 조카인 찬경의 보고가 부실했음을 깨달았다. 하남신룡과의 일전을 복기하며 찬경은 남천도왕을 의식해 십 할의 전력을 쏟아내지 않았음을 실토했다. 뒷말을 달지는 않았으나 만약 그랬다면 하남신룡을 어렵지 않게 제압했을 거라는 심중을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내고서. 다른 이들처럼 청운도군도 그의 판단을 믿었다. 하지만 하남신룡의 신법을 직접 보고 있노라니 그 믿음이 여지없이 흔들렸다. 최선을 다했어도 찬경이 저 유령을 잡을 수 있었을까.
청운도군은 허탈했다. 가문의 곤경을 해소하는데 일조한다는 명분으로 오랜만에 반월도를 등에 매고 나설 때 가슴에 움텄던 설렘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제는 모든 미련을 버리고 정말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이빨이 무뎌진 늙은 호랑이들이 설치기엔 당금 무림은 너무나 험난한 땅이 되어버렸다.
청운도군은 문득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넋이 나간 듯 관전에 몰입한 종손자의 얼굴이 보였다. 욕심을 내려놓았으나 그의 전철을 밟게 될 후손의 앞길을 생각하니 청운도군은 막막하고 먹먹했다.
마령 문가의 미래 풍뢰도 문상현은 암울했다.
삼보장에 온 이후 줄곧 훔쳐보고 있던 주안일화와 영원히 멀어진 것 같은 심정이었다. 저런 괴물들을 곁에 두거나 목도한 그녀가 그를 거들떠 볼 리 만무했다.
사월 초 구인결을 위해 찾았던 만수보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문상현은 심장이 터질 듯했다. 그녀의 미모는 인세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홀렸음을 감추기 위해 문상현은 안간힘을 써야 했다.
기실 주안일화에 관해서는 수 년 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성주 성가의 한심한 쭉정이들이 만나기만 하면 절색의 미소녀에 대해 떠들어댔기 때문이었다. 문상현은 나중에 시간이 나면 주안에 가서 미색만으로 노미현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알린 삼보장의 여식을 보러 갈 참이었다. 하지만 급할 것도 없었고 딱히 마음이 동하지도 않았기에 차일피일 미루던 중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도화각주의 애첩이 되었다는 풍문과 그녀의 부모에 얽힌 추문을 접하고는 관심을 접었다.
최근 그녀가 도화각주와 연인관계가 아니라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여전히 관심 밖이었다. 그러다 만수보에서 그녀의 실물을 대하고는 단박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지난 한 달 이십 일 내내 문상현의 뇌리엔 그녀의 아리따운 자태가 본체에서 떨어지지 않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렸다.
몇 달 전이었다면 그녀와 이루어지는데 어떤 장애도 없었을 터였다. 정맹에 다섯 명밖에 없는 이십대 용호인 그를 한낱 상가의 여인이 거부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문상현은 그의 부인이 되기 위해 명문 무가의 미녀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을 당연시했다. 자신을 장차 천하제일인의 권좌를 놓고 정사마의 초신성들과 다투게 될 거물이라 자부하기 때문이었다. 기실 근거 없는 자만은 아니었다.
문상현은 정파의 후기지수들 중 단연 선두주자였다.
동갑내기인 원주 강가의 강정이 그를 필생의 경쟁자로 여기고 있음을 알지만 문상현은 그를 한 수 아래로 여겼다. 용봉대전의 우승과 용호단 입단 모두 그가 일 년 빨랐고 그 격차는 여전히 유효했다.
사파나 마도, 혹은 월교가 그에게 필적하는 신예들을 키우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있더라도 극소수일 터였다. 문상현은 팔대무왕이라는 초인들이 모두 이승을 등지고 없을 사십 년 후쯤 삼패의 후계자들과 더불어 천하제일인의 명예를 두고 겨루게 되리라 확신했다.
하남편봉이라는 돌출변수가 약간 신경이 쓰였지만 그녀가 자신의 상수일 지도 모른다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서는 콧방귀를 꼈다. 뿌리가 얕아 편공(鞭功) 같은 잡술만 발달된 변방 무림 출신의 여자가 명문의 후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었다. 그녀에게 패퇴했다는 흑창 동이승은 한 물 간 노장에 불과했다.
자부심과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문상현은 만수보에서 자신이 우물 안에서 큰소리치는 개구리였음을 깨달았다.
