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14
제113화
그를 향해 달려오는 장한을 보고는 진천이 처진 눈을 멀뚱거렸다.
“설마, 장 아저씨?”
우람한 체구의 장한이 진천을 덥석 껴안았다.
“그래, 나다, 이 녀석아. 이게 얼마만이냐? 열 달도 넘은 것 같구나.”
정확히는 반년에서 딱 이틀이 모자랐다. 하지만 진천은 장한의 오해를 바로잡지 않고 넘어갔다.
“수염은 어쩌고요?”
장한은 창인 대왕객잔의 주인 장초였다. 진천의 질문을 받은 장초가 밋밋한 턱을 쓰다듬으며 인상을 구겼다.
“제길, 별 수 있냐? 혹시라도 나를 알아보는 놈들이 있을까봐 창인을 나서며 싹 밀어버렸다. 내 꼴을 보고는 대장간의 배씨들이 배를 잡고 웃더구나. 그치들하고 대판 싸우다 턱이 깨졌지 뭐냐. 비겁한 놈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둘이 한꺼번에 덤비지 않겠냐? 그래도 큰 배씨는 뱃대지에, 작은 배씨는 엉덩짝에 한 칼씩 먹였으니 크게 손해 보지는 않았다. 너를 빼면 나는 여전히 창인의 최강자야.”
“어휴, 애들도 아니고. 내가 이래서 안심을 할 수가 없다니까.”
진천은 장초를 꼼꼼히 살폈다. 별다른 변장 없이 수염만 깎았을 뿐인데 장초는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인상이 달라졌다. 턱 때문이었다. 털로 무성했던 턱이 윤곽을 드러내자 의외로 섬세한 곡선이 나왔다. 당연히 각진 턱이리라 생각했던 친인들로서는 황당한 반전이 아닐 수 없었을 터였다.
“내 잘못이 아니라니까. 너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나더러 그치들을 응징하라고 부추겼을 게다. 얼마나 놀리던지. 제길, 말하다보니 또 울화가 치미네.”
진천이 씩씩거리는 장초를 달랬다.
“좀 어색하긴 해도 보기에 그리 나쁘진 않은데요.”
장초가 화를 냈다.
“속에 없는 소릴랑 뱉지도 말거라. 나도 보는 눈이 있는데. 설령 그렇다 해도 아무 위안이 안 된다. 고추에 털이 난 이후로 한 번도 손을 대지 않고 고이 길러온 내 분신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심정을 아느냐?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이 녀석아.”
진천은 쓰게 웃었다.
“미안해요, 장 아저씨.”
장초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하나도 안 변했구나, 천아. 실은 너를 보기 전까지 내내 초조했다. 무림의 거물이 된 네가 나를 냉대할까 봐.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불안이 가시질 않더구나. 예전에 그런 작자들을 숱하게 봤었거든. 지위가 오르면 죽마고우를 종인 양 대하며 거들먹거리는 위인들 말이다. 너야 그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명을 얻지 않았더냐? 이리로 오면서 네 소문을 듣고는 몇 번이나 귀를 의심했더랬다. 내가 아는 천이가 맞는지. 네가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창천도군을 꺾다니. 허 노야가 알면 기절초풍 했을 게다. 어쨌거나 이제 용호단에 드는 건 식어버린 죽 먹기나…….”
진천이 장초의 장광설을 막았다.
“창인을 언제 떠났죠, 장 아저씨?”
진천의 안색이 어두워진 걸 본 장초가 덩달아 낯빛을 흐렸다.
“두 달 보름 전인가. 사월 중순에 출발했으니까.”
진천이 처진 눈을 올렸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렸어요? 서둘렀다면 한 달이면 충분했을 텐데.”
죄상의 자백을 강요당하는 죄인처럼 장초가 우물거렸다.
“실은 오던 중에 말썽에 휘말렸다. 나쁜 놈들이 나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을 내준 선량한 가족을 괴롭히는 걸 보고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후환이 없도록 마무리까지 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구나. 내가 늦어 큰 일이 생긴 게냐?”
진천이 불안해하는 장초를 진정시켰다.
“아니에요, 아저씨. 아저씨 잘못은 아무 것도 없어요. 단지 아저씨가 오월 말에 창인을 떠났을 거라는 추측이 빗나가서 당황한 것뿐이에요.”
장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아, 간 떨어질 뻔 했잖으냐? 나 때문에 사달이 벌어진 줄 알고. 그런데 나는 내가 출발한 날짜가 왜 중요한지 모르겠구나.”
장초가 사월 중순이나 하순에 창인을 나섰다면 그 시점에서는 허 노야가 마령 문가와의 구인결에 대해 듣지 못했을 공산이 컸다. 허 노야는 하수린과의 비무나 백도방과의 오인결에 관해서는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장초 등이 창인 근처에 기웃거리는 흑문의 염탐꾼들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을 터였다.
