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22
제121화
인면요괴의 등을 향해 장공을 발출하려는 찰나 장왕은 섬뜩한 느낌에 움찔했다.
어두운 야공(夜空)에서 번득인 하얀 점이 그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들고 있었다. 장왕은 그 빛이 그의 호신강기를 깨고 그의 손목을 시큰거리게 했던 애송이의 강기임을 직감했다.
자신의 호신강기를 믿었으나 혹시 몰라 장왕은 고개를 모로 비틀었다. 둔중한 체구임에도 그의 몸짓은 비호보다 빨랐다.
암기를 피하는 동시에 장왕은 인면요괴에게 장공을 쏘았다. 잠깐 지체한 사이 그와의 간격이 삼사 장에서 사오 장으로 벌어져 있었다.
장왕이 장공을 발하자마자 비수처럼 예리한 무언가가 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음 순간 장왕은 하마터면 경악성을 내지를 뻔했다. 애송이가 날린 강탄은 하나가 아니었다. 처음 것에 붙어있던 두 번째 암기가 그의 면전에서 갈라지더니 눈에 박혔다. 안면에 두른 호신강기로 튕겨내긴 했으나 장왕은 심히 심란해졌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암기의 위력이 그로서도 경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 수법이 그가 아는 이의 절기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둘 다 사소한 일이 아니었으나 장왕은 특히 후자로 인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왼쪽으로!”
가린이 진천의 지시에 따라 거대한 동체를 신속하게 좌측으로 틀었다.
만근거석도 가루로 만들 장왕의 장공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오른팔을 훑고 지나갔다. 살짝 걸렸음에도 가린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뛰어, 가린!”
땅바닥에 떨어진 가린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자 진천이 재촉했다. 가린은 한 발로 무작정 도약했다.
가린의 어깨 너머로 장왕을 주시한 진천은 방금 전의 임기응변이 통했음을 알았다. 그의 절멸비를 경계한 장왕은 아까처럼 바짝 붙지 못하고 스스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수많은 등이 환하게 밝혀져 있던 천지문 경내와는 달리 민가의 불빛도 거의 보이지 않는 암흑이 앞을 가렸으나 진천은 장왕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필히 혼란에 가득한 면상이리라.
장왕과의 짧은 격전에서 상당한 내상을 입었음에도 후유증을 각오하고 절멸비를 쏘아낸 것은 단지 그의 추격을 늦추려는 목적에서만은 아니었다. 진천은 강민과의 비무에서 경험했던 강가 비전의 쌍전(雙電)을 절멸비에 담아내려 했다. 장왕이 거기에서 외조부인 북천도왕을 떠올리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절대지경의 무존이나 장왕은 전형적인 소인이었다. 권왕에 따르면 그는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유형이었다. 남북 무림을 대표하는 도존(刀尊)들의 무위가 수 년 전 그를 능가했음을 알고 있는 장왕은 그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필사적인 파도천망을 펼쳐 그를 지체하게 만들었던 대웅에 대한 장왕의 대응에서 진천은 그 점을 간파했다. 장공을 발할 것도 없이 한 줄기 지풍(指風)이면 절명시킬 수 있었음에도 장왕은 대웅을 그냥 두고 가린을 쫓아왔다. 대웅의 조부인 남천도왕을 신경 쓰지 않았다면 취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진천은 번천백팔도법 중에서도 강가의 종가 직계만이 익힐 수 있는 사대절학의 하나인 쌍전을 흉내 냄으로써 시간을 벌 작심이었다.
진천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피가 흐르자 흐려졌던 정신이 다시 맑아졌다. 지금 정신을 잃으면 끝장이었다.
장왕은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그에 대한 처분은 보류하더라도 가린에겐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을 것이었다. 가린이 쓰러지면 만사휴의였다.
천지문에 두고 온 친인들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오래 장왕을 잡아두어야 했다. 경황 중이었음에도 진천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장왕의 일장에 속절없이 날아갔던 의형은 중상을 입었을 테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터였다. 세 가지 이유 덕분이었다. 첫째, 장왕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둘째, 장왕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의형에게도 호신강기가 있었으며, 셋째, 의형은 천잠갑의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진천은 ‘이제 천잠갑의의 진짜 주인은 아우님’이라며 한사코 돌려받기를 마다하는 의형에게 설사 권왕이라도 일취월장한 그의 팔영보를 쉬이 잡아내지 못한다는 논리를 들어 설득했다. 어떤 보갑보다 뛰어난 호신책을 갖고 있기에 자신은 필요가 없다는 진천의 주장에 여상구는 마지못해 천잠갑의를 돌려받았다.