가문의 최강자인 부가주와 자웅을 겨룬 하남신룡까지 갈 것도 없었다. 애써 깎아내렸던 하남편봉이 그로서는 십 초도 버티기 어려운 백부에게 승리를 거두자 문상현은 망연자실했다. 그녀의 상대로 나섰더라면 필히 망신을 당했을 터였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곁에 있으면 숨소리마저 조심해야 하는 성질 사나운 칠촌조부가 자신보다 어린 해골 청년에게 묵사발이 되는 장면을 목격한 문상현은 숨이 멎을 뻔했다. 무명소졸인 줄 알았던 철곤귀가 남천도왕의 손자라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사실 그들 이전에 금강권의 진실한 무위를 확인했을 때부터 문상현은 혼란과 자괴감에 빠진 상태였다. 성주 성가의 또래들로부터 용호단에 들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는 권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비웃었던가. 하지만 삼숙(三叔)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금강권의 무력은 결코 그의 아래가 아니었다. 문상현은 자기라면 금강권의 주먹을 막아낼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이 없었다.
만수보에서 사랑과 좌절감을 동시에 품고 마령으로 귀환한 문상현은 삼보장 침공의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안내역을 자처한 것은 막강한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은 자신의 존재감을 주안일화에게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하남신룡과 장마의 비무를 지켜보고 있자니 비참할 따름이었다. 주안일화는 두 괴물에 비하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그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터였다.
진천은 소중걸의 호흡이 흐트러졌음을 감지했다.
두 번의 응수타진으로 그것이 유인책이 아님을 확인한 진천은 미리 염두에 두었던 구상대로 전진을 시작했다. 회피일변도였던 진천이 반격을 시도하며 근접전을 시도함에 따라 국면이 요동쳤다.
이를 악 다문 소중걸의 쌍장에서 가공스러운 장공이 폭죽처럼 터져 나와 어둠을 붉게 물들였다. 진천은 소중걸이 하나라도 걸리기를 바라며 마지막 힘을 쏟아내고 있음을 직감했다. 진천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만약 한 달 전이었다면 실제로 소중걸에게 이르기 전에 장공의 폭풍에 휘말렸을 공산이 컸다. 만근거석을 가루로 만들고도 남을 장공에 스치기라도 하면 호신강기를 두를 수 없는 진천으로서는 부상이 필연지사였다.
진천은 팔영보의 진전을 바탕으로 작전을 짠 것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 얻은 망외의 성취와 무관하게 오늘과 같은 전술을 구사할 작정이었다.
강기가 실린 장공을 발할 수 있는 소중걸의 심후한 내력은 양날의 검이었다. 초반에는 압도적인 강기를 뿜어낼 테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어느 시점부터 공력소진으로 인한 급격한 무력감소가 불가피할 터였다.
진천은 팔영보로 소중걸의 공세를 견뎌내며 그의 힘이 떨어지기를 기다릴 심산이었다. 결국 둘의 대결은 소중걸이 지치기 전에 그의 발을 묶을 수 있을지 여부가 관건이었다. 진천은 애당초 승산을 절반으로 보았다. 그러다 엿새 전 의형의 장원의 지하석실에서 팔영보의 상승을 경험한 후 육칠 할로 높여 잡았다.
실제로 소중걸과 붙어보니 진천은 예상이 옳았음을 알았다. 한 달 전에 싸웠다면 결과는 양패구상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어쩌면 둘 중 하나나 둘 다 목숨을 잃는 불상사가 발생했을지도 몰랐다.
소중걸의 무위는 곽건의 아래가 아니었다. 정교함이나 운영의 묘에선 곽건에 미치지 못했지만 순수한 위력의 측면에서는 그를 능가했다. 소중걸은 진천에게 창인 대왕객잔의 장초를 연상시켰다. 두 사람 다 잔재주를 거부하고 직선적인 수법을 선호하기 때문이었다. 상성이 맞는 상대에겐 매우 위협적인 유형이었다.
소중걸에게서 고향의 친인을 떠올린 진천은 문득 그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다소 위험이 따를 터이지만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팔영보를 믿고 심중의 궁금증을 풀기로 한 것이었다.
화연과 비환을 펼쳐 소중걸의 지척에 이른 진천이 그의 일 장 앞에서 공중으로 도약하며 신형을 노출시켰다. 절호의 기회를 잡은 소중걸이 바닥 난 내공을 쥐어짜 혼신의 힘을 다한 일장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