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20
제119화
높은 담장을 넘어 뛰어내리다 벌거벗은 마인들을 보고 당황해 하던 가린은 진천의 말을 듣고는 신이 났다.
끄어억.
괴성을 지른 가린이 마인들 사이로 헤집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팔을 휘두르자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무도 가린의 원시적인 공격을 막지 못했다.
가린에 이어 도착한 여상구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복색(服色)으로 살인의 대상을 구별해야 하는데 옷을 걸치고 있는 자들은 넷 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여인들이 입는 속곳이었다. 하지만 그도 진천의 외침을 들은 터라 주저 없이 부채에 강기를 두르곤 난장판에 뛰어들었다.
여상구로서는 진천이 ‘모조리 죽여 버려.’라고 명하지 않은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랬다면 천생살기를 마음껏 개방하고 마인들을 황천길로 보낼 수 있었을 터였다.
여상구는 마인들의 목을 치는 대신 사지를 잘랐다. 현장에 당도하자마자 진천의 작품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손목과 팔꿈치가 잘린 적발노인은 진천의 절멸도에 당했음에 틀림없었다. 가린의 우악스러운 수단으로는 남길 수 없는 솜씨였다. 진천이 팔을 잘랐으니 사지절단은 허용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금 늦게 담을 넘어 온 대웅은 비명과 피분수가 난무하는 아비규환의 참상에 낯빛이 새하얘졌다. 그러고는 도로 담벼락 위로 올라갔다. 그와 엇갈려 고량이 아래로 내려왔다.
한 눈에도 일방적인 우세임을 알 수 있었기에 고량은 참전하지 않고 마인들의 면면을 샅샅이 훑었다. 원수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를 그린 용모화가 뚫어질 만큼 보았기에 혈영장 남진의 얼굴은 심혼에 새겨져있었다. 하지만 워낙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기억에 각인된 면상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고량은 조급해졌다. 남아있는 마인들은 십여 명에 불과했다. 쓰러진 자들은 그 두 배가 넘었다. 혈영장은 이미 죽었을 지도 몰랐다.
초절정의 초입으로 추정되는 산발마인의 복부에 절멸도를 찔러 무공을 폐한 후 마인들의 도주를 차단하고 있던 진천이 고량에게 소리쳤다.
“고 형, 여기!”
고량의 고개가 퍼뜩 돌아갔다. 그의 시야에 진천을 뚫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백발노인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 자의 칼귀를 보자마자 누군지 알아차린 고량이 고함을 질렀다.
“거기 서라, 늙은이.”
남진은 고량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는 진천이 버티고 있고 양 옆으로는 여상구와 가린이 압축기처럼 조여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린이 등장한 지 반의반 각도 지나지 않아 난전은 종결되었다.
수십 방의 장공을 얻어맞았지만 가린은 끄떡도 없었다. 강기를 부릴 수 있는 적발노인과 산발마인을 진천이 처리했기에 그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여상구도 호신강기가 깨졌지만 본체는 무사했다. 그는 극미한 내상만 입었을 뿐이었다.
세평회의 피해가 사실상 전무한 반면 장마류 마인들은 몰살에 준하는 참패를 당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삼십여 마인들 중 죽은 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멀쩡한 이도 없었다. 장공을 발할 손들을 잃거나 단전이 깨졌기에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무력을 상실한 마인은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절망의 늪에 빠진 마인들이 내지르는 악다구니가 야밤의 적막을 찢어발겼다.
마인들 중 유일하게 서있는 남진의 동공에 자포자기의 빛이 떠올랐다. 이런 괴물들을 상대로 목숨을 부지하길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하남신룡의 위명은 진짜였다. 초절정의 고수인 무염장(霧染掌) 홍광(洪光)을 단칼에 베고 그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절호장(切濠掌) 지양준(池養俊)마저 일수에 쓰러뜨리다니. 칠백 년 장마류 역사상 최강의 무재로 평가받는 소중걸이라도 이기기 쉽지 않을 터였다.
청면패력괴(靑面覇力怪)와 태극마선(太極魔扇)의 무위 역시 전해지는 대로였다. 누구도 그들의 일초지적이 되지 못했다.
