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2
제11화
방금 말했듯 나는 그녀와 부부지연을 맺었으나 육체적 합일을 하지는 않았소.
그렇다고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말은 아니오. 그녀는 이전보다 더 냉랭해졌고 전에 없이 표독스러워졌소.
그렇게 될 줄 몰랐느냐고? 물론 그럴 거라 짐작은 했소. 하지만 나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소. 사람은 특별한 계기가 있으면 한순간에 완전히 바뀌기도 하는 법이니.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사련(邪戀)에 눈멀고 귀먹은 상태였소.
그녀가 나와 혼인한 건 순전히 의형에 대한 복수심의 발로였소. 그가 조금이나마 괴로워하기를 바랐던 거요. 그녀의 뜻대로 되었는지는 모르겠소. 속이야 어떻든 의형은 겉으로는 우리의 결합을 쌍수를 들고 환영했으니까.
그녀는 의형 일가와 함께 살뿐더러 그와 같이 사업을 일구어야 한다고 주장했소. 물론 표면적으로는 항상 나의 의사임을 앞세웠소. 의형은 아무런 의심 없이 나의 청을 수락했소. 그때부터 노가장(盧家莊)은 삼보장으로 불렸소.
주안표국의 대표두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의형은 전심전력으로 나를 도왔소. 그가 합류한 이후 내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소. 나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주안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까 말까 하는 수준에서 일약 그 일대 최고의 거부로 성장했소. 그 무렵 오랫동안 소식을 알지 못했던 조 형이 마령 문가의 총관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던 기억이 나는구려.
나는 미친 듯이 사업 확장에 매달렸소. 물이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욕심으로 그랬던 건 아니었소. 나는 그런 식으로라도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싶었소. 외부에 비친 나는 상계의 떠오르는 별이었으나 집안에서의 나는 아내의 원망과 멸시를 견뎌야 하는 무기력하고 초라한 사내에 불과했소. 나는 늘 자괴감에 시달렸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난 재산의 일부를 풀어 선행을 시작한 것도 그러한 심사와 무관하지 않소. 혹시 기억나오, 조 형? 대주상단 시절 내가 훗날 부자가 되면 빈민 구휼에 아낌없이 돈을 쓰겠다고 지껄이곤 했던 걸. 기실 나는 젊은 날 품었던 포부를 오랫동안 망각하고 있었소. 그녀로 인한 공허감을 채울 알량한 속셈으로 묵은 꿈을 되살려 실행에 옮겼을 때 나는 적잖은 위안을 받았소. 그러면서 선업이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소.
그녀와는 이중적인 생활을 이어 갔소. 그녀는 철저하게 ‘원수와의 동거’라는 실상을 감추고 지아비에게 헌신적인 부인으로 스스로를 위장했소. 삼보장을 찾은 귀빈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정성 어린 대접에 감동하고 그녀의 우아한 기품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소. 조 형도 들었겠지만 삼보장의 진정한 보물은 주안일미라는 풍문이 나돌 정도였소.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로 보조를 맞춰 주어야 했소. 사업에 그녀의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오.
그녀는 신혼 시절 자기의 뜻에 따르지 않는다고 네 번이나 내 앞에서 손목을 그었소. 한 번은 정말 아찔했소. 출혈이 너무 심해 실제로 죽을 뻔했다오. 그때 알았소. 내가 그녀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음을.
나도 아오. 한없이 어리석고 어리석었음을. 하지만 미망에 빠져 있던 당시의 나는 그녀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었소. 그녀가 죽으면 나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었소. 조 형도 불이 뜨거운 줄 모르고 얼음물이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맹목적인 사랑을 경험해 보았다면 내 심정을……. 아, 그런 적이 없소? 부럽구려.
지금까지의 말만 들으면 내가 지옥에서 살았으리라고 생각할 테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소.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비참하면서도 황홀했소. 밤마다 침실에서 그녀가 저주를 퍼부을 때마다 죽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녀가 나와 같은 시공간에 머무른다는 사실에 전율하곤 했소.
그녀는 의형을 원망하기는 했지만 증오하지는 않았소. 그녀가 증오하는 대상은 나였소. 내가 끼어드는 바람에 의형이 자기를 버렸다고 확신한 탓이었소.
아주 틀린 판단은 아니었던 것 같소. 의형의 의중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내가 그녀를 만나기 전에 두 사람 사이에 어느 정도 남녀 간의 교감이 있었던 듯하니. 그러다 내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으니 의형으로서도 여간 난처하지 않았을 거요. 갈림길에 선 의형은 연정 대신 우정을 택했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절대로 그를 비난할 수 없소. 내가 죽일 놈이오.
