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11
제110화
요란한 말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삼보장을 나가자 진천은 청와옥으로 들어갔다.
노덕이 대화를 나누고 싶은 기색이었으나 진천은 그의 양해를 구하고 대웅의 방으로 갔다. 안에서 미약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제와 마찬가지로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은 대웅이 보였다. 대웅은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진천은 대웅의 옆에 앉아 가만히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대웅은 한참 후에야 떨림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눈물이 광대가 두드러진 그의 뺨 위로 쉼 없이 흘러내렸다.
진천은 대웅을 일으켜 침상으로 데려갔다. 대웅은 지푸라기처럼 힘없이 진천의 인도에 응했다. 그의 동공에 초점이 잡히지 않은 것을 본 진천은 말을 걸지 않고 방금 전처럼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일다경이 지나 방에 들어왔던 노덕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조용히 나갔다. 얼마 후엔 가린이 나타났다. 진천은 할 수 없이 대웅을 두고 밖으로 나갔다. 대웅을 돌봐야하기 때문에 비무수련을 할 수 없다는 진천의 설명에 가린은 불만을 표했다. 겨우 가린을 달랜 진천은 대웅에게로 돌아갔다.
대웅은 여전히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진천은 서두르지 않고 그의 곁에 앉아 앙상한 어깨에 팔을 둘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점점 짧아졌다. 한낮이 되어서도 대웅은 말이 없었다. 그 동안 가린이 세 번이나 찾아와 수련을 하자고 보챘지만 진천은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진천의 인내심은 오후가 되어서야 보답을 받았다. 아교로 붙인 듯 굳게 다물려있던 대웅의 입술이 벌어지며 두 마디를 토해내었다.
“그녀가 왔었다.”
“그랬구나.”
대웅이 말을 잇지 않고 다시 입을 다물자 진천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와 무슨 얘기를 나눴나, 대웅?”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으며 대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것도. 그녀는 단지 나를 보기만 했다. 그 아름다운 눈으로. 그 차가운 눈으로.”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눈을 통해 많은 감정을 읽었다. 경멸, 혐오, 원망…….”
진천이 대웅의 넋두리를 막았다.
“그만 해라, 대웅. 그렇게 부정적으로 해석할 것 없다. 그녀는 내 외사촌들의 초대를 받아 고 형, 차 소저와 함께 정맹으로 떠나기 전에 인사를 하려고 들렀을 뿐이다. 어제 일도 있고 해서 선뜻 네게 말을 못 붙였을 게다. 그러니…….”
대웅이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그렇지 않아. 나는 겁쟁이지만 바보는 아냐. 그녀의 눈빛에 담긴 뜻은 분명 멸시였어. 내가 세상 누구보다 잘 알아. 지난 칠 년 간 하루도 빠짐없이 받았던 눈빛이니까.”
“…….”
“나는 내가 왜 살아있는지 모르겠다, 천. 나 같은 놈은 숨을 쉴 가치가 없어.”
진천이 대웅의 앙상한 손을 잡았다.
“그런 소리 마라, 대웅. 너는 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잊었나? 우리가 평생토록 서로에게 제일가는 벗으로 지내기로 했던 약속을.”
진천에게 고개를 돌리며 대웅이 울먹거렸다.
“미안해, 천. 하지만 나는, 나는…….”
진천이 대웅을 다독였다.
“그래, 안다. 오늘은 실컷 괴로워하려무나. 하지만 내일부터는 훌훌 털고 일어나 씩씩하게 살아가자.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리는 법이다, 대웅. 나를 믿어라.”
대웅은 진천의 품에 안겨 아이처럼 울었다.
다음 날이 되어도 대웅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진천은 가린에게 생닭을 갖다 주기 위해 두 번 나갔을 뿐 진종일 대웅 옆에 붙어있었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었다. 식음을 전폐한 대웅은 시든 꽃처럼 사위어갔다. 진천도 친우의 고통을 나누기 위해 금식했다.
진천은 대웅에게 남겼던 노미현의 눈빛이 저주가 아니라 선물이 되기를 바랐다. 그것은 전적으로 대웅에게 달려있었다. 대웅은 포기와 독기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었다. 진천은 후자가 되기를 빌었고 그렇게 되도록 끊임없이 대웅을 자극하고 격려했다.
노미현이 정맹으로 떠난 지 아흐레 째 되는 날 마침내 대웅이 진천의 노력에 화답했다.
