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17
제116화
진천은 가린을 믿었지만 불안을 떨치기 어려웠다.
단순히 무력의 높낮이로 승패와 생사가 판가름될 싸움이 아니었다. 오늘의 일전은 머리싸움이기도 했다.
마령 문가에서 날짜만이 아니라 시각도 특정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가린의 습성에 대해 파악했음에 틀림없었다.
가린은 더위는 개의치 않지만 햇빛은 극도로 꺼렸다. 그가 주안까지 오는 동안, 그리고 삼보장에 온 이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까닭은 일출과 일몰 사이에는 으슥한 곳에 몸을 감추고 움직이지 않아서였다. 지하연무장이 완공되자 아예 거기에 굴을 파고 들어앉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가린의 말에 따르면 그의 갑피는 햇볕에 노출될 시 심하게 따끔거린다고 했다. 운신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지만 워낙 오랫동안 습관으로 굳어진 탓에 가린은 사람이 소나기를 피하듯 해를 피했다.
구인결에서는 마침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전투력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오늘처럼 태양이 머리 바로 위에서 이글거리는 한낮에는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마령 문가에서 책사 역할을 하는 이는 가린의 이러한 특성을 알아내고 일광이 가장 강한 미시를 대결의 시간으로 정한 것이었다.
진천은 마령 문가의 노림수를 역으로 이용했다. 지난 삼 일 동안 진천은 수시로 가린에게 비무 개시 전에 취할 행동에 대해 숙지시켰다. 그의 지시에 따라 가린은 마차에서 내린 후 계속 팔다리를 긁고 땅바닥을 파 흙을 제 몸에 끼얹으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연기만은 아니었기에 청운도군을 비롯한 마령 문가의 도호들은 속는 기색이었다.
진천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 발산도군의 얼굴에서 꼼수가 통했음을 알았다. 그는 가린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리라 보고 있을 터였다. 가린의 무위와 전투 방식을 철저히 분석했을 테니 승리를 자신하고 있음에 분명했다.
물론 발산도군의 방심을 끌어낸 정도로는 가린의 우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미미한 변수에 불과했다. 생존의 관건은 작전의 수행 여부였다. 진천은 가린이 실전의 흥분으로 인해 계획했던 바를 망각하고 폭주하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초장부터 강기를 두른 발산도군의 반월도가 가린의 동체를 횡으로 갈랐다.
맹렬하게 달려들었던 가린은 황급히 자세를 낮추었다. 발산도군의 칼이 아슬아슬하게 가린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칼에 담긴 가공스러운 경기에 가린이 휘청거렸다.
발산도군은 왼쪽으로 돌아갔던 칼을 사선으로 휘둘러 가린을 통째로 베어갔다. 가린은 물러서지 않고 몸통으로 발산도군을 치받음으로써 반격했다. 발산도군은 동귀어진을 피해 측보를 밟았다. 그의 몸은 가린에게서 떨어졌지만 칼은 강기를 뻗어내며 가린의 옆구리에 일격을 가했다.
갑피가 찢겨 피분수를 쏟아낸 가린이 재빨리 바닥을 굴렀다. 발산도군의 후속 공격이 가린의 발에 걸렸다. 발목이 절단되는 참사는 모면했지만 가린의 기동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진천은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허리의 부상은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종아리를 베인 것은 치명적이었다. 발을 이용하지 못하면 애써 짜두었던 전술이 무용지물이 될 판이었다.
진천은 가린에게 치고 빠지기를 주문했다. 기실 ‘치기’는 위장이었다. 주 목적은 어디까지나 ‘빠지기’였다.
발산도군과의 정면 승부는 양자의 공멸로 끝날 공산이 다분했다. 가린도 살고 발산도군도 무사할 방도를 고민한 진천은 가린의 상대적 우위를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지난 몇 달 간 가린이 거둔 최고의 성취는 강약조절의 묘와 신법의 터득이었다. 진천은 가린의 경이적인 빠르기와 지치지 않는 체력이 그와 발산도군을 살릴 구명줄이 되어 줄 것을 기대했다.