미안하오. 나도 이토록 감정이 북받칠 줄은 몰랐소. 아니, 괜찮소. 계속하리다.
부부가 된 지 십 년이 넘었지만 나와 그녀 사이엔 당연히 아이가 없었소. 나는 막 오십 줄에 들어서고 나와는 띠동갑이니 그녀도 마흔에 가까워졌소.
외동인 데다 조실부모했던 탓에 혈육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나는 후세를 갖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나와 손끝만 스쳐도 경기를 일으키는 그녀의 거부감 때문에 언감생심 엄두를 내지 못했소. 그녀는 첩을 들이는 데 반대하지는 않았소. 그냥 관심 자체가 없었소. 나는 수차례나 흔들렸지만 끝내 다른 여인에게 손을 대지 않고 자존심을 지켰소.
그녀는 사실 자신의 자식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였소. 의형의 아들에게 지극한 정성을 쏟았으니. 형수보다 더 많이 그 아이를 안고 돌보았을 거요. 모르는 이들에겐 그녀가 친모고 형수는 보모로 보였을 게 틀림없소.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잖소. 철부지 시절엔 그녀를 더 따르던 의질은 십 대에 들어서며 확연히 형수에게 기울었소. 그 아이가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그녀는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소. 남들이 있을 땐 절대로 노출하지 않았던 나에 대한 적개심까지 가감 없이 표출할 만큼.
그러다 사건이 터졌소. 형수가 원인 모를 열병을 앓더니 급사한 것이었소. 그녀를 의심하지는 말길 바라오. 형수는 원래부터 병약한 사람이었고 자주 아팠소. 다소 급작스러운 느낌이 없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받아들일 만한 자연스러운 죽음이었소.
형수가 먼 길을 떠난 후 그녀는 어미를 여의고 상심한 의질을 극진히 보살폈소. 그런데 그 아이는 오히려 그녀를 더욱 멀리했소.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 했소. 아무리 애를 써도 ‘새끼 멧돼지’가 그녀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치받으며 밀어내니.
그즈음이었소. 그녀가 난데없이 잉태했음을 알린 건.
난데없다고 했지만 나는 그녀가 모종의 결심을 했음을 어렴풋이 눈치챘소. 그녀를 거부하지 않을, 그녀 자신의 아이를 가지기로 말이오.
내가 잡은 실마리를 시시콜콜히 늘어놓지는 않겠소. 다만 십여 년을 부대끼다 보면 비록 허울뿐인 부부일지라도 눈짓 하나, 말투 하나에서도 변화를 감지할 수 있음을 알아주길 바라오.
그녀가 시종들을 다 내보낸 안채로 의형을 불러 술자리를 가지라고 종용하던 그날 나는 그녀가 준비를 마쳤음을 직감했소. 정확히 뭔지는 몰랐으나 분명 무언가 있었소.
나는 시치미를 떼고 그녀의 분부대로 의형을 초대해 그와 대작했소. 탁주 서너 모금에 얼굴이 불콰해지며 횡설수설하는 나와는 달리 의형은 두주불사의 술고래이면서도 아무리 마셔도 언행에 흐트러짐이 없는 모범적인 주당이기도 했소. 그러나 그날은 달랐소. 채 두 병을 비우기도 전에 의형의 혀가 꼬이기 시작했소. 동공도 흐리멍덩해지고. 그와 교분을 나눈 이래로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소.
그녀가 들어온 것은 그때였소. 그녀는 첫 잔에 입술만 축인 나에게 음주를 강권했소. 그녀가 따라 주는 술을 여섯 잔이나 연거푸 들이켠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소. 깨어 보니 침실에 있더군. 나처럼 알몸이었던 그녀를 껴안고.
그로부터 석 달 후 그녀가 수태했음을 알렸소. 그리고 다시 반년 후 현아가 태어났소.
노미현(盧美賢).
내 딸아이의 이름이오. 어제 말했듯 의형에게 부탁해 얻은 이름이오. 예쁘지 않소? 얼굴은 더 예쁘다오.
현아의 탄생은 축복이었소. 모두가 만족했으니까.
나는 현아가 세상에 나온 날 그녀의 주문에서 풀려났소. 그녀에 대한 사랑은 온데간데없이 증발해 버리고 그 자리엔 딸에 대한 부성(父性)이 들어섰소. 사실 그녀를 향한 연정이 혐오로 바뀐 지는 오래되었소. 나 자신은 의식적으로 부정했지만.