단 세 명에게 궤멸의 참화를 입은 장마류 호연파(湖沿派)는 이제 재기불능이 될 것이었다. 팔십 년 인생의 마지막이 자파 몰락의 최후 증인이라니 남진은 참담할 따름이었다. 오랫동안 억눌렀던 욕구를 이제야 풀 참이었는데 고작 백일 간의 꿈이었다니 허망하기도 했다.
생존의 희망을 버린 남진은 차라리 덤덤해졌다. 그러자 하남신룡의 출현 이후 마비되었던 이지가 돌아왔다. 대체 이 괴물들이 어째서 우리를 친 거지?
설마…….
설마!
저항을 단념한 채 팔을 늘어뜨렸던 남진은 그의 전면으로 달려와 하남신룡과 자리를 바꾼 장한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설마, 너는, 금강권?”
장한이 살벌한 안광을 폭사했다.
“잘 아는구나, 흉적. 선친의 혈채(血債)를 받으러 왔다.”
남진은 어이가 없었다. 설마 했는데 하찮기 이를 데 없었던 과거의 행사 때문에 이 사달이 벌어졌단 말인가.
넉 달 전 구인결에서 백도방의 용병으로 출전해 마령 문가의 도호들을 꺾음으로써 무림을 뒤흔든 삼보장의 괴물들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엄청난 충격을 받긴 했지만 머나먼 남의 나라 얘기였다. 그러다 안면이 있는 마련의 책사 조광우(趙光祐)가 묵월도에게 석패했다는 금강권이 그와 인연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과거사가 기억에 되살아났다.
고대 왕국의 보물이 매장되어 있다는 장보도에 속아 한부평으로 출동했을 때였다. 연이은 허탕에 울화통이 치미는 와중에 우연히 주안에서 왔다는 소규모 상단과 마주쳤다. 상단을 이끄는 자는 글쟁이들 마냥 고지식하게 생긴 중년의 권사(拳士)였는데 하잘것없는 무력과는 별개로 인상에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마치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이쪽이 마련 서열 일백 위권을 상징하는 백의외마(白衣外魔)임을 알면서도.
남진은 자살행위를 감행하는 불나방을 기꺼이 뭉개주었다. 그러고는 그 일을 뇌리에서 지웠다. 버러지들을 눌러 죽이는 일은 일상다반사였기에 일일이 기억하는 건 피곤한 짓이었다.
조광우에게서 금강권이 그날 구원산맥 끝자락의 야산에서 죽자고 덤벼들던 권객의 아들이란 사실을 전해들은 남진은 내심 찝찝했다. 묵월도와 대등하게 겨뤘다면 그에 비해서도 크게 하수가 아닐 터였다. 이제 삼십 대 중반이라니 십 년만 지나면 무위가 역전될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그보다 빠를 수도 있었다.
복수한답시고 설치는 종자들을 여럿 겪어보았지만 남진은 이번엔 간단치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대책을 세워야 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로 떠올릴 수 있는 대책이라야 뻔했다. 남진은 금강권과 상종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예전처럼 혼자 중립지대를 떠돌아다니지 않고 조신하게 동료들 곁에서 지내면 불상사는 없을 터였다. 간이 배 밖에 나오지 않고서야 금강권이 호랑이들이 득실대는 굴로 찾아올 리 만무했다.
자신의 묘안에 만족한 남진은 금강권을 심중에서 털어내었다. 목에 잠깐 걸렸던 가시에 신경 쓰기에는 즐겨야 할 산해진미가 너무 많았다.
남진은 기가 막혔다.
하도 황당해 올가미에 걸린 짐승처럼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이면서도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고작 네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고 저 괴물들을 끌고 와 살겁을 일으켰단 말이냐?”
남진의 질문에 대한 답은 고량이 아니라 여상구에게서 나왔다.
“눈이 삐뚤어졌나, 늙은이. 살겁이라니? 우리가 네놈들 같은 살귀들인 줄 아느냐? 둘러보아라. 내 아우님의 하해와 같은 은덕으로 명줄이 끊어진 악귀들은 하나도 없다. 가만, 그러고 보니 뭔가 불공평하군. 네 패거리는 숨통은 붙어있으되 다들 저 꼴인데 너만 멀쩡하면 저 마귀들이 우리 세평회의 공평무사(公平無私)함을 의심할 터. 그런 의미에서…….”
