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12
제111화
거대한 아름드리나무에 매미처럼 달라붙은 진천은 숨을 죽인 채 그림자들의 동향을 주시했다.
심야의 불청객들이 강가의 무인들임은 불문가지였다. 숲을 통과해 천길 벼랑에 다다른 도객들이 공터에 집결했다. 그리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각자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라. 진시(辰時)에 오라고 했지만 틀림없이 더 일찍 올 게다. 해가 뜨기 전에 도착할 수도 있다. 그 아이가 나타나면 산정(山頂)에서 후(厚)와 홍(弘)이 신호를 주기로 했으니 그때까지 대기하라.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언제 올지 모르니 함부로 기척을 내지 말고 철저하게 몸들을 감추고 있어야 한다.”
강선임에 분명한 자의 명에 따라 일백에 가까운 도객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고목 위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진천은 이 사태의 의미에 대해 고심했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그림은 외숙이 처음부터 외조부와 무관하게 일을 벌였을 경우였다. 그러나 진천은 이 가설을 즉시 폐기했다.
만약 외조부의 이름을 빌어 함정을 파고자 했다면 사방으로 도주로가 열린 장소 대신 강가로 불렀을 터였다. 외조부에게 안내한다는 명목으로 밀폐된 공간으로 유인하면 진퇴양난에 빠졌을 공산이 컸다. 그들을 따라가기 거부하면 외조부에 대한 불경으로 간주하여 올가미를 씌울 수 있을 테니 외숙으로서는 그쪽이 훨씬 매력적인 술책이었을 것이었다.
강민이 사자(使者)로서 삼보장에 온 것도 외조부를 배제하기 어려운 이유였다. 사촌 형을 대하는 태도나 ‘백부’를 언급하며 보인 표정을 보건대 강민은 외숙에게 고분고분한 조카일리 만무했다. 그런 그가 외숙의 수작에 협조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니 그를 삼보장에 보낸 이는 외조부라고 보아야 했다.
거기서 추론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외숙이 외조부 몰래 덫을 놓아 그를 잡고자 했을 경우였고 다른 하나는 외조부의 승인이나 묵인 하에 일을 도모했을 경우였다. 이 대목에서 진천은 벽에 부딪쳤다. 어느 쪽도 석연치 않아서였다.
과연 전자일 수 있을까. 외숙이 강가의 실세라고는 하지만 칠팔 십에 달하는 도객들을 야밤에 은밀히 동원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을지는 심히 의문이었다. 더욱이 현재 외조부가 강가에 머물러 있다면 그의 이목을 피해 다수의 인원이 마을을 빠져나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후자란 말인가. 진천은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면 외조부는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할 필요 없이 그저 앞에 불러다 놓고 칼을 뽑기만 하면 되었을 터였다. 권왕의 전언으로는 외조부의 무력이 이미 이 년 전에 그를 넘어섰다고 했다. 진천으로서는 감당불가의 무위였다.
진천은 생각을 진전시키지 못했다.
벽에 가로막혀서가 아니라 방해꾼 때문이었다. 그가 은신한 거목으로 도객 하나가 올라오자 진천은 기겁했다. 다람쥐처럼 능숙한 몸놀림으로 줄기를 타고 오른 도객은 하필이면 진천이 붙어있는 가지 쪽으로 다가왔다.
진천은 호흡을 닫고 맥박도 늦추었다. 거침없이 나아가던 도객이 그와 불과 한 자 반 떨어진 지점에서 멈췄다. 그가 좀 더 붙으면 기습할 요량이었던 진천은 맥이 풀렸다.
도객의 숨소리가 진천의 고막에 천둥처럼 울렸다. 상당한 경지로 추정되는 도객은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진천이 웅크리고 있음을 꿈에도 알지 못한 채 굵은 나뭇가지에 배를 대고 엎드렸다.
진천은 난감했다. 도객이 방심한 덕분에 들키지 않았지만 그의 기감에 걸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언제까지나 숨을 참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단을 내린 진천은 조금씩 몸을 기울이며 팔을 내밀었다. 굼벵이보다 느린 속도지만 손끝을 도객의 후두부 가까이 옮기는데 성공한 진천이 그의 혈도를 짚으려는 찰나 도객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누구냐?”
진천은 질문에 답하지 않고 서둘러 나무에서 떨어져 내렸다. 간발의 차이로 점혈을 면한 도객이 소리를 질렀다.
“여기다!”
