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19
제118화
노을이 깔렸다.
산등성이에 오르자 너른 평야가 보였다. 수백만의 인구를 먹여 살린다는 명성을 가진 오양만답(五陽萬畓)일 터였다.
“허, 넓기도 하구먼. 저게 다 논이란 말인가.”
여상구가 감상을 내뱉었다.
오양은 일백만 평의 기름진 땅에 강우량과 양광이 풍족해 중원에서 으뜸가는 곡창지대로 꼽혔다. 과거 왕국들이 중원을 분할하던 시기에는 오양을 차지한 나라가 천하의 주인이라는 속설이 있었다고 전해질 만큼 요처이기도 했다.
십삼사 만을 헤아리는 오양 백성들의 절대다수는 농민들과 그들의 식솔들이었다. 오양에서 태어나면 평생 배를 곯을 일은 없으니 부침을 거듭하는 왕후장상의 영화도 부럽지 않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양민들은 요 몇 달 새 한줌도 안 되는 악인들의 통치에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천지문을 멸하고 오양을 차지한 마련 장마류의 마인들이 그들을 노예로 삼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넉 달 동안 처와 여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저항하던 이들이 부지기수로 죽어나갔다. 정보가 엄격히 통제되어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일천을 상회하리라는 데는 정보조직들 사이에서 이견이 없었다.
부드러운 황혼의 햇살을 받아 고즈넉하게만 보이는 평야를 내려다보던 여상구가 진천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우님이 살인을 극도로 꺼린다는 것을 아네만 이 우형이 오늘 살계(殺戒)를 어기더라도 너무 나무라지 말게나.”
진천의 반응이 나오기도 전에 고량이 한 마디를 얹었다.
“그자는 내 몫이다.”
모두들 고량이 말하는 ‘그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자’는 그의 살부지수(殺父之讐)인 혈영장 남진이었다. 남진은 지난 수십 년 간 수시로 마련을 벗어나 중립지대를 횡행하며 수백 명을 살해했다고 알려진 마두(魔頭)였다.
진천은 고량에게 먼저 답을 주었다.
“그를 죽이는 건 상관없소. 하지만 고 형 혼자 싸우려 들어서는 안 되오. 반드시 나와 함께 해야 하오.”
고량이 면상을 우그러뜨렸다. 그러면서도 진천의 지시를 수용했다.
“알았다. 하지만 그자의 목줄을 끊는 건 나에게 맡겨다오.”
“물론이오.”
고량의 문제를 처리한 진천이 여상구에게 시선을 옮겼다.
“홍백의(紅白衣)를 입은 자들만 처단하는 걸 잊지 마십시오, 형님.”
마지막까지 허락을 유보하던 진천이 한 발 양보하자 여상구는 희색이 만연했다.
“여부가 있겠는가. 흰 놈들은 시시하니 나는 빨간 옷을 입은 놈들만 골라 염왕에게 보내주겠네. 두 명이라고 했지? 가린과 내가 하나씩 목을 날려버리면 되겠구먼.”
진천이 고개를 저었다.
“가린은 저와 한 약속이 있습니다, 형님.”
가린이 불만인 듯 진천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일행의 우두머리에게 반기를 들지는 않았다.
진천이 대웅에게 눈을 돌렸다.
“어떡할래, 대웅?”
삼보장에 남아있으라는 진천의 권고를 뿌리치고 자기도 참여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대웅은 싸움이 임박하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떡하지, 천?”
대웅의 반문에 진천은 냉정하게 응답했다.
“네가 결정해라, 대웅. 오양 외곽의 마졸들을 처리할지. 아니면 우리와 함께 갈지.”
대웅이 우물쭈물하자 여상구가 그를 부추겼다.
“자네 무력에 이류도 안 되는 조무래기들을 패고 다녀서야 창피한 노릇이 아닌가. 우리를 따라 본진으로 쳐들어가세. 뭐, 약간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아우님이 어련히 돌봐주겠는가.”
대웅이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천이에게 짐이 되지는 않을…….”
“쉿!”
진천이 주의를 주었다. 대웅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해, 천. 나도 모르게 그만.”
“괜찮다, 대웅. 그보다 어서 정하려무나. 이제 곧 해가 떨어질 테니.”
망설이던 대웅은 진천이 예상한 답을 내뱉었다.
“너하고 같이 간다.”
진천이 대웅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 우선은 관망하다가 혹시라도 난전이 발생하면 어려움에 처한 동료를 도와라. 그게 네 임무다.”
“알았어. 나한테 맡겨 둬.”
말은 그렇게 했지만 대웅이 미덥지 못하게 다리를 후들거렸다. 다들 못 본 척했다.
