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06
제105화
머리카락 한 올의 차이로 소중걸의 일격을 빗겨낸 진천은 장공의 경기에 휩쓸려 좌측으로 밀렸다.
소중걸이 허공에서 팽이처럼 도는 진천에게 후속타를 가했다. 진천은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빗겨냈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소중걸은 집요하게 진천을 쫓았다. 진천은 팔영보를 이용해 거리를 벌리는 대신 다시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진천의 좌수에서 섬광이 번득였다. 소중걸은 진천이 쏘아낸 두 개의 절멸비를 절묘한 동작으로 피해냈다. 그러나 허연 비수들을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사이로 흘려내려다 균형을 잃고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말았다.
진천은 때를 놓치지 않고 소중걸의 턱을 무릎으로 강타했다.
“억!”
고통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슬격(膝擊)에 강타당한 소중걸이 아니라 공격을 성공시킨 진천의 입에서.
무릎이 깨진 듯한 격통에 놀란 진천은 하마터면 소중걸의 장공에 어깨를 내어줄 뻔했다. 비무 개시 때와 비교하면 위력이 현저히 떨어졌지만 여전히 송아지만한 바위도 박살 낼 일장이었기에 진천은 등골이 오싹했다. 가까스로 소중걸의 장공을 벗어난 진천은 절멸도를 꺼냈다. 그의 왼손 끝에서 돋아난 일 자 길이의 고드름을 본 소중걸이 신음성을 삼켰다.
진천은 무릎의 통증을 무시하고 회선보(回旋步)를 밟으며 소중걸에게 접근했다. 마치 손사래를 치듯 소중걸이 양손을 흔들었다. 그의 장심에서 연이어 장공들이 분사되었지만 진천은 기어이 그에게 붙었다. 소중걸은 물러서지 않고 수공으로 진천과 맞섰다.
절멸도를 그의 팔뚝에 박았다 잽싸게 뺀 진천은 의문을 해소하고는 소름이 돋았다. 소중걸의 뼈는 절멸도로도 단번에 베어지지 않았다. 가히 금강불괴지골(金剛不壞之骨)이었다. 도검불침을 자랑하는 가린의 갑피보다 훨씬 단단할 터였다. 그런 뼈로 이루어진 턱을 쳤으니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은 무릎이 온전할 턱이 없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인이 맨주먹으로 돌덩이를 때린 격이었다.
진천은 쇳덩이 같은 팔을 휘두르는 소중걸에게서 떨어졌다. 소중걸은 그를 붙잡으려 들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진천의 손에 달린 고드름이 흐물흐물 늘어나며 밧줄처럼 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절멸도를 절멸삭으로 바꾼 진천은 거리를 유지한 채 공격을 가했다. 소중걸이 안개처럼 묽어진 장공으로 반격해왔으나 진천의 신형은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진 후였다.
상승의 보법으로 절멸삭을 피해냈지만 소중걸은 진천의 채찍질을 완전히 뿌리치진 못했다. 양쪽 종아리의 근육을 잘린 그가 비틀거리자 진천은 절멸비를 그의 허벅지에 박아 넣음으로써 승부를 매조지었다.
소중걸이 쓰러지는 모습을 본 중인은 참았던 숨을 토해내었다.
절멸삭을 집어넣은 진천은 절뚝거리며 소중걸에게 다가갔다.
그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장공으로 기습을 해온다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할 수도 있었으나 진천은 자신의 판단을 믿어보기로 했다. 소중걸은 대왕객잔의 장초와 싸우는 방식만이 아니라 성정도 흡사한 자였다.
장초는 마도에서 파생된 방파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뼛속 깊이 정심을 지닌 사내였다. 장초를 통해 진천은 마인일지라도 개전의 여지가 있음을 배웠다. 물론 창인에 스며든 대부분의 마인은 엄중한 처벌과 영원한 격리 외에는 답이 없는 악당들이었다.
진천은 소중걸이 장초와 비슷한 인물이기를 바랐고 그럴 거라 짐작했다. 한 달 반 전 그가 오양 천지문에서 저지른 살겁을 들었을 때만 해도 전형적인 마인이라 간주했었다. 하지만 전날 삼보장을 찾았을 시 그가 보였다는 행태를 친인들에게 전해 듣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소중걸은 그를 선공한 가린에게 살수를 쓰지도 않았고 하수린을 제압하고도 그냥 놔 주었다. 일반적인 마인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었다.
