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16
제115화
“글쎄요.”
“그러지 말고 말해 보게나. 이것만 맞히면 성가시게 굴지 않겠네.”
“알겠습니다. 혹시 마령 문가에서 통보가 온 건지요? 가린과 발산도군의 비무 건으로 말입니다.”
“허허, 대체 어떻게 아는 건가? 아직 가린에게 말하지 않았으니 그를 통해 들었거나 눈치 챘을 리도 없을 텐데. 신기하기 이를 데 없구먼. 비결이 뭔가, 아우님.”
“그냥 넘겨짚었을 뿐입니다, 형님. 당장 가린에게 복수하고 싶은 욕구와 칼을 벼릴 시간 사이에서 발산도군이 절충했을 법한 시점이니까요. 언제 붙자고 하던가요?”
“사흘 후 미시(未時)일세. 장소는 아우님이 강가에 가기 전 일러준 대로 무연곡으로 알려줬다네.”
“잘 하셨습니다.”
“아우님이 그날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나하고 가린 둘이서 가려고 했는데 다행일세. 권왕 어르신의 뒷배가 있으니 문가의 칼잡이들이 함부로 날뛰지는 않을 테지만 모를 일 아닌가?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이판사판으로 나올지. 나는 권왕 어르신의 의제가 아니지 않은가. 그들로서도 부담이 훨씬 적을 테지. 문가를 받치는 두 개의 대들보 중 하나를 불구로 만들었으니 나를 찢어죽이고 싶어 할 걸세. 물론 그들이 두렵지는 않네. 다만 문가와 드잡이 질을 벌여 그들과 척을 지면 아우님의 대계에 지장을 줄까 봐 염려했던 것뿐일세.”
“알고 있습니다, 형님.”
“그럼, 그럼. 아우님이 내 마음을 모를 리가 없지. 그 맛으로 내가 팔자에도 없는 인내수련을 하는 게 아닌가.”
“고맙습니다, 형님.”
“나도 고맙네, 아우님. 아우님을 만난 이후로 하루하루가 즐겁구먼.”
“저도 그렇습니다.”
“허허, 어째 옆구리를 찔러 절 받는 기분이구먼. 쑥스러우니 이쯤 하세나. 그나저나 가린이 무사할 것 같은가? 썩어도 준치라고 발산도군은 일세를 풍미했던 강자인데.”
“북운상단의 오 단주를 통해 그의 현재 무력에 관한 정보를 모았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도강(刀鋼)을 구사한다더군요. 하지만 전성기 때의 위력은 아닌 듯합니다. 추정컨대 화월도군과 파혼도의 중간쯤일 듯 싶습니다.”
“그렇다면 팽팽한 싸움이 되겠구먼. 전날 파혼도에게 고전했으나 가린도 요 석 달 동안 꽤 늘지 않았는가?”
“맞습니다, 형님. 객관적인 전력만 따지자면 오 대 오(五對五)의 승부입니다. 하지만 가린이 약간 불리한 점이 있습니다. 발산도군은 사생결단으로 나올 테지만 가린은 그를 죽여서는 곤란하니까요.”
“못해 먹을 짓이군. 아우님 말처럼 마도와의 전쟁을 앞두고 정파와 갈등을 일으켜서는 안 되겠지만 이래서야 더러워서 살겠는가.”
“사마를 혁파한 후에는 그들과도 옳고 그름을 놓고 다툴 날이 올 것입니다.”
“알았네. 까짓것 정(正)이고 사(邪)고 마(魔)고 다 쓸어버리세. 그러려면 아우님이 하루 빨리 팔대무왕을 능가하는 절대무존으로 성장해야 하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우님을 믿네. 그런데 훗날의 일은 그렇다 치고 당장의 문제는 어쩔 셈인가? 아우님이라면 가린의 불리함을 상쇄할 복안을 진즉 마련해두었을 성싶네만.”
“몇 가지 준비는 해두었습니다.”
“과연! 그게 뭔지 알려주겠는가, 아우님?”
날이 푹푹 쪘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더위였다. 밀림에서 일백 년을 보낸 가린도 살갗을 녹이는 폭염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진천은 그를 달래 삼보장 정문 마당에 들여놓은 마차에 태웠다. 사인승(四人乘)의 마차였지만 가린 하나로 속이 꽉 찼다. 잔뜩 몸을 웅크려야 했던 가린이 으르렁거리며 불만을 토해냈다. 진천은 못 들은 척하고 마부석에 올랐다.