진천은 마련 장마류의 분타로 변한 천지문에 홀로 잠입했다.
오재승이 가져온 정보에 따르면 지금까지 오양에 들어온 마인들은 사백 명 남짓했다. 그중 대다수는 오양 외곽에서 민초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마졸들이었고 천지문에 똬리를 튼 삼십 명에서 사십 명 사이의 마인들이 수뇌부였다. 진천은 그 중 스물아홉 명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다행히 마인들은 의복의 색깔로 등급을 구분하는 모양이었다. 최상위의 마인들은 홍의(紅衣)를 착용했고 그 아래로는 각각 백의(白衣)와 청의(靑衣)가 있었다. 상운에서 확인한 바로는 홍의인은 둘이었고 무력은 초절정의 초입이나 하(下) 정도로 전해졌다. 가린과 격전을 펼쳤던 파혼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신뢰할 수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진천은 마두들이 의형인 여상구에 필적하는 무위의 소유자들일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 전략을 짰다.
백의마인은 열 두엇 정도였다. 그들 가운데 절반인 대여섯이 절정으로 분류되었다. 그들만으로도 웬만한 방파는 하루아침에 쓸어버리고도 남을 막강한 전력이었다. 하지만 상운에서 파악한 정보가 틀리지 않았다면 세평회의 전력이 우세했다. 전면전으로 붙어도 승산은 팔 할이 넘었다.
그럼에도 진천은 단독 기습을 선택했다.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진천은 발각될 때까지 최대한 많은 마인들을 제압할 계획이었다. 소란이 벌어지고 그가 적들에게 포위를 당하면 천지문 바깥에서 대기하던 친인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그들을 일망타진 한다는 것이 작전의 기본 골격이었다.
정문의 경비들을 피해 담을 넘은 진천은 천지문 경내로 스며들었다.
이십 보 간격으로 등이 걸려 천지문 안은 대낮처럼 환했다. 불빛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로 이동하던 진천은 그를 이끄는 소리를 따라 화려한 황금전각 쪽으로 향했다. 후면에서 거미처럼 벽을 타고 전각의 지붕으로 올라간 진천은 바짝 엎드려 아래를 살폈다.
그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광경이 그대로 펼쳐져있었다. 너른 마당에 수십 명의 남녀가 사굴(蛇窟)의 뱀들처럼 뒤엉켜 질펀한 난장을 벌이는 중이었다. 여인들은 예외 없이 알몸이었고 사내들도 거의 전라상태였다. 열린 공간임에도 독한 술 냄새가 진동했고 일부는 중인환시리에 열락의 신음성을 토해내며 정사를 치르고 있었다.
진천은 당혹스러웠다. 시야에 들어온 민망한 장면 때문이 아니라 다들 옷을 벗고 있으니 누가 홍의마인이고 누가 백의마인인지 구별하기가 난망해서였다.
잠시 관망하던 진천은 지붕을 내려갔다. 다른 전각들 주변을 돌아다니며 내부를 탐지한 진천은 천지문 내의 마인들이 아까 보았던 주지육림의 광장에 모여 있음을 알아냈다. 전각마다 꽤 많은 사람들의 기척이 잡혔지만 무인으로 짐작되는 기운은 하나도 없었다.
다시 황금전각의 지붕으로 돌아간 진천은 마인들의 숫자를 세었다. 스물여섯에 이르렀던 진천은 열 명가량을 남기고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설 뻔했다. 방금 방사를 끝낸 마인 하나가 별미일 거라 기대했는데 입맛만 버렸다며 그의 밑에 깔려있던 여인의 두부(頭部)를 내리쳐 두부(豆腐)처럼 뭉개버리는 광경을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돌발 사태에 놀란 여인들 중 몇몇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이번엔 그녀들을 떡 주무르듯 농락하고 있던 마인들이 시끄럽다며 그녀들의 머리를 부수었다. 공포에 질린 여인들이 벌벌 떨자 더위를 날려줬으니 육덕(肉德)으로 갚으라며 마인들이 낄낄거렸다.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진천이었으나 마인들의 천인공노할 작태에는 걷잡을 수 없는 분기가 솟구쳤다.
당장이라도 내려가 무고한 여인들을 살해한 마인들을 응징하고 싶었지만 진천은 자중했다. 살아있는 여인들이 경기에 휩쓸려 희생당할 우려 때문이었다.
간신히 노기를 억누른 진천은 지붕 뒤편으로 물러났다. 아래로 내려간 후 마인들 몇 명에게 철구를 날린 후 다른 마인들을 광장의 반대편으로 유인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진천은 바로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지붕 너머에서 걸걸한 목소리 하나가 넘어왔기 때문이었다.
“흥이 식었다. 판을 갈자.”