진천은 방금 전에 끝난 비무에서 소중걸이 마중정(魔中正)의 기질을 가진 사내일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추정을 확인했다. 짐짓 허점을 노출했을 때 소중걸은 그의 머리 대신 하체를 겨냥해 장공을 발했었다. 살해보다는 무력화에 중점을 둔 선택이었다. 찰나지간의 결정이었기에 그의 본성이 가감 없이 드러난 장면이라 보아야 했다. 곽건이었다면 틀림없이 두부를 노렸을 것이었다. 강민이라고 해도 십중팔구 그랬을 터였다.
진천은 싸움이 누군가의 인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 최고의 수단이라던 의형의 주장에 일정 정도 동의했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었지만 많은 경우에 그러했다. 지금도 들어맞는 듯했다. 진천은 소중걸의 진정한 내면을 알 것 같았다.
상체를 일으킨 소중걸이 그의 면전에 이른 진천에게 우수를 뻗었다. 그의 장심에 붉은 기가 감돌았지만 진천은 보법을 발하지 않고 세 걸음을 더 내딛었다. 소중걸의 다리 끝에 발이 닿을락말락한 위치까지 간 진천이 팔을 내밀었다.
진천에게 장공을 발하는 대신 소중걸이 질문을 던졌다.
“뭐 하자는 거냐?”
“내 손을 잡고 일어나라는 거요.”
소중걸이 진천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진천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진천의 처진 눈을 응시하는 소중걸의 고리눈에 혼란이 그득했다.
“치워라.”
소중걸이 통증을 견디며 일어섰다. 그를 부축하려던 진천은 생각을 바꿔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기립 후 중심을 잡지 못한 그가 크게 비틀거리자 팔뚝을 잡았다. 소중걸은 진천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그에게 의지했다.
서로의 콧김이 닿는 곳에 선 두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코앞의 상대를 응시했다. 어색한 침묵을 깬 이는 소중걸이었다.
“내가, 졌다.”
진천이 빙긋 웃었다. 승자의 기쁨을 드러낸 미소가 아니라 소중걸의 선선한 패배 선언에 대한 유쾌함의 표시였다. 벽력도문의 곽건이나 원주 강가의 강민이었다면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을 소리였다.
“운이 좋았소.”
진천이 화답했다. 그에 대한 응답은 소중걸이 아니라 권왕에게서 나왔다.
“또 괜한 겸손. 운이라니? 어디까지나 실력이었다, 아우야. 그놈은 네 맞수로는 부족해.”
권왕의 참견에 진천은 쓴웃음이 났다. 그로서는 요식적인 겸양지덕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비무를 목전에 두고 팔영보의 도약을 이뤄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었을 승부였다.
권왕의 말에 수긍하는지 소중걸은 별반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에 대한 진천의 호감이 짙어졌다.
“한 동안 운신이 불편할 텐데 여기서 머무는 게 어떻소? 내가 이곳의 주인은 아니지만 노대인께서 허락해 주시리라 믿소.”
멀리서 노덕이 진천에게 호응했다.
“이를 말인가. 자네의 손님이라면 누구라도 환영일세.”
소중걸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종아리와 허벅지의 부상으로 인해 그 혼자서는 걷기는 고사하고 서 있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며칠만 신세를 지지.”
소중걸의 답변에 진천이 가린을 불렀다.
“우리를 좀 도와다오, 가린.”
가린이 한달음에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소중걸과의 혈투를 잊은 듯 가린이 그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소중걸이 선뜻 가린의 손에 그의 몸을 맡겼다.
소중걸을 잡아 올려 겨드랑이에 낀 가린에게 진천이 말했다.
“나도 부탁한다, 가린.”
고개를 갸웃한 가린이 진천을 어깨에 태웠다. 그러자 소중걸이 불만을 표했다.
“차별하는 건가?”
소중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가린에게 진천이 권유했다.
“그도 어깨에 얹어주는 게 어떨까, 가린.”
가린은 군말 없이 소중걸을 위로 올렸다.
권왕이 대뜸 마령 문가의 도호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제 공짜 구경도 끝났으니 그만 돌아들 가지?”
당금 무림 최고의 관심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초신성들의 대결 결과를 아프게 곱씹고 있던 청운도군 등은 느닷없는 축객령에 정신을 차렸다.
“훌륭한 일전이었다. 덕분에 늘그막에 안목을 크게 넓혔구나. 신룡이라는 별호는 네게 어울리지 않는다. 강호에 천룡이 나타났음이야.”
권왕을 무시하고 진천에게 눈길을 준 청운도군이 감상을 밝혔다. 진천이 서둘러 가린의 어깨에서 내려왔다.
“과찬이십니다, 어르신.”
