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15
제114화
장초는 모골이 송연했다.
어마어마한 넓이의 연무장에 들어서니 엄청난 덩치의 거인과 삐쩍 마른 해골이 살벌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장초는 청면(靑面) 괴인이 다섯 달 전 창인에 찾아와 진천의 행방을 묻던 괴물임을 알아보았다. 진천이 신신당부한 대로 그와 충돌하지 않고 선선히 주안과 삼보장에 관해 알려주었지만 하마터면 염왕전에 갈 뻔했다. 그날 괴인의 실력을 보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차례 강력한 어조로 청면괴인을 자극하지 말라고 이르던 진천의 모습을 떠올리며 참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골로 갔을 터였다. 그의 식도(食刀)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칼바람을 일으키는 해골 청년의 대도를 몸뚱이로 맞고도 끄떡없는 괴물을 상대하려 했다니 장초는 상상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러나 장초의 놀라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진천이 다짜고짜 비무에 끼어들자 장초는 자기도 모르게 조심하라고 소리쳤다. 그의 조바심이 무색하게 진천은 거인의 팔과 해골의 칼 사이를 바람처럼 빠져나가며 그들의 합공을 무위로 돌리는 신기를 과시했다. 진천의 현란한 발놀림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창인에서 보았던 것과는 수준이 달랐다. 절정에는 들지 못했지만 일류의 무인이었기에 장초도 그 정도는 알아볼 안목이 있었다.
진천의 손끝에서 하얀 고드름 같은 광채가 돋아나자 장초는 숨을 죽였다. 말로만 듣던 강기일 터였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강기와 달리 진천의 좌수에서 뻗어 나온 백색의 기운은 그가 뽑아내는 면발처럼 흐느적거렸다.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지만 위력은 가공스러웠다. 거기에 부딪친 해골의 칼이 낫에 베인 풀처럼 싹둑 잘려나갔고 맨몸으로 칼을 맞던 거인도 감히 맞서지 못하고 피하기에 급급했다.
진천이 현시하는 상상불가의 무위에 전율하던 장초는 느닷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의 제자이자 친구이자 지도자였던 어린 벗이 그가 범접할 수 없는 곳으로 올라갔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더 이상 같은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진천의 눈부신 성장이 한 없이 기쁘면서도 창인의 보물인 그를 중원에 빼앗긴 것 같아 장초는 서글펐다.
얼이 빠진 장초를 노덕에게 맡긴 진천은 여상구와 함께 후원의 노송으로 갔다.
의형과 나란히 너럭바위에 앉은 진천이 경과를 보고했다.
“외가와는 남남이 되기로 했습니다.”
예기치 않았던 말에 여상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무슨 소린가?”
진천이 쓰게 웃었다.
“제 외조부께선 제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입니다, 형님.”
여상구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그러나 여상구는 금방 얼굴을 폈다.
“그 어른은 무력은 엄청날지 몰라도 안목은 형편없구먼. 아우님 같은 복덩이를 마다하다니. 뭐, 그러라고 하지. 우리에겐 일당백인 권왕 어르신이 계시지 않은가. 설령 그 어르신이 없더라도 아무 문제없네. 아우님과 나, 그리고 가린과 철곤귀가 뭉치면 천하의 누구라도 상대할 수 있잖은가. 그러니 기운 내게나.”
진천은 등을 두드리는 의형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금도 실망하지 않으니 제 걱정은 마십시오, 형님. 어머니의 원을 들어드리지 못해 죄송스럽지만 외가와의 연이 정리되니 오히려 홀가분해서 더 좋습니다. 저로서는 외조부께서 지난번 강가에서 있었던 일을 불문에 붙이신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결과입니다.”
여상구도 활짝 웃었다.
“나는 아우님이 실의에 빠진 줄 알고 놀랐지 뭔가. 아까 정문에 들어서며 본 아우님 표정이 어딘지 굳어있기에 말일세.”
“고향에 두고 온 친인들의 안위가 염려스러워서 그랬나 봅니다.”
진천은 장초의 출발 시점에 관한 추론을 여상구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흠, 걱정할 만 하구먼. 혹시 창인에 가 볼 생각인가?”