무슨 소리인지 깨달은 진천은 소름이 돋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최초로 여인을 죽인 적발(赤髮) 노인임에 틀림없었다. 아마도 그가 천지문에 들어앉은 장마류 마인들의 수괴(首魁)일 터였다.
‘판을 갈자’라는 말은 남은 여인들을 해치고 다른 여인들을 데려와 새로운 난장을 펼치겠다는 의미임에 분명했다. 다급히 지붕 위로 몸을 날린 진천은 자신의 짐작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마인들이 일제히 팔을 치켜들고 있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지붕에서 뛰어내리며 진천이 사자후를 터뜨렸다.
“멈춰라!”
느닷없는 천둥소리에 놀라 마인들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의 머리 위로 시커먼 우박이 쏟아지고 있었다. 진천이 날린 철구(鐵球)의 소나기였다.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지만 진천은 여인들이 다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겨냥했다. 그 탓에 삼십여 개의 철구를 날렸으나 쓰러진 마인들은 서넛에 불과했다. 그러나 진천이 마인들의 주목을 끈 동안 사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여인들은 너도나도 황금전각 쪽으로 달아났다.
마인들은 여인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진천이 착지하기도 전에 다시 철구를 날려 여섯을 쓰러뜨렸기 때문이었다. 여인들을 무사히 대피시켰으나 진천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의 발이 땅에 닿기 직전 네 줄기 강맹한 장공이 그를 덮쳤다. 비환을 펼쳐 빗겨냈으나 넷 중 하나가 그의 좌견(左肩)에 걸렸다. 진천은 여인들에게 여파가 미칠까 봐 한 방향을 비워놓아야 했다.
장공에 스쳤을 뿐인데도 어깨가 뜯겨져나간 듯한 격통이 올라왔다. 강기가 서려있었다는 뜻이었다. 이를 악문 진천은 그를 공격했던 자들 중 적발의 노인에게 반격을 가했다. 진천의 손끝에서 발출된 절멸비가 적발노인의 복부로 날아갔다. 헛바람을 들이켠 적발노인이 상승의 보법을 현시하며 절멸비를 옆구리로 흘려냈다. 진천은 그 한 수로 적발노인의 무위가 초절정의 중(中) 이상임을 알았다. 그는 여상구나 가린도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운 강자였다.
진천은 그에게 불어 닥친 장공의 폭풍을 피해 담벼락으로 붙었다. 그를 궁지로 몰아넣었다고 여긴 마인들이 물 샐 틈 없는 포위망을 구축했다. 적발노인이 뒤늦게 물었다.
“웬 놈이냐?”
진천은 대답 대신 철구를 뿌렸다. 절정 이하의 마인들은 그의 암기를 피해내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일수에 일곱의 무릎을 작살낸 진천은 적발노인을 필두로 그에게 맹공을 퍼붓는 적진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장공의 태풍을 통과해 돌진해오는 진천의 환상적인 신법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진천은 부상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친인들이 당도하기 전에 적발노인을 무력화시킬 작심이었다. 그를 설치도록 내버려 둔다면 중과부적에 처할 우려가 컸다. 철구로 열을 쓰러뜨렸으나 적은 아직 서른에 가까웠다. 대웅의 참전이 불확실하기에 이쪽은 네 명이라고 보아야 했다. 진천은 친인들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팔영보를 극성으로 전개한 진천은 적발노인의 전면에 이르렀다. 장공들의 그물에 실린 경력에 기혈이 격탕되었으나 절멸도를 뽑아든 진천은 갈지자로 휘둘렀다. 현란한 몸놀림으로 진천의 공격을 무마시키던 적발노인이 일순간 경악성을 토해냈다. 진천의 좌수에서 뻗어 나온 고드름이 갑자기 한 자나 길어지며 그의 왼 팔뚝과 오른 손목을 갈랐기 때문이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진천은 미련 없이 물러섰다. 강적은 적발노인 하나만이 아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산발한 자의 장공도 적중당하면 즉사를 면치 못할 위력을 담고 있었다.
적발노인을 전투불능으로 만든 진천에게 십여 줄기의 장공이 고래를 공격하는 어부들의 작살처럼 날아왔다. 일견 진천의 동체가 고슴도치가 된 듯이 보였다. 하지만 작살들이 꿰뚫은 건 그의 진체가 아니라 환영이었다.
“저 자는 하남신룡이다!”
마인들 중 누군가 진천의 정체를 밝혔다. 그의 눈썰미는 중인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는 도움을 주었지만 전세에는 별반 보탬이 되지 못했다.
산발마인을 두 번째 목표물로 삼은 진천이 그에게 쇄도하며 외쳤다.
“모조리 쓸어버려!”
진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마인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사이 허공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