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21
제120화
대웅의 위쪽 허공에 허연 그림자가 보름달처럼 떠 있었다.
보름달처럼 둥글었지만 달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냥 사람이 아니라 천하인들이 가장 만나기를 꺼리는 재앙 같은 인물이었다. 그가 장왕(掌王) 막우천(鄚宇天)이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음에도 진천 등이 바로 그의 정체를 알아본 것은 유명한 외관 덕분이었다. 장왕은 그의 주군이었던 무황과 동료였던 다른 삼왕이 그런 것처럼 누구라도 금방 식별할 수 있는 특이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무황 나중강을 대표하는 외형적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원숭이보다 긴 팔이었다. 그의 우수(右手)는 손끝이 무릎에 닿는 정도를 넘어 복숭아뼈까지 이르렀다.
전날 호야곡에서 그가 호련사성에 의해 시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강호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호련사성은 이미 난세십군을 능가하는 초절정 최상의 강자로 인정받았지만 무황은 초인시대 이후 삼백 년 만에 절대지경을 구현한 무존으로 평가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절대지경 하(下)의 무인이라도 능히 열 명의 초절정고수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당시 무황의 죽음을 의심하는 무림인들에게 호련사성이 내놓은 증거가 바로 그의 장비(長臂)였다. 훗날 권왕이라 불리게 되는 일권무적(一拳無敵) 태진광은 그의 주먹에 무황의 머리통이 박살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대신 팔을 공개한다는 변을 내놓았다. 그런 기형적인 팔을 갖고 있는 이가 무황 외에 달리 있을 리 만무하기에 강호는 그의 죽음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각자의 영역에서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 호련사성도 무황 만큼은 아니지만 다들 뚜렷한 신체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먼저 권왕 태진광은 난쟁이였다. 삼 척에 불과한 키에 몸집도 왜소한 일자 눈의 괴인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거침없이 행동한다면 틀림없이 권왕이었다.
독후 연진진은 항상 면사를 착용하고 다녔기에 그녀의 진면목을 본 이들은 극소수이나 세인들이 그녀를 알아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눈과 눈썹, 그리고 이마만으로도 숨을 멎게 할 만큼 환상적인 미태를 뽐내서만이 아니라 그녀가 인세에 드문 녹안(綠眼)을 가져서였다. 신비한 초록빛이 감도는 그녀의 눈동자는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녀의 동공이 뿜어내는 녹광(綠光) 자체가 가공스러운 독공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왕 소진은 사내이면서도 티 한 점 없는 백옥 같은 피부로 유명했다. 젊은 날 천하제일기남자(天下第一奇男子)라는 칭송을 받았던 검왕은 강호 뭇 여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에게 반했다가 연정을 이루지 못한 여인들이 미치거나 자진했다는 괴담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고고한 기상을 드리우며 한 자루 녹슨 철검을 허리에 찬 절세미남을 본다면 누구라도 검왕 소진이라 여길 터였다.
마지막으로 장왕 막우천을 상징하는 특징은 다름 아닌 그의 체구였다. 장왕은 비대했다. 단순히 살이 많이 찐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뚱뚱했다. 정수리에서 발바닥까지의 길이보다 허리둘레가 더 길지도 몰랐다.
늘어진 턱살에 가려진 목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걷기보단 구르기가 훨씬 편할 듯한 몸이었다. 그런 몸집의 소유자가 공중에 둥둥 떠 있으니 진천 등은 장왕 말고는 떠올리기 어려웠다.
화려한 백금의(白錦衣)를 걸쳐 거대한 보름달처럼 보이는 장왕이 서서히 하강했다.
진천을 비롯한 세평회의 인사들은 발등에 못이 박힌 듯 꼼짝도 못하고 제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장왕이 발출한 압기가 만근 거석의 무게로 그들을 내리눌렀기 때문이었다. 누구든 움직이는 순간 장왕의 표적이 될 것이었다.
장내를 휘둘러 본 장왕의 입술에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대로 잔치를 벌였구나들.”
폐인이 된 마인들이 적들을 즉살시켜달라고 아우성쳤다.
“시끄럽다. 변변치 못한 놈들 같으니.”
연못의 맹꽁이들처럼 요란스럽던 마인들의 호소가 뚝 그쳤다.
돌아갈 것 같지 않은 고개를 돌리던 장왕의 시선이 담장 위의 대웅에게 멈췄다.
“네가 남천도왕의 손자…….”
장왕은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느닷없이 절멸도를 뽑아든 진천이 그에게 쇄도했기 때문이었다. 진천의 급습으로 상황은 급전직하했다.