대번에 숲 곳곳에서 소란이 일었다. 진천은 절벽 쪽으로 이동했다. 몇몇 도객들이 그의 경로를 차단했으나 팔영보를 펼친 진천을 붙들어 두지는 못했다. 고성이 난무한 가운데 외숙의 고함이 들렸다.
“스스로를 방어하라. 그 아이는 살의를 품었다.”
저지선을 돌파하고 낭떠러지에 이르렀던 진천은 단애 끝에서 발을 세웠다. 수십 줄기의 인영이 그가 선 곳으로 날아왔다. 진천은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고 반원의 포위망이 펼쳐지도록 방관했다. 중인을 비집고 그의 전면에 나타난 강선이 악다구니를 썼다.
“또 다시 본가에 대적하려 들다니.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이놈.”
도객들이 발산하는 흉흉한 적의를 견디며 진천이 반박했다.
“나는 강가를 적대한 적이 없소.”
강선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이런 발칙한 놈. 나를 비롯한 본가의 무인들에게 무자비한 살수를 펼쳤던 것을 벌써 잊었단 말이냐?”
진천은 외숙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양팔 모두 힘없이 축 늘어져있었다. 전날의 혈전에서 입은 부상이 완쾌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외숙은 다시는 쌍도를 부리지 못할 지도 몰랐다.
“나는 살기 위해 도망쳤을 뿐이오. 더욱이 살수를 쓰지도 않았소. 죽은 이는 아무도 없지 않소?”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궤변이더냐. 네가 우리를 죽이지 못한 것은 단지 무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살기 위해 도망쳤다니? 누가 너를 위협하기라도 했더냐? 비겁한 술수로 민이에게 상처를 입히고는 그것을 추궁당할까 두려워 네 발로 달아나지 않았더냐?”
“내가 비무에서 비겁한 술수를 썼는지는 그에게 물어보면 알 일이오. 아! 그가 알려줄 게 또 있소. 당신의 눈에 떠오른 확연한 살기에 위기감을 느낀 내가 연무장을 떠나자마자 여러 사람에게 나를 쫓으라고 명하며 뭐라고 지시했소? 분명 저항하면 죽여도 좋다고 하지 않았소? 사정이 그러한데 내가 어찌 나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지 않을 수 있었겠소?”
강선의 면상이 시뻘게졌다.
“억지 부리지 마라, 이놈. 그 말은 저항하지 않으면 해치지 않겠다는 뜻이잖으냐? 애당초 네놈이 나와 본가에 해를 끼치고자 하는 불의한 속셈이 없었다면 아무 사달도 벌어지지 않았을 터. 이제 와서 씨도 먹히지 않을 변명일랑 늘어놓지 말고 순순히 네 죄를 인정해라, 이놈.”
진천은 강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바보가 아닌 한에야 강가에 대적하려 드는 이는 없을 거요. 나는 바보가 아니오. 나에게 나쁜 뜻이 있었다면 공개적으로 강가를 찾았을 리가 없잖소? 나는 다만 할아버님을 뵙고 어머니의…….”
“닥쳐라, 이놈. 피는 속이지 못한다더니 어디서 감히…….”
진천의 말을 잘랐던 강선은 자신의 말도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은 허공에서 날아온 묵직한 음성이었다.
“됐다. 그만 해라.”
가뜩이나 진천과 강선의 언쟁을 들으며 혼란에 빠져있던 강가의 무인들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를 알아차리고는 혼비백산했다. 그러나 진천은 평정을 유지했다. 전날 권왕이 그랬던 것처럼 어디선가 지켜보는 눈이 있음을 짐작하고 있어서였다. 그 눈의 임자는 필히 외조부인 북천도왕일 터였다.
진천은 은신이 발각되고 절벽으로의 도주를 시도했을 때 외숙이 외친 말에서 암시를 얻었다.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격이 아니라 방어를 당부하다니. 그가 살의를 품고 있음을 강조하다니. 그것은 강가의 도객들에게 주는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이 겨냥한 이가 따로 있음을 깨달은 진천은 단박에 전후사정을 파악했다.
절벽에 이르고도 뛰어내리지 않고 외숙을 기다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진천은 그에게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나온 외숙이 총공격령을 내리기에 앞서 명분을 구하자 진천은 외조부가 듣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외숙과의 입씨름은 외조부를 염두에 둔 ‘눈 가리고 아웅’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진천은 달밤에 벌어진 이 황당한 소동이 외숙에 대한 외조부의 불신에서 비롯되었음을 직감했다. 외숙이 진상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으리라고 의심한 외조부는 대립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직접 보고자 했을 것이었다.