“아닙니다. 그러고 싶지만 직선거리로만 육천 리 길이니 지금 간다고 해도 별 도움이 안 될 겁니다. 그래서 하 소저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진천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여상구가 무릎을 쳤다.
“아! 그녀에게 전서구를 날렸구먼. 하남편봉은 팔정포에 있으니 창인까지는 금방 가 볼 수 있을 테지.”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인에서 팔정포까지도 일천팔구백 리에 달하니 ‘금방’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지만 하수린이 쉼 없이 경공을 전개한다면 이틀 이내에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하 소저에게 자세한 사정을 알리고 창인에 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녀가 제 부탁을 들어주면 빠르면 엿새, 늦어도 열흘 안에는 창인의 상황을 알 수 있을 듯싶습니다.”
“허어, 아우님 심경이 편치 않겠구먼. 별 일 없어야 할 텐데.”
진천도 그러기를 간절히 빌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끝에 여상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우님에게 전해줄 소식이 두 개 있다네. 하나는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구먼.”
“무엇인지요?”
“흠, 일단 아우님과 관련된 것부터 말할까? 북운상단에 갔었다니 이미 들었을 공산이 크지만.”
“아닙니다, 형님. 하 소저에게 보낼 서찰에 지리와 창인에 가서 주의할 점들을 상세히 적느라 오 단주와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장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어 급히 돌아와야 했고요.”
“그런가? 그렇다면 말함세. 다름 아니라 전날 이곳에 왔다던 아우님 외사촌 말일세. 강민이라고 했던가?”
“맞습니다.”
“그 아이가 나흘 전 정맹에서 자하검선(紫霞劍仙)을 상대로 치른 비무에서 그녀를 꺾었다는구먼.”
“그랬군요.”
진천은 묘한 인연을 느꼈다.
사평 팽가의 여걸 팽하연은 모친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열두 살 때 용봉대전을 관전하러 정맹을 방문했던 모친은 결승에서 평소 거만하기 이를 데 없던 둘째 오라비를 몰아세우던 여검사의 무용(武勇)에 심장이 터질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를 통해 여인도 얼마든지 사내를 능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모친은 반드시 심공을 익혀 내공을 쌓겠다고 결심했다. 그 결심은 자진을 빌미로 큰 오라비를 협박해 현무심법을 얻어내는 결실로 이어졌지만 결국은 그로 인한 단전 파괴라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 우형은 십이삼 년 전쯤 그녀를 만난 적이 있다네. 나보다 대여섯 살 정도 어리니 당시 그녀는 사십대 중반 쯤 되었을 걸세. 미인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추녀는 더더욱 아닐세. 뭐랄까. 남자처럼 잘생긴 얼굴이라고나 할까. 금강권의 처와 비슷한 용모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겠구먼. 외모 얘기를 왜 하냐 하면 그녀의 성정이 어지간한 사내보다 훨씬 호방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라네. 가히 매력적인 여인이었네. 아우님이니까 고백하네만 그녀를 보고는 내 옛사랑이었던 주연이를 떠올렸다네. 당차고 정의롭고, 그러면서도 배려심도 깊고. 솔직히 그녀와 어울렸던 시간이 조금만 길어졌어도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네. 주연의 혈서를 받은 이후 다른 여인에게 끌리고 마음이 흔들렸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네.”
“그러셨군요. 그분은 어땠습니까? 형님에게 관심을 보이셨는지요?”
“잘 모르겠네. 나는 꽃밭에 둘러싸여 살아왔으나 여자의 마음에 대해서는 열다섯 소년보다 문외한일세. 자신할 순 없지만 나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나쁘진 않았던 듯하이. 다른 오대세가의 중진들이 나를 대놓고 업신여겼던 반면 그녀는 시종여일 정중하게 대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나에 대한 호감의 표현이었다고 단정할 순 없네. 나 말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대했거든.”
“지금이라도 그분과 좋은 관계가 되도록 노력하시는 게 어떨는지요, 형님?”