진천은 허공의 장왕을 발견한 순간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장왕의 등장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지난 몇 달 간 진천은 북운상단 오재승의 정보망을 통해 그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이 년 전 고화산에서 목격된 것을 마지막으로 행방이 묘연했던 장왕이 보름 전 그의 거처인 열락궁(悅樂宮)으로 귀환했음을 확인한 진천은 오양으로의 출정을 결행하기로 했다.
오양을 차지한 장마류의 마인들은 장왕을 낚는 미끼가 될 것이었다. 장왕은 그의 수족들을 제거한 세평회의 행사를 묵과하지 않고 보복에 나설 터였다. 진천이 변장이나 위장이 불가능한 가린을 대동한 것은 마련에 대한 공개적인 선전포고의 뜻도 있었지만 그들로 하여금 복수의 대상을 분명히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남신룡과 태극마선, 그리고 청면패력괴의 본거지가 주안 삼보장임은 만천하가 아는 사실이었다.
진천은 마련의 주인인 마왕(魔王) 권상명(權尙明)이 직접 삼보장을 찾지는 않으리라 보았다. 마도 사마류(四魔流) 중 장마류를 장왕에게 넘긴 지 오래였기에 그가 나설 까닭이 없었다.
장왕이 장마류를 총 동원해 삼보장을 칠 확률도 낮았다. 주안의 지척인 배수와 봉천에는 현재 마령 문가와 성주 성가가 들어와 있었다. 정파와의 마찰을 꺼리는 장왕의 성향 상 수하들을 잔뜩 거느리고 대규모로 침공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렇다고 소수 정예를 보내 삼보장을 멸하려 들 것 같지도 않았다. 세평회의 전력은 의외로 막강했다. 마령 문가와의 구인결에서 증명한 무력이 아니더라도 오양의 마인들을 압도했다는 정황만 보여준다면 장왕으로서도 또 다른 손실을 감수하기는 난감할 것이었다.
결국 장왕은 몸소 거구를 움직여 그의 신경을 건드린 애송이들을 잡고자 할 터였다. 그로서는 가장 확실하고도 뒤탈이 없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장왕을 맞이하는 이들은 세평회 인사들만이 아닐 것이었다. 진천은 장왕의 상대로 의형인 권왕을 내정해 두었다. 지하연무장으로 들어온 장왕은 한때의 동료이자 오랜 숙적이었던 권왕과 생사를 건 일전을 벌어야 할 터였다. 그리고 그 싸움에는 진천과 여상구, 그리고 가린도 참여하게 될 것이었다.
진천은 명예가 걸린 승부가 아니라 천하의 운명이 걸린 대전이라는 논리로 장왕과의 일대일 대결을 고집하는 권왕을 설득했다.
장왕이 건재한 마련과의 전쟁은 필패였다. 반면 장왕을 개전 초기에 해치운다면 해 볼만 했다. 여전히 승산이 일 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절대열세지만 원군이 붙고 운용의 묘를 발휘한다면 마련에 상당한 타격을 가할 수 있으리라 진천은 내다보았다.
그런데 장왕의 때 이른 등장으로 모든 계획이 단번에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기실 지금은 물거품으로 화할 구상을 아쉬워할 계제가 아니라 생존 자체를 염려해야 할 때였다.
진천은 장왕의 출현이 우연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우연일 리가 없었다. 그는 분명 세평회의 행사를 사전에 인지하고 오양으로 날아온 것이었다.
열락궁이 위치한 정진(鼎津)은 오양에서 서북으로 일천오백 리가량 떨어져있었다. 주안과 큰 차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세평회가 삼보장을 나설 때 누군가 정진의 장왕에게 그 정보를 전달했다는 뜻이었다. 전서구가 열락궁에 도달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장왕의 경신이라면 오양까지 오는데 서너 시진이면 충분했다.
진천은 삼보장 주위에 각 세력의 탐자(探者)들이 진을 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문제는 출정 장면을 그들에게 들킨 게 아니라 그 동향을 보고 행선지가 오양임을 간파 당했다는 데 있었다.
극소수만이 공유했던 정보였기에 어디서 새어나갔는지 판단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진천은 장왕을 보자마자 이미 누설자가 누구인지 짐작했다.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장왕 도래의 원인을 분석하는 건 나중 일이었다. 목전에 닥친 위기를 타개할 방도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진천은 장왕이 자신을 포함한 세평회 인사들에게 관용을 베풀기를 바라느니 참새가 곡알을 쌓아둔 마당을 그냥 지나치기를 기대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마왕보다 무자비하기로 정평이 난 그가 혹시라도 살수를 망설일 이가 있다면 남천도왕 곽경의 친손인 대웅뿐이었다.