장초를 보낸 건 일종의 배려였다. 진천은 허 노야가 그의 사문을 외부에 유출하지 않았으니 염려 말라는 뜻을 전하려 한 것임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문제는 오월 이후였다. 흑문의 염탐꾼들은 위협이 되지 않겠지만 사패의 첩인들은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허 노야가 그의 당부를 거슬러 그들에게 정보를 주지 않으려 맞선다면 불상사가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진천은 좀 더 일찍, 좀 더 확실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자신의 안일함을 자책했다.
진천은 장초에게 설명을 아꼈다.
바꿀 수 없는 일로 그에게까지 걱정을 끼칠 수는 없었다.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에요, 장 아저씨. 그보다 급히 다녀올 데가 있으니 안에 들어가서 기다릴래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장초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빨리 갔다오너라. 저 큰 집에 나 혼자 있으려니 영 불편해서. 그나마 안면이 있는 삼보장주와 금강권은 보이지도 않고 웬 뼈다귀가……, 헉!”
갑자기 헛바람을 들이켠 장초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자가 철곤귀일 테지? 남천도왕의 손자라는. 어쩐지 몸은 비실비실해도 눈빛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이거 어떡하면 좋지? 하도 행색이 허름하고 몰골이 초라하기에 잡일하는 하인쯤 되는 줄 알고 너를 불러오라며 하대했는데.”
“그가 기분이 나빴다면 벌써 손을 썼을 거예요. 그러니 신경 안 써도 돼요.”
장초를 안심시킨 진천은 그를 청와옥에 들여보내고 북운상단으로 내달렸다.
진천이 반 시진 후에야 돌아오자 장초가 퉁퉁 부은 볼로 그를 맞았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
창인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장초의 면모에 진천은 고소를 머금었다.
“식사는 했어요, 장 아저씨?”
“말 돌리기는. 이 녀석. 벌써 먹었다. 너와는 달리 나는 오전에 배를 채우지 않으냐? 주안에 들어서며 긴장이 풀렸는지 다리가 후들거리더구나. 그래서 남은 노잣돈을 탈탈 털어 객잔에서 식탁이 무너질 만큼 푸짐하게 시켜놓고 포식했다. 삼보장에 가면 노(盧) 대인이 돌아갈 여비는 줄 테니 말이다. 설마 인색하기 짝이 없는 허 노야보다야 넉넉히 챙겨주겠지.”
“여기에서 나와 함께 지내도 되요, 장 아저씨.”
진천의 제안에 장초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나는 창인이 편해. 벗들도 다 거기 있고…….”
말끝을 흐리는 장초를 보며 진천이 빙긋이 웃었다.
“우란 아줌마와 잘 된 모양이군요.”
장초가 씩 웃었다.
“눈치는 여전하구나, 녀석. 그래, 잘하면 머지않아 총각 딱지를 뗄 것 같다. 자기를 거둬달라며 나한테 매달리더구나.”
진천은 풍만한 몸매의 나무족(族) 여인이 눈에 선했다. 장초의 오랜 구애를 뿌리치고 애를 태우더니 드디어 그의 마음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장 아저씨가 수염을 미는 걸 보고는 충격을 받았군요. 혹시 사지로 떠난다고 허풍을 치며 무사히 돌아오면 연분을 맺자고…….”
“허어, 귀신은 속여도 너는 못 속인다는 창인의 속담을 내가 잠시 잊었구나. 됐다, 이 녀석아. 내 얘기는 그만 하고 네 얘기나 하자꾸나. 아까도 말했지만 하남 무림을 지나다 네 소문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하남편봉이라는 아이야 그렇다 쳐도 창천도군이라니. 내가 중원에 머무르던 십칠팔 년 전에도 그는 위명이 쟁쟁한 고수였다. 지금은 마령 문가 최강의 도호라던데 어떻게 그런 거물을 이겼느냐? 이런저런 말이 떠돌긴 하더라만 편법으로 어찌 해 볼 인물이 아닐 텐데.”
장초의 면상에 불신의 기색이 완연했다.
“작년에 밀림에 들어가 수련하며 무공이 늘었어요, 장 아저씨. 창천도군을 이긴 건 운이 따랐고요.”
진천의 간단한 답변에 장초가 불만을 드러냈다.
“그게 다냐? 듣자하니 네가 강기까지 구사한다던데.”
진천은 장초의 의구심을 이해했다. 그는 절멸도를 본 적이 없었다.
“보고 싶어요, 장 아저씨?”
진천의 질문에 장초가 반색했다.