현아의 출생과 함께 나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행복감에 젖었소. 그 아이의 모든 것이 경이로움이었소. 눈, 코, 입. 앙증맞은 미소. 현아가 꼼지락거리는 손으로 내 손가락을 잡기만 해도 전신의 털이 곤두섰소. 좋은 의미로 말이오.
그녀도 달라졌소. 현아에게 한없이 자애로웠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조차 부드러워졌소. 일이 년 전이었다면 감격에 겨웠겠지만 그때는 별반 감흥이 없었소. 외려 까닭 모를 분노가 솟구치곤 했소.
그제야 깨달았소.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내 심혼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그녀에게 앙갚음하고픈 욕망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음을.
가당찮게도 나는 내 아이의 친부이자 그녀의 유일무이한 연정의 대상인 의형에게도 원한을 품었소. 나는 죽어 마땅한 소인배요.
복수를 바로 실행에 옮긴 것은 아니었소.
나도 내 의형에 대한 원심(怨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음을 다스리려고 부단히 노력했소. 그러나 자랄수록 의형의 이목구비가 나오는 현아를 볼 때면 수양의 성과가 물거품으로 돌아갔소.
현아가 세 살이 되었을 때 내 속의 독초는 더 이상 제어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소. 뽑자마자 또 나고 다시 뽑으면 더 많이 났소.
그러다 결정적인 계기를 맞았소. 여느 여아들보다 말을 빨리 배우고 총명했던 현아가 어느 날 백부하고 자기 손이 닮았다고 종알거렸을 때 나는 간이 철렁했소. 의형은 검지가 중지만큼 기오. 기형적일 정도는 아니지만 눈여겨보면 뚜렷한 특징이 아닐 수 없소. 고량, 그 아이도 똑같은 손을 가지고 있소.
더 미루다간 현아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기이한 공포감에 사로잡힌 나는 광기에 젖었소. 나는 은밀히 의형을 불러 고민을 털어놓았소. 그녀와 단 한 번도 동침한 적이 없다는 나의 고백에 의형은 아연실색했소. 나는 그가 현아의 출생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도 품지 않고 있었다는 데 더 놀랐소.
그날 이후 우리는 반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소. 그가 지점들의 관리를 빌미 삼아 밖으로만 돌았기 때문이오.
내 예상과 달리 의형은 패륜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침묵했소. 그에게 자결을 강제할 수단이 없었기에 나는 속수무책이었소.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도 조금씩 이성이 돌아왔소. 만약 의형이 두어 달만 더 늦게 찾아왔더라면 모든 게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소.
몰라볼 정도로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나타난 의형은 부교(釜郊)로의 상행을 자청했소. 조 형은 당시 여기 창인에 은신해 있었을 테니 모르겠지만 부교는 평상시와 달리 매우 위험한 지역이었소. 고대 왕국의 보물이 매장된 비처가 기록되어 있다는 정보가 나돌아 마련(魔聯)의 마두들이 부교 인근의 한부평(漢符平)으로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오. 아직은 소문이 퍼지기 전이었지만 삼보장은 이미 특급 정보를 입수해 둔 상태였소.
나는 단박에 의형의 의도를 알아차렸소. 그가 죽을 자리를 골랐음을. 나는 기로에 섰소. 말릴 것인가 모른 척할 것인가.
의형은 우물쭈물하는 나를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갔소. 그러고는 바로 장원의 말썽꾼들만 추려 꾸린 소규모 상단을 이끌고 출발했소.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말을 타고 의형을 쫓았소. 주안 외곽에서 그를 따라잡은 나는 장주의 이름으로 상행을 중단하도록 명했소. 내 말을 따르는 대신 마혈과 아혈을 제압하고는 그가 내 귀에 속삭였소.
―미안하네, 노제(盧弟). 모든 게 다 내 불찰일세.
의형은 나를 근처 객잔의 객실에 데려다 놓고는 떠났소. 혈도가 풀린 후 나는 계속 그에게 사람을 보내 즉시 삼보장으로 돌아오라고 촉구했소. 의형은 내 요청을 수용하지 않았고 주안을 떠난 지 보름 후 한부평과 접한 구원산맥에서 혈영장 남진에게 변을 당하고 말았소. 비보를 받고서는 후회가 막심했지만 그때는 꿈에도 몰랐소. 그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비극의 시작이 될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