노덕과 여상구, 그리고 대웅이 나와 가린의 선전을 빌었다. 여상구와 대웅은 무연곡으로 가지 않고 삼보장에 남기로 했다. 그들의 존재만으로 마령 문가의 도객들을 자극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죽립을 눌러 쓴 진천은 두 마리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 마차를 몰았다. 행선지는 주안에서 동북으로 오륙십 리 떨어진 무연곡이었다. 무연곡은 넉 달여 전 백도방과 오인결을 벌였던 곳이었다. 사람들이 출입하지 않는 황폐한 석곡인지라 비밀스런 행사를 치르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주안과 배수의 중간지점이라는 점도 좋은 조건이었다.
삼보장을 출발한 지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협곡에 들어선 진천은 호리병의 불룩한 부분 같은 공터에 이르러 마차를 세웠다. 반대편에 여섯 명의 백의인이 보였다. 전부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한 달 전 삼보장을 찾았던 노도호(老刀豪)들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진천은 가린과 함께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진천이 다가오자 발산도군이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권왕도 네 정체를 아느냐?”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진천은 그가 무엇을 묻는지를 알고 있었다.
“제 사문에 관해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렇습니다.”
예상외의 답변이었는지 발산도군의 낯짝이 다 쓰고 버려진 종이처럼 구겨졌다.
“정말이냐? 네놈이 그 악종들의 제자라는 걸 그가 안다고? 그런데도 너를 의제로 삼았단 말이더냐? 믿을 수 없다.”
진천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차후 제 의형께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거짓말을 극히 싫어하시는 분이니 있는 그대로 알려주실 것입니다.”
반격할 말을 찾지 못한 발산도군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잠자코 지켜보던 청운도군이 나섰다.
“이는 네가 권왕과 형제결의를 했다는 것 이상으로 충격적인 사안이다. 아는지 모르겠다만 정맹은 전날 잔귀쌍마를 무림공적으로 공표했다. 이십 년이 지났으나 그 조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잔귀쌍마는 물론이고 그들과 연관된 자들도 정맹의 율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받을 것이다. 네가 그자들의 전인이라는 게 사실이라면 너 또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진천의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두 사부의 제자로서 저 또한 책임을 통감합니다. 책임을 회피할 생각도 없습니다.”
기세가 오른 발산도군이 호통 쳤다.
“어떻게 책임을 지겠단 말이냐? 목이라도 내놓을 참이더냐?”
“그래서 사부들에게 피해를 당한 분들의 원한이 씻겨 진다면 기꺼이 그럴 각오입니다.”
“뭐라?”
“하지만 그런다고 사부들이 저지른 죄상을 만회할 수 없음을 압니다. 저는 평생 두 사부를 대신해 그들에게 희생당한 분들에게 속죄하며 사부들이 세상에 진 빚을 갚기 위해 혼신의……”
“닥쳐라, 이놈! 매끄러운 혓바닥이라고 잘도 놀리는구나. 어디서 되도 않는 궤변을 늘어놓는 게냐? 결국 나 몰라라 하겠다는 소리가 아니더냐?”
진천은 발산도군을 무시하고 청운도군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제 사문에 관한 정보는 저 자신이 제공했습니다. 아마도 지난 달 말에 상운으로부터 특급으로 분류된 첩지가 귀측에 무상으로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제 부탁을 받은 상운의 인사가 행한 일입니다.”
청운도군은 잠시 진천이 주장하는 바의 의미를 헤아렸다.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의 실행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어차피 들통 날 일이니 선수를 치자는 심산이었을 가능성이 더 클 듯싶구나. 남천도왕에게 코뚜레를 뚫리지 않으려고 말이다.”
“타당한 지적이십니다. 하지만 제가 염려한 건 남천도왕보다는 삼보장과 제 고향의 친인들이었습니다. 설령 그들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아니더라도 저는 강호에 나오며 언젠가는 제 사문에 대해 사실대로 밝히고 용서를 구할 작정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이름이 과하게 알려지는 바람에 예정했던 것보다 빨라졌을 뿐 감출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삼보장의 친인들이나 권왕 어르신께는 처음부터 진실을 털어놓았던 것입니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게냐?”
“한 달 보름 전부터 인연을 맺은 상운의 문통을 통해 제 사부들에게 피해를 입으신 분들에 대해 알아보고 있습니다. 강호에 귀도마의로 알려진 이사부에 의해 도난 피해를 당한 스무 곳의 상가(商家)에 대한 배상금은 이미 지불했습니다. 그가 일으킨 전염병으로 인해 희생당한 분들에 대해서는 넋을 위로해 드리고자 삼보장주 노 대인의 선업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발산도군이 이죽거렸다.