허공에서 파공성이 일더니 검은 인영이 진천과 강선이 대치한 중간지점에 떨어졌다. 칙칙한 무복을 걸친 짧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그를 본 강가 도객들이 일제히 허리를 구부렸다.
“물러들 가라.”
노인의 명에 강가의 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몸을 돌려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하지만 강선은 그들과 함께 가지 않고 남았다.
“너도 가거라.”
“아버님, 소자…….”
강선은 말을 잇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노인이 발한 안광이 그의 눈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감히 부친의 명을 거역하지 못한 강선이 진천을 쏘아보고는 후면의 숲으로 경신을 전개했다. 그가 사라지자 진천은 바닥에 엎드렸다.
“소손, 천이 할아버님께 인사 올립니다.”
노인은 진천을 내려다볼 뿐 응답이 없었다. 진천은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노인의 음성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라.”
진천은 즉시 명을 이행했다. 노인이 그를 보았고 그도 노인을 보았다.
외조부를 정면에서 본 진천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불현듯 그 얼굴의 주인공이 외숙들이나 외사촌들이 아니라 모친임을 깨달은 진천은 소스라쳤다. 진천의 기억에 노파였던 모친은 목전의 노인과 쌍둥이처럼 닮아있었다.
진천이 외조부에게서 모친의 모습을 본 반면 그는 진천에게서 딸의 흔적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네게는 연이가 없구나.”
진천은 외조부의 음성과 표정에서 실망을 읽었다.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진천은 외조부가 그의 선친을 본 적이 있을지 궁금했다. 강가의 원로인 강찬에 따르면 그는 선친의 용모와 흡사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외조부는 ‘사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연이는 언제 떠났느냐?”
“오 년 전입니다.”
강운의 시선이 진천에게서 떨어져 허공으로 올라갔다. 한참 후에야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어째서 그렇게 일찍 갔단 말이더냐?”
진천은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후자였다.
“서른다섯은 염왕에게 가기엔 너무 이른 나이가 아니더냐? 병에 걸린 게냐? 아니면 사고가 있었더냐?”
“……사고였습니다.”
강운은 더 캐묻지 않기를 바라는 진천의 원을 외면했다.
“무슨 사고?”
진천은 난감했다. 진상을 밝히기엔 너무나 황망하고 끔찍한 죽음이었다. 허 노야의 목을 꺾으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고 모친이 비수로 제 목을 그어 자진했다고 어떻게 고할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는 오랫동안 정신이 불안정했습니다. 팔 년 전 큰 외숙이 운명하고 난 후엔 증세가 더 심해졌습니다. 그러다…….”
진천은 뒷말을 얼버무렸다. 다행히 비극적인 내용이 이어지리라 짐작했는지 강운은 그를 추궁하지 않고 넘어갔다.
“큰 외숙이라 함은 진이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그 아이는 어떻게 죽었더냐?”
“병사였습니다.”
“…….”
잠시 후 강운이 그에 앞서 저승으로 떠난 딸과 아들에 대한 짤막한 감상을 뱉어냈다.
“몹쓸 것들.”
강운은 상념에 잠겼다.
진천은 외조부를 방해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무려 사십 년 동안이나 정파 무림의 지존으로 군림한 거인이었으나 그의 앞에 선 이는 자식들을 잃고 회한에 빠진 노인일 뿐이었다. 일 각 전 말 한 마디로 칠십여 도호들을 쫓아냈던 위엄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윽고 강운이 침묵을 깼다.
“그 아이들은 나를 원망하다가 갔을 테지?”
진천은 선뜻 대답을 못했다. 일사부는 몰라도 모친은 외조부를 향해 원망 정도가 아니라 원한에 사무친 저주를 시도 때도 없이 쏟아내곤 했다. 강가의 접수와 최종적인 멸문은 모친이 그에게 강요한 제가(齊家)의 핵심이었다.
진천의 답이 늦어지자 강운의 백미가 일그러졌다.
“괘씸한 것들. 내가 베푼 은혜와 저들이 내 가슴에 박은 대못은 생각도 하지 않고 되레 온갖 잘못을 용서해준 나를 원망하다니.”
진천은 외조부와의 대화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모친은 생김새와 무재(武才)만이 아니라 성격도 그녀의 부친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았음에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