진천은 대책을 고심했다. 팔대무왕 중 최약체로 평가받는 장왕이지만 세평회 전원이 전력을 다해 맞서더라도 역불급일 터였다. 무작정 덤벼들었다가는 몰살은 필연이었다.
뇌리에 두서없이 떠오르는 방책들 중 진천이 택한 것은 이란격석이었다.
바위를 친 무모한 계란은 산산조각 나겠지만 동료들이 피신할 일말의 여유를 벌어줄 것이었다. 그리고 결만 잘 노린다면 계란도 바위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었다.
고육지책이었으나 다른 뾰족한 묘안이 없었다. 모두가 살기는 불가능하니 일부라도 살 방도를 찾아야 했다.
진천은 친인들이 그의 뜻을 헤아려주기를 빌었다. 그래서 장왕에게 달려들며 온 힘을 모아 소리쳤다.
“산(散)!”
진천의 절멸삭이 장왕의 발목에 걸렸다.
쇳덩이를 두부처럼 잘라버리는 강기의 밧줄은 장왕이 두른 호신강기를 베지 못했다. 하지만 진천의 노림수는 따로 있었다.
절멸삭을 잡아당긴 진천은 순식간에 장왕의 지척에 이르렀다. 허를 찔린 장왕이 급히 오른팔을 쳐들었다. 그의 장심에서 쏟아져 나온 장공이 진천을 덮쳤다. 비환을 펼쳐 아슬아슬하게 빗겨낸 진천이 절멸삭을 절멸참으로 바꿔 장왕의 손목을 그었다.
위력만 따지면 절멸도 최강의 수법인 절멸참은 장왕의 호신강기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의 진체에 영향을 미쳤다. 뜻밖의 사태에 대경실색한 장왕이 좌수로 진천을 떨쳐냈다. 무지막지한 경기를 이기지 못한 진천이 추풍에 휩쓸린 낙엽처럼 나뒹굴었다. 장왕이 신속하게 후속타를 가했다. 그의 손바닥에서 발출된 무시무시한 강기의 폭풍이 사정없이 진천을 뭉개버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장왕이 살에 파묻힌 눈을 부릅떴다. 분명 한 줌의 핏덩이로 변했어야 할 진천이 그의 장공에 맞아 길게 움푹 파인 구덩이 끝에서 꼬물대고 있었다. 진천의 신법이 소문 이상임을 깨달은 장왕은 지체 없이 쌍장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유령처럼 사라진 진천의 신형은 그의 타격점 밖에 나타났다.
장왕은 방법을 바꾸었다. 진천이 빠져나갈 공간이 없도록 그가 도피한 곳의 반경 일 장을 초토화시킨 것이었다.
장왕의 시도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포화장(包火掌)은 진천을 묵사발 내지는 못했지만 그를 운신불능으로 만들었다. 악동이 패대기친 개구리처럼 사지를 벌리고 뻗은 진천에게 장왕이 마무리 공격을 가하려는 찰나 무언가 그의 목덜미를 찍었다. 여상구가 날린 청홍의 선강(扇剛)이었다.
장왕이 파리를 쫓듯 여상구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여상구는 장왕의 일장을 감당치 못하고 피분수를 뿜으며 나가 떨어졌다. 근처에 있던 고량도 덩달아 날아갔다. 다시 진천에게 주의를 돌린 장왕이 노성을 터뜨렸다.
“이놈!”
장왕이 부랴부랴 발출한 장공이 진천을 안고 달아나던 가린의 등에 작렬했다. 거리가 칠팔 장이나 떨어졌음에도 가린은 물론이고 그가 막 이르렀던 담벼락까지 통째로 날아갔다. 엎어졌다가 버둥거리며 일어서서 다시 도주하는 가린을 추적하려던 장왕은 따끔거리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야에 혼신의 힘을 다해 파도천망을 시전하고는 그대로 혼절한 대웅이 들어왔다. 일장에 대웅을 쳐 죽이려던 장왕은 그가 껄끄러운 남천도왕의 손자임을 상기하고는 일순 주저했다.
대웅을 노려보며 안면을 구기던 장왕은 그를 내버려두고 가린을 쫓았다. 움직이는 놈들부터 잡아 곤죽을 만든 후 나머지 놈들을 처리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가린의 달리기는 초절정고수의 경공보다 빨랐지만 허공을 비행하는 장왕에게 견줄 수는 없었다. 장왕은 이십여 장이나 멀어졌던 가린을 불과 여섯 호흡 만에 따라잡았다. 가린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장왕이 팔을 뻗었다. 도검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인면요괴의 갑피지만 그의 장공에는 강풍을 맞은 창호지처럼 찢겨나갈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