전날 파혼도가 그의 도강(刀鋼)을 두려워 해 달아나던 가린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퇴로를 막은 방책 덕분이었다. 하지만 무연곡은 만수보 마당보다 열 배 이상 넓었다. 가린이 발산도군의 강기에 걸리지 않고 장기전으로 유도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진천이 무연곡을 대결 장소로 고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진천이 가린에게 주문한 내용은 그가 소중걸과의 비무를 대비하며 구상하고 실행했던 바와 기본적으로 동일했다. 강기의 구사에는 막대한 공력이 소요되었다. 전성기가 지난 발산도군은 일다경 이상 도강을 유지하지 못할 공산이 컸다. 가린이 끊임없이 치고 빠지며 그를 자극하면 그보다 일찍 탈진할 수도 있었다. 내력이 소진된 발산도군은 여전히 팔팔할 가린의 상대가 되기 어려웠다. 가린은 손쉽게 발산도군을 제압해 승리를 챙길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첫 공방전에서 가린이 후퇴 대신 충돌을 고집하는 바람에 만사가 비틀렸다. 다리를 다친 가린은 발산도군의 사냥감에 불과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가린을 바라보며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발산도군을 잡으려고 가린이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노련한 발산도군은 그에게 허점을 보이지 않고 원래 가린의 전략이었던 치고 빠지기를 능숙하게 수행했다. 가린의 몸에 칼을 박았다가 그의 손에 걸리는 날엔 파혼도의 신세가 될 것이 뻔했기에 발산도군은 도강으로 가린을 쑤시기만 할 뿐 절대로 틈을 주지 않았다. 수십 군데를 찔려 피투성이가 된 가린이 광포하게 날뛰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발산도군은 더욱 냉정해졌다.
발산도군의 반월도에 난도질당하는 가린의 모습을 보다 못한 진천이 소리쳤다.
“그만 하십시오! 승부는 이미 끝났습니다.”
마령 문가의 도호들이 일제히 칼을 뽑았다. 그들 중 한 명이 진천에게 맞고함을 질렀다.
“방해하지 마라!”
그의 말을 무시하고 가린에게 달려가려던 진천은 멈칫거렸다. 그의 개입으로 국면에 변화가 생겼음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내공이 담긴 진천의 외침에 발산도군의 파상공세가 찰나지간 느슨해지자 가린은 그에게서 몸을 돌려 진천이 선 곳으로 도망쳤다.
“갈(喝)!”
사자후를 내지른 발산도군이 공중으로 도약하며 가린의 두부를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일순 시간이 멎은 듯했다. 도강을 두른 발산도군의 칼이 가린의 정수리에 닿기 직전의 장면에서 진천은 기시감과 더불어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시간이 풀리면 가린의 동체가 두 동강 난 참상이 눈앞에 펼쳐지겠지만 왠지 그럴 것 같지 않아서였다.
진천의 직감대로였다. 발산도군이 전력을 다해 내리친 반월도는 가린의 머리 대신 그의 어깨를 갈랐다. 그와 동시에 상체를 회전했던 가린의 손에 발산도군의 목이 걸렸다. 마령 문가 진영에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가린은 발산도군을 땅에 박았다. 발산도군의 면상이 뭉개졌다. 가린에게 쇄도하던 다섯 도호가 멈춰 섰다. 혼절한 발산도군을 들어 올린 가린이 그의 무릎을 꺾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가린의 조치를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로 간주한 마령 문가 도호들이 주춤거렸다.
다음 순간 가린이 아무도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인질로 삼아야 할 발산도군을 마령 문가의 도호들에게 집어던진 것이었다. 청운도군이 그를 받아들자 다른 네 도호가 가린에게 짓쳐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풀썩 쓰러진 가린에게 이르기 전에 진천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비켜라. 그러지 않으면 너도 죽이겠다.”
전날 삼보장에서 진천과 언쟁을 벌였던 칼자국 노인이 위협했다. 진천은 그의 위협에 굴하는 대신 절멸도를 꺼내들었다. 그의 좌수에서 길쭉한 고드름이 돋아나자 분위기가 한층 살벌해졌다.
“가린을 내 줄 순 없습니다.”
일촉즉발의 순간 청운도군의 침중한 음성이 성난 마령 문가 도호들의 돌진을 제지했다.
“그만. 돌아들 와라.”
칼자국 노인이 반발했다.
“안 됩니다, 형님. 이대로 저들을 보낸다면 가문의 위신이…….”