말끝을 흐린 여상구가 벼락처럼 태극선을 사선으로 그었다. 부채에서 발출된 낫 같은 탄강이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남진의 우수를 그었다. 어깻죽지에서 떨어져나간 그의 오른팔이 뭍에 끌려나온 생선처럼 펄떡거렸다.
여상구의 조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니야. 정말 공평하게 하려면 다들 똑같은 처지가 되도록 해 줘야지. 누구는 사지가 잘리고 누구는 단전이 깨졌으면 서로 불만일 테지? 귀찮지만 세평회의 기념비적인 첫 행사이니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어야겠군. 시끄럽게 구는 놈은 포를 떠서 소금에 절인 후 내일 햇빛에 말려주마.”
원성과 저주를 쏟아내던 마인들이 입을 다물었다.
소름끼치는 살기를 발산하며 양떼처럼 온순해진 마인들 사이로 들어간 여상구는 그들을 하나씩 붙잡고 꼼꼼하게 손을 봤다. 팔을 잘린 이들은 단전마저 파괴했고 단전이 망가졌던 자들은 양 손목을 베었다.
진천은 의형의 발광을 제지하지 않고 방관했다. 머리가 터져 몸통만 남은 여인들의 시신이 그로 하여금 마인들에 대한 구명의 의지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행여나 여상구가 혈영장에게 또 손을 댈까 봐 고량은 서둘렀다.
“아버님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겠다, 악적!”
자리를 박찬 고량이 여상구의 광란에 넋이 나가있던 남진에게 짓쳐들었다. 남진은 악에 받쳤다.
“미친놈들. 마련의…….”
협박을 하려던 남진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량을 상대해야 했다.
남진의 좌수에서 발출된 핏빛 장공이 우직하게 달려들던 고량을 덮쳤다. 고량은 얼음판에서 미끄러지는 사람처럼 뒤로 몸을 뉘이며 다리부터 들어갔다. 고량의 우족이 남진의 왼 무릎을 강타했다.
단 일합의 공방에 치명상을 입었으나 남진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백전노장답게 앞으로 고꾸라지면서도 고량의 면상에 장공을 쏟아낸 것이었다. 고량은 목을 꺾음으로써 아슬아슬하게 직격을 모면했다. 하지만 그의 좌면(左面)이 순식간에 피범벅이 되었다.
팽이처럼 몸을 돌려 일어선 고량은 남진의 뒤통수에 주먹을 내리쳤다. 부친 고숭의 성명절기였던 일권파암(一拳破巖)이었다. 두개골이 박살나고 뇌수가 터진 남진은 단말마의 비명조차 남기지 못하고 즉사했다. 평생 수백의 목숨을 앗으며 악명을 떨쳤던 마두치고는 너무나 허망한 종말이었다.
십오 년 만에 그의 우상이자 스승이었던 선친의 원수를 갚은 고량이 양팔을 벌리고는 상처 입은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던 진천이 달려가 고량의 상태를 살폈다. 왼쪽 귀가 떨어져나가고 턱이 부서진 듯했지만 천만다행히도 눈은 상하지 않았다. 장공의 경기가 반치만 더 옆으로 뻗었다면 고량은 독안(獨眼)의 권객이 되었을 터였다.
진천이 등을 두드리자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온몸으로 분출하고 있던 고량의 광기가 가라앉았다.
“추태를 부렸구나.”
“아니오. 그보다 어서 금창약(金瘡藥)이나 바르구려.”
고량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진천은 말없이 허리춤에서 작은 병을 꺼내 안에 든 진득한 약을 뜯겨져나간 고량의 귀 부위에 남김없이 발랐다. 고량 외에는 아무도 외상을 입지 않았기에 아낄 이유가 없었다. 쓰라림으로 미간을 모았을 뿐 고량은 진천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짝귀가 되었으니 차 소저가 놀리겠소.”
진천의 농담에 고량이 쓰게 웃었다.
고량에게 응급처치를 한 진천은 대웅을 챙기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대웅은 아직도 담장 위에 도둑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대웅을 부르려던 진천이 일순 처진 눈을 크게 떴다. 진천의 표정에 의아해진 고량도 대웅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그러고는 심장이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