“그렇지 않다, 아이야. 오래 살아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구나. 너를 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갔더라면 두고두고 아쉬웠을 게다. 네가 어디까지 나아갈는지 궁금하구나. 염왕이 급하게 나를 부르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청운도군의 음성에 비감함이 묻어나자 중인이 숙연해졌다.
권왕이 초를 쳤다.
“이 달밤에 웬 청승인가, 청운. 그러니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게야. 피곤한 내 아우를 붙잡고 객쩍은 소릴랑 그쯤 하고 이제 가는 게 어떤가?”
청운도군은 권왕에게 대꾸를 주지 않고 진천만 상대했다.
“아까 했던 얘기들을 잊지 말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아무 때고 마령에 들르려무나. 내 기꺼이 삼십 년 넘게 아껴둔 아홍(鴉鴻)을 꺼내마.”
아홍은 맹독을 지닌 흑두백사(黑頭白蛇)의 별칭이었다. 천년삼보다 귀하다는 흑두백사로 담근 술은 한 모금만 마셔도 불로장생한다는 속설로 인해 천만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보주(寶酒)였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꼭 찾아뵙겠습니다.”
권왕이 불평을 터뜨렸다.
“고약하군, 청운. 자네가 금분세수 하던 날 그렇게 졸랐는데도 오십 년 지기인 나한테는 한 방울도 허락지 않더니. 내 앞으로는 마령 쪽으로는 오줌도 안 갈길 걸세.”
“허허, 권왕도 같이 오시구려. 다 함께 맛을 봅시다 그려.”
“됐네. 그깟 뱀술을 마시러 그 산골짜기까지 갈 게 무어야. 일 없네.”
달래봐야 풀어질 권왕이 아님을 알기에 청운도군은 입을 다물었다.
권왕이 정색했다.
“가기 전에 명심해야 할 걸 알려주지, 청운.”
윗사람이 아랫것에게 쓸 법한 표현인지라 심히 거슬렸으나 청운도군은 담담한 신색을 유지했다.
“무엇을 명심하란 말이오?”
“나와 아우의 관계에 대해 일절 함구하란 말일세. 만약 소문이 나면 문가에서 새어나간 걸로 간주하고 책임을 묻겠네.”
평정을 잃지 않던 청운도군이 백미를 씰룩거렸다.
“두 가지만 물어봅시다, 권왕. 첫째, 권왕과 저 아이가 호형호제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우리만이 아니오. 최소한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 않소? 삼보장의 아이들은 물론이고 저 장마라는 아이도 말이오. 하니 차후 그 소문이라는 게 퍼졌을 때 발원지가 우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소? 둘째, 책임을 묻겠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책임을 말하는 거요? 내 목을 꺾어 화풀이라도 하겠다는 게요?”
청운도군의 목소리에서 분노를 감지한 권왕이 그답지 않게 즉답을 못하고 우물거렸다. 청운도군은 냉정한 성정이지만 일단 불이 붙으면 심지가 닳아버릴 때까지 타는 외골수이기도 했다. 정파의 절대지존인 북천도왕을 상대로 무려 이십 년이나 대립했던 것도 그러한 특성 때문이었다. 청운도군의 자존심은 독사와 같다는 비유가 호사가들 사이에 회자된 적도 있었다. 건드리면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권왕이 슬쩍 진천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진천은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 판단하고는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속으로 적잖은 책임감을 느꼈다. 권왕이 뜬금없이 청운도군에게 그와의 관계에 대해 비밀을 지키도록 요구한 건 심통의 발로가 아니라 그의 부탁 때문이었다.
진천이 침묵을 지키자 권왕이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아이들에 대해서는 내가 단단히 입단속을 할 걸세, 청운. 그러니 자네는 그쪽을 맡아주게나. 그리고 설마 내가 자네와 주먹다짐을 하겠는가? 책임 운운한 건 자네가 아끼는 아홍을 모조리 마셔버리겠다는 말이었네.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구먼.”
권왕이 한 발 양보하자 청운도군도 결기를 갈무리했다.
“권왕의 청에 응하겠소만 이해가 안 가는구려. 무림의 신구 초인이 나이를 초월해 형제결의를 한 건 흐뭇한 미담일 터인데 어째서 구태여 숨기려는 게요?”
다시 진천을 일별한 권왕이 입맛을 다셨다.
“쩝, 대어를 낚기 위한 미끼라고나 할까. 훗날 알게 될 터이지만 일단은 그 정도로만 들어두게나.”
권왕의 대답은 중인의 의구심을 해소해주기는커녕 되레 증폭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