“이제는 너마저도 나를 우습게 여기는 게냐, 병진(炳進).”
“……형님.”
칼자국 노인이 진천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다시 볼 날이 있을 것이다.”
진천은 대꾸를 주지 않고 묵묵히 그를 응시했다. 진천과 짧은 눈싸움을 벌인 칼자국 노인이 돌아서자 나머지 세 노인도 그를 따랐다. 그들이 멀어지자 진천은 가린에게로 갔다.
어깨에서 아랫배까지 쪼개진 가린의 끔찍한 모습에 진천은 가슴이 쓰렸다.
“많이 다쳤구나, 가린. 이제 집에 가자.”
진천이 그의 몸무게의 다섯 배는 나감직한 가린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가린이 나직이 말했다.
“가린은, 미안하다.”
진천은 그가 무엇에 대해 미안해하는지 알았다.
“그래, 가린. 다음엔 간 떨어지게 하지 마.”
가린을 안아든 진천이 마령 문가 진영을 일별하고는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마차에 거의 이르렀을 때 가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가린은, 고맙다.”
진천은 응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가린을 마차 안에 넣은 진천은 마부석에 올랐다. 그러고는 마차를 몰기 전에 멀리서 그를 보고 있는 청운도군과 시선을 맞추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숙였다. 진천은 오늘 그에게 진 신세를 잊지 않을 작정이었다.
피 칠갑을 한 가린을 안은 탓에 피투성이가 되었던 진천은 삼보장으로 직행하지 않고 무연곡에서 이백 장가량 떨어진 곳에서 마차를 세웠다. 그나마 수목이 우거진 곳이었다.
가린을 꺼내 그늘에 눕힌 진천은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 세 시진 남짓 그를 지켜보며 진천은 혀를 내둘렀다. 금방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중상을 당했으나 가린은 의식을 잃지 않았고 세로로 갈려 두 쪽으로 나뉘었던 상체는 서로를 잡아당기듯 붙고 있었다. 전신에 가득했던 도상(刀傷)들 중 얕은 것들은 벌써 아물어가는 중이었다.
마침내 해가 저물고 들판에 어둠이 깔리자 진천은 마차로 돌아갔다. 놀랍게도 가린은 진천의 어깨를 짚긴 했지만 제 발로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마차를 출발시켰던 진천은 얼마 가지 않아 말들을 멈춰 세웠다. 벌판 저편에서 세 개의 인영이 접근하고 있었다. 진천은 그들을 불렀다.
“여깁니다.”
그림자들이 마차를 향해 달려왔다. 진천의 예상대로 여상구와 대웅, 그리고 고량이었다.
“어떻게 됐는가, 아우님? 가린은 괜찮겠지? 왜 이렇게 늦었는가? 아니, 아우님 몸이 왜 그런가? 설마 문가의 칼잡이들과…….”
연달아 질문을 퍼붓던 여상구가 피로 물든 진천의 옷을 보더니 눈이 튀어나올 듯 놀랐다. 진천은 의형의 말을 끊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저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형님. 가린도 무사합니다.”
“아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승전보를 들고 아우님이 귀환할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오지 않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는가? 여기 지리를 몰라 북운상단에 가서 길잡이를 구하려고 하다가 마침 삼보장으로 돌아오던 금강권과 저자에서 만나 바로 달려오는 길일세.”
“걱정을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가린이 부상이 심해 좀 쉬느라 지체했습니다.”
마차를 열어본 여상구가 가린의 몰골을 보고는 이마주름을 접었다.
“엄청난 혈전이었군. 가린이 이 모양이면 그 늙은이는 골로 갔겠구먼.”
“아닙니다. 다리가 부러지고 얼굴이 뭉개지긴 했으나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그럼 양패구상이었단 말인가?”
“가면서 자세히 말씀드리지요.”
진천의 말에 여상구 등은 마차 위에 올라갔다. 마차 안은 가린 하나로도 꽉 찼기에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바로 내려와야 했다. 말들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끌어야 할 짐이 갑자기 무거워져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두 마리 노마를 달랜 진천은 아예 고량에게 마차를 맡기곤 여상구와 함께 경신을 전개하기로 했다. 말들은 뼈 밖에 없는 대웅의 무게 정도는 참아줄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