“이를 말이냐. 사실 너를 보자마자 시험해보고 싶었는데 엄두가 나야 말이지. 내가 알던 네가 아닌 것 같아서.”
진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초를 데리고 지하연무장으로 향하며 진천이 지인들의 안부를 물었다.
“다를 잘 지내시지요?”
“빨리도 묻는구나. 어린놈들이야 노상 걸핏하면 패싸움을 벌여 골치를 썩이고 푸줏간의 성가(成家)는 밀림에 들어갔다가 독사한테 물리는 바람에 비명횡사할 뻔했다. 공(孔) 노인 말로는 조금만 응급처치가 늦었어도 시체로 돌아왔을 거라더라. 죽다 살아난 게 스물두 번째라니까 그 인간 명이 질기긴 해. 나무꾼 우(禹)씨는 작은 배씨하고 겨루다 다리가 부러졌다. 그 꼴을 하고도 이족 처자들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온 동네를 싸돌아다니고 있다. 물론 여자들은 그치를 봤다하면 도망가기 바쁘고. 너 같으면 잠자리에서 운우지락이 아니라 지옥 구경을 시켜준다는 악명을 가진 사내와 붙고 싶겠냐? 그래도 그 친구 참 용한 구석이 있어. 맨날 발정난 개처럼 껄떡거리면서도 절대로 완력을 써서 여자를 품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패거리가 되었겠지만 어쨌든 흔히 볼 수 있는 작자는 아니다.”
진천은 절로 쓴웃음이 났다. 나무꾼 우 아저씨는 거대한 남근에다 하룻밤에 열 번을 넘게 방사를 치르고도 만족을 못하는 정력으로 유명했다. 그와 동침한 이들이 학을 떼며 소문을 내는 바람에 그는 이족의 여인들 사이에서 기피대상 일 순위였다. 허 노야는 짚신에도 짝이 있으니 언젠가 그에게 맞는 배필이 생길 거라며 풀 죽은 우 아저씨를 격려하곤 했다.
“그것 말고는 별 일 없다. 네가 없는 동안 아이들이 스물 둘인가 셋인가 더 태어났다는 정도밖엔.”
“허 노야는 어떠신지요?”
“그 노인네야 여전히 골골하지, 뭐. 하지만 염왕에게 가려면 멀었을 게다. 어쩌면 나보다 더 오래 살지도 몰라, 그 노인네.”
진천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기실 그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창인을 떠나기를 망설이는 그에게 공 할아버지가 허 노야는 보기와 달리 근기가 강해 장수할 거라 호언장담했기 때문이었다. 공(孔)이라는 성(姓)으로만 불리는 백염백발의 노인은 진천이 아는 최고의 명의였다.
진천이 장초와 함께 지하연무장의 입구에 이르렀을 때 노덕과 여상구가 정문을 들어섰다.
장초를 본 노덕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진천은 실소했다.
“오랜만이오. 비루먹인 망아지 마냥 꾀죄죄하더니 몇 달 새 신수가 훤해졌구려.”
장초가 인사를 건네자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노덕이 눈을 크게 떴다.
“자넨 대왕객잔의 털보가 아닌가? 아니, 이젠 털보가 아니군.”
“제길, 꼭 그렇게 콕 꼬집어 그 별명을 말해야 했소? 가뜩이나 벌거벗고 다니는 것 같아 속이 쓰리구만.”
“허허, 그런가? 아무튼 잘 왔네. 여기서 보니 반갑구먼.”
노덕의 환대에 장초의 입이 귀에 걸렸다. 진천은 그를 의형에게 소개했다.
“제 고향에서 온 장 아저씨입니다, 형님. 창인에 하나밖에 없는 객잔의 주인이지요.”
여상구가 장초의 어깨를 두드렸다.
“흠, 듣던 것과는 인상이 많이 다르군. 어쨌거나 아우님의 친인이니 쌍수를 들고 환영하네.”
기껏해야 서른 살로 보이는 여상구가 하대하자 콧구멍을 벌름거리던 장초가 소문을 상기하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혹시 당신이 화월도군의 팔을 잘랐다는 도화각주…….”
여상구가 장초의 말을 잘랐다.
“이젠 거기 주인이 아닐세. 홀라당 팔아버렸으니. 그냥 여 형이라고 부르게나.”
창인에서 간담이 크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해 할 장초였지만 안절부절못했다. 여상구는 그가 난생 처음 대면하는 초절정의 고수였다.
여상구가 진천에게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가, 아우님? 시일이 예정보다 오래 걸린 걸 보니 조손지간에 할 얘기가 많았나보이?”
기대감에 부푼 의형의 얼굴에 진천은 괜히 미안해졌다.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형님. 지금 장 아저씨에게 제 무공을 보여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진천의 말에 노덕과 여상구의 시선이 장초에게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