“허허, 그런 소리 말게. 말이 나왔으니 뱉어냈을 뿐 잊은 지 오래라네. 그리고 마련과의 전쟁이 임박했지 않은가. 전장에 나가는 장수는 기존의 식솔들도 정리하는 법일세. 하물며 새로운 연분이라니. 터무니없네.”
“…….”
“아우님과 관련된 일이라고 했다가 내 얘기만 실컷 떠들었구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감세. 아니, 그럴 게 아니라 아우님이 맞춰 보게나. 어째서 아우님과 관련이 있을까? 참고로 그녀를 꺾은 강가의 신성이 아우님과 외사촌 간이라는 건 정답이 아닐세.”
진천은 고소를 지었다.
너무나 뻔한 문제였다. 초절정의 초입에 들어선 것으로 평가받는 자하검선을 이김으로써 단번에 대륙 전역을 아우를 무명(武名)을 얻게 되었지만 강민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터였다.
사평 팽가 무력 서열 삼위이자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여검호(女劍豪)로 인정받는 자하검선이지만 마령 문가의 창천도군에 비하면 무게감이 현저히 떨어졌다. 그녀의 이름값은 가린에게 패했던 파혼도 문수창이나 이십팔 년 전 용봉대전에서 승리를 거뒀던 폭풍도 강선과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보다도 약간이나마 처진다고 보아야했다.
강민은 그보다 큰 월척을 낚은 경쟁자를 질시했음에 틀림없었다.
“그가 조만간 저와 비무를 하겠다고 공표한 모양이군요? 어쩌면 소(蘇) 형에게도 대결의사를 밝혔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허어, 역시! 그렇다네. 아우님을 몰랐다면 오 단주에게 듣고 와서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고 의심하겠지만 아우님이 그럴 리가 없지. 아우님 말대로 자하검선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낸 직후 강가의 신성은 관전하던 정맹의 무인들 앞에서 하남신룡과 장마를 차례로 꺾어 정파 무림의 위엄을 보이겠다고 공언했다네. 날짜까지 못 박으면서 말일세. 아우님과는 구월 구일에 비무를 치르고 장마와는 그로부터 두 달 뒤인 십일월 십일일에 자웅을 겨루겠다고 했다더군.”
진천은 강민과 함께 정맹으로 떠났던 고량 등이 그에게 소중걸과의 비무에 관해 알려주지 않았음을 알았다.
여상구가 넌지시 물었다.
“어떤가, 아우님? 그자의 도전에 응할 텐가?”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피곤하게 굴 테니까요.”
“당연히 이길 테지? 지난번 강가에서는 그 아이와 평수를 이루었지만 아우님은 근래 무력이 상승하지 않았는가?”
“저만 그랬을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 닥쳐봐야 알 것 같습니다.”
“보통내기가 아닌 건 확실하네. 자하검선이 불과 십여 초 만에 패배를 시인했다니. 하지만 뒷맛이 썩 개운치는 않네. 그녀가 초장부터 죽자 사자 달려드는 젊은 칼잡이와 양패구상 할 것을 염려해 양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구먼.”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가 비기를 일찌감치 꺼냈다면 그분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물론 비무가 아니라 생사투였다면 형님 말씀처럼 양패구상이 나왔을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짐작컨대 자하검선을 비무 상대로 정한 데는 승패에 집착하지 않는 그분의 담백한 성품도 고려했을 듯싶습니다. 다른 검호나 도호였다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렇겠구먼. 교활한 놈일세 그려.”
진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선택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그 방면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이가 조언했거나 결정했을 테지요. 그가 골랐다면 보다 윗길의 이름값을 가진 강자를 택했을 겁니다.”
“그런가? 아우님이 그렇다면 그럴 테지.”
어깨를 으쓱거린 여상구가 화제를 바꿨다.
“두 개의 소식 중 하나는 대충 전했으니 나머지 하나를 알릴 시간이구먼.”
“무엇인지요?”
의미심장한 눈으로 진천을 바라보며 여상구가 반문했다.
“무엇이겠는가?”
진천은 의형이 ‘권왕 놀이’를 너무 즐기지 않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