“이러다 너까지 나처럼 해골이 되겠다, 천. 밥을 먹자. 나 때문에 너를 아사시킬 순 없으니까.”
대웅은 식사만 재개한 것이 아니었다. 결심이 섰는지 그가 크고 단단한 칼을 가능한 한 많이 구해달라고 요청하자 진천은 지체 없이 북운상단의 오재승에게 부탁해 한철로 제련한 일백 자루의 대도(大刀)를 구입했다.
칼들을 지하연무장에 들여놓은 대웅은 가린처럼 굴을 파고는 그날부터 거기서 숙식하며 비무수련을 시작했다. 가린이 발산하는 흉맹한 투기에 움츠러들기 일쑤였으나 대웅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굳센 기상을 보여주었다.
진천은 대웅의 극적인 변화가 기쁘기 그지없었다. 전날의 치욕은 그에게 독이 아니라 약이 된 것이었다. 진천은 대웅이 예기치 않았던 시련과 실연을 계기로 고질병을 고치리라 낙관했다. 그의 심약함은 후천적으로 생성된 것이기에 이사부의 극약처방으로도 완전한 치유가 불가능했던 일사부와는 경우가 달랐다. 대웅은 이제 강인한 무인으로 거듭날 터였다.
“대체 철곤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아우님?”
삼보장에 돌아오자마자 지하연무장으로 내려갔다가 대웅과 가린의 비무를 관전하고 올라온 여상구가 마침 청와옥을 나오던 진천에게 물었다.
“내 눈이 잘못 된 줄 알고 여러 차례 비볐다네. 그런데 아무리 눈을 닦고 다시 보아도 분명 해골이더란 말이지. 내가 알던 그 겁보는 어디 가고 그리 광포한 늑대가 설치고 있는 겐가?”
쓴웃음을 지은 진천이 의형을 후원으로 이끌었다.
“가면서 말씀드리지요, 형님.”
천년노송 쪽으로 걸어가며 진천이 열이틀 전의 일을 의형에게 알려주었다. 여상구가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철곤귀로서는 전화위복이 된 셈이군. 흠, 왠지 남 일 같지 않구먼.”
진천은 의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그 역시 사랑하는 이들과 관련한 비극으로 인해 독기를 품은 무인으로 탈바꿈하지 않았던가.
“어떤 면에선 철곤귀가 나보다 월등히 낫군. 나는 몇 년이나 폐인으로 지냈는데 그놈은 며칠 만에 정신을 차렸으니. 젊은 날의 그 중요한 시기를 그렇게 허송세월로 보냈으니 나도 참 한심하이.”
진천은 의형의 자조에 동의하지 않았다. 만약 주연의 혈서가 좀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의형도 보다 빨리 무인지로에 들어섰을 것이었다.
“그런데 강가의 아이들이 왜 왔다고? 지난번 아우님에게 저질렀던 짓에 대해 사죄라도 하러 온 건가?”
“아닙니다, 형님. 그들은 제 외조부의 명을 전하러 왔습니다. 저를 보자고 하셨다는군요. 실은 내일 강가로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형님이 그 전에 오셔서 다행입니다.”
여상구의 안면에 희색이 만연했다.
“오오, 드디어. 이제 그 어른까지 등에 업으면 아우님은 두 개의 날개를 단 셈이 되겠구먼. 북천도왕과 권왕이라니. 이 엄청난 비밀을 우리만 알고 있다니 한편으로는 어깨가 으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깨가 처지는구먼. 언제가 되어야 천하가 아우님의 진정한 위상을 알게 되려나.”
진천은 반드시 희망적인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말을 아끼고 의형에게 출행의 성과를 물었다.
“가셨던 일은 잘 되었습니까?”
여상구의 이마를 가로지른 주름이 깊어졌다.
“그 날강도 같은 놈들. 이런 저런 개소리를 늘어놓으며 원래 제시했던 가격의 절반에 합의를 보자고 억지를 쓰지 않았겠나. 뒷방에 물러앉은 퇴물들까지 죄다 끌어와서는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말일세.”
“그랬군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진천의 질문에 여상구가 둥근 눈을 게슴츠레 떴다.
“내가 어땠을 것 같은가, 아우님?”
진천은 실소했다. 다들 권왕에게 옮은 것 같았다.
“글쎄요.”