“구차스런 놈이로다. 그런다고 죽은 자들이 돌아오느냐? 목숨에는 목숨으로 갚아야 하는 법. 군소리 할 것 없이 네놈 목을…….”
청운도군이 육촌 아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더 들어보자, 병완. 이 문제는 나에게 맡겨두기로 하지 않았느냐?”
진천을 보다 사납게 몰아붙이지 않는 청운도군의 처사가 불만이었지만 발산도군은 약속한 바가 있는지라 입을 다물었다.
진천은 발산도군의 언술이 역겨웠다.
그 역시 이십여 년 전에는 정맹의 수뇌부 중 일인이었다. 전염병을 빌미로 천민들을 모조리 태워 죽이기로 결정했을 때 정맹의 용좌 위 원로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만장일치로 승인했었다. 그 참혹한 비극에는 그들의 책임도 적지 않았다.
천민들을 파리 목숨 취급했던 인사가 이제 와서 목숨 대 목숨 운운하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었다. 하지만 진천은 발산도군과 진흙탕 싸움을 벌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잔살광마로 알려진 이는 제 일사부입니다. 그에게 희생당한 분들의 친지를 찾아 사죄하고 보상하고 싶지만 오래 전 일이고 대부분 연고가 없는 분들이었던 탓에 쉽지 않더군요. 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것과 별개로 저는 일사부가 세상에 남긴 빚을 저만의 방식으로 갚을 작정입니다.
“너만의 방식이라니?”
“일사부는 사도(邪道)를 걸었습니다. 그의 살행은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가 되지 않는 범죄입니다. 저는 일사부와 같은 사마의 무리를 계도하여 일사부가 진 빚을 조금이나마…….”
발산도군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협객 놀이를 하겠다는 게군. 저런 개소리를 더 들을 것 있소, 형? 당장 목을 쳐 잔귀쌍마에게 살해당한 자들의 원혼을…….”
청운도군이 발산도군을 엄히 꾸짖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지 말라고 그렇게 타일렀거늘. 아무리 병이라지만 구십이 넘도록 그 모양이면 창피하지도 않으냐?”
발산도군이 반발하기 전에 청운도군이 말을 이었다.
“저 아이는 저자와 단 둘이서 왔다. 그래도 모르겠느냐? 우리가 자신의 사승을 알고 있음을 알면서도 방수를 두르지 않고 왔단 말이다. 정히 악인들의 후예를 처단하고 싶거들랑 너 혼자 해보려무나. 말리지 않을 테니. 하지만 저 아이를 잡으려다 네가 뜻을 이루기는커녕 되레 곤경에 처하더라도 나에게 손을 벌리지는 마라. 네 뒤치다꺼리도 이제 지긋지긋하다.”
여느 때와 달리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하는 청운도군의 기세에 발산도군은 기가 꺾였다.
“나는 저놈이 아니라 저 요괴와 싸우러 왔잖소. 저놈은 사전에 정한 대로 형에게 맡기겠소.”
발산도군을 제압한 청운도군이 진천에게 눈을 돌렸다.
“발산의 말이 맞다. 오늘 이 자리는 네 문제를 따지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더욱이 여기 우리에겐 그럴 자격도 없다. 뒷방에 물러앉은 지 오래이니. 너는 향후 정맹의 현 수뇌부와 상대하게 될 게다. 그들에게 네 언변이 통할는지는 모르겠으나 쉽지는 않을 터. 충고하건대 무조건 자세를 낮추거라. 특히 강 맹주 앞에서 권왕을 들먹이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권왕은 네 안전막이 되어주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맹주의 심기를 건드려 위험을 자초할 공산이 크다.”
진천은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르신.”
허 노야의 악평에도 불구하고 진천은 청운도군이 마음에 들었다. 삼보장 무인들의 숫자에 맞춰 발산도군을 포함해 다섯 명만 대동한 처사도 인정할 만했다. 청운도군은 최소한의 참관인만 두자던 전날의 제안을 스스로 지킨 것이었다.
“이제 예정했던 행사를 치르자꾸나. 당사자들이 대결을 멈출 때까지 아무도 관여할 수 없다. 이점 양지하기 바란다.”
비무가 아니라 생사결로 하자는 말이었다. 진천은 협의를 하고 싶었지만 소용이 없을 것을 알았기에 순순히 수용했다.
“알겠습니다.”
마령 문가의 도호들과 진천이 멀찌감치 물러났다. 삼사 장의 거리를 격하고 선 가린과 발산도군이 서로에게 흉포한 기운을 분출했다. 발산도군이 발도함과 동시에 가린이 괴성을 토해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로써 공히 일백 년 어림을 산 인간과 인면요괴 간의 생과 사를 건 일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