“아우님은 나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지 않은가? 내 행동을 짐작하는 것쯤은 아우님에겐 손바닥 뒤집듯 간단한 일일 텐데. 어서 말해 보게나.”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협상결렬을 선언하면서요.”
진천이 마지못해 입을 열자 여상구가 껄껄 웃었다.
“역시 아우님일세 그려. 딱 그대로였구먼. 성주 성가 너구리들이 수작을 부리는 순간 촌각의 고민도 없이 바로 일어섰다네. 없던 일로 하자고 소리치면서 말일세. 내가 불문곡직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다들 독을 이고 가다가 개구리를 밟아 떨어뜨린 계집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더구먼. 몇몇 늙은이들이 강압적인 기운을 뿜어내며 나를 겁박했지만 내가 어디 그런 데 기가 죽을 위인인가. 나도 살기를 분출하며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 맞섰지. 그랬더니 꼬리를 말더구먼. 나로서는 좀 아쉬웠다네. 상황이 위급해지면 권왕 어른을 팔 작정이었거든. 그 늙은이들 당황하는 꼴을 보고 싶었는데, 쩝.”
입맛을 다신 여상구가 말을 이었다.
“하여간 성가의 대표로 나섰던 천변수(千變手)가 난리를 수습하고는 나를 달래느라 온갖 재롱을 부리더구먼. 친분은 없지만 구면이고 해서 못 이긴 척 다시 자리에 앉았다네. 또 한 번 흰소리를 하면 두 번 다시 응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주면서 말일세.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네. 애당초 이 우형이 이윤을 남기겠다고 벌인 판이 아니지 않은가. 그치들도 그러한 사정을 모를 리 없으니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봤네. 큰 틀은 다 잡아놨으니 자잘한 사안들은 아랫것들이 처리하도록 맡길 참일세.”
“잘 하셨습니다, 형님.”
여상구가 너럭바위에서 엉덩이를 뗐다.
“아우님과 더 담소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지하연무장에 가서 철곤귀의 ‘변심’을 어서 확인해보고 싶구먼. 솔직히 지금도 내가 헛것을 본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하루아침에 바뀔 수가 있나.”
진천도 일어섰다. 그로서도 대웅이 의형의 천생살기에도 위축되지 않고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는지 몹시 궁금했다.
여상구가 성주에서 돌아온 다음날 새벽 진천은 삼보장을 나섰다.
동이 터올 무렵 주안을 벗어난 진천은 네 시진 후 중립지대와 정맹의 경계선인 보경산맥에 이르렀다. 산중에서 반 시진가량 휴식을 취한 진천은 해가 떨어지기 전에 하산해서 장충(長沖)으로 향했다. 최단경로라 할 오로를 경유했던 지난번과 달리 남방으로 우회하는 까닭은 새로운 길을 접해보고 싶어서였다. 외조부가 지시했던 날짜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장충에서부터는 먼젓번처럼 말을 이용했다. 우경에 도달하기까지 들렀던 여섯 도시의 마방에서 죽립을 깊이 눌러쓴 그의 정체를 알아차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순조로운 여정이었다.
이틀 후 술시(戌時) 말 원주에서 이백 리 떨어진 우경에 다다른 진천은 강가촌으로 직행하지 않고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외조부가 오라고 부른 장소는 전날 외숙과 사투를 벌였던 절벽이었다.
야행하는 촌민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며 어둠을 가르고 달린 진천은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아 두 달여 전 강가의 도객들과 격전을 치렀던 숲에 도착했다. 별과 달의 위치를 보니 자정이 지난 듯했다. 외조부가 정한 진시(辰時)까지는 넉넉하게 남아있었다.
천장단애에 선 진천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이 아득했다. 진천은 새삼스레 가슴을 쓸어내렸다. 중상을 입은 채 떨어지고도 무사했던 것은 천운이 아닐 수 없었다.
감상을 떨쳐 낸 진천은 으슥한 곳을 골라 좌정했다. 아침이 올 때까지 운기조식할 참이었다. 그러나 진천은 운공에 들지 못했다. 기이한 위화감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근처 거목 위로 올라간 진천은 기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얼마 후 나무와 돌과 바람과는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 그의 그물에 걸려들었다.
기를 갈무리한 진천은 귀식대법을 펼치듯 호흡도 최대한 억눌렀다. 그가 은신한 숲으로 들어선 이들의 숫자는 오륙십에 달했다. 그 뒤로도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일백을 넘을 지도 몰랐다. 뜻밖의 상황을 맞이한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