대웅 역시 파도천망을 구사하느라 원정지기가 상했을 터이지만 죽을 염려는 없었다. 구인결 이후 그랬던 것처럼 몇 달만 정양하면 회복될 것이었다.
문제는 고량이었다. 장왕이 의형을 공격할 때 날린 장공의 여파에 휩쓸린 고량은 십여 장이나 떨어진 석등까지 날아가 부딪쳤다. 가린이 그를 안고 달릴 때 진천은 고량의 상태를 보려고 안력을 돋우었지만 너무 멀고 시간이 없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혼절하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얼핏 무릎을 세우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고량이 무사하기를 두 손 모아 빌었다. 그의 건재 여부는 친인들의 생존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오양의 경계선을 지키고 있던 마졸들이 곧 천지문에 들이닥칠 터이기 때문이었다.
진천으로서는 고량이 큰 부상을 입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저 봉우리까지만 가면 된다, 가린.”
진천이 가린을 독려했다.
여러 차례 강기가 서린 장공을 허용해 등판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가린은 진천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장왕은 원거리에서 끊임없이 맹공을 퍼부었다. 그때마다 진천은 가린이 피할 방향을 미리 알려주었다.
하지만 한계가 자명했다. 장왕은 절대지경의 검존(劍尊)이 이기어검의 신술을 시현하듯 장공의 경로를 자유자재로 조정했다. 장왕의 장심을 떠난 강기의 덩어리는 마치 눈이 달린 것처럼 가린을 쫓아왔다.
그나마 수많은 비무를 통해 진천과 호흡을 맞추었던 가린이 그의 입과 한 몸으로 움직일 수 있었고 절멸비를 경계한 장왕이 사오 장 뒤에서 장공을 발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가린은 진즉 짓뭉개진 육편으로 화했을 터였다.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진천은 갈수록 초조해졌다. 장왕은 이따금 거리를 좁혔다가 다시 떨어지며 그를 시험하고 있었다. 그가 더 이상 절멸비를 쓸 수 없는 상태임을 들키는 순간 장왕은 가린의 후방 삼 장 이내로 들어와 그를 직격할 것이었다.
진천은 장왕의 입질이 한두 번에 그칠 것임을 직감했다. 늦어도 세 번째 접근에서는 불문곡직 가린에게 결정타를 날릴 게 틀림없었다.
진천은 암담했다. 반각 전 절멸비를 날린 직후 운용했던 역천기결 상의 생환결은 아직 공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린이 또 한 번 장왕의 장공에 맞아 비명을 토하자 진천은 결단을 내렸다. 절멸도법을 펼칠 최소한의 공력이 모이려면 더 기다려야 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의 예상대로 장왕이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억지로 심장을 쥐어짠 진천은 일순지간 왼 가슴이 터지는 듯한 격통을 느꼈다. 그러고는 부지불식간에 좌수를 뻗어 가린의 이삼 장 뒤까지 다가와 장공을 발하기 직전이었던 장왕에게 절멸비를 쏘아냈다.
“헉!”
경악성을 뱉어낸 장왕이 급히 떨어졌다. 진천이 연이어 두 자루의 절멸비를 더 쏘아냈기 때문이었다. 위력도 전보다 강했다. 강기의 비수가 호신강기에 맞고 튕겨나가지 않고 그대로 꽂히자 대경실색한 장왕은 거리를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긴 진천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추슬러 가린에게 지시했다.
“봉우리로, 가린. 어서!”
끄어어억.
가린의 괴성이 혼미해졌던 진천을 깨웠다.
너른 들판 끝에 뾰족한 탑처럼 솟아있던 봉우리가 코앞이었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진천이 봉우리를 올라가려는 가린에게 황급하게 지시했다.
“뒤로 돌아가자, 가린.”
가린이 방향을 틀어 봉우리를 끼고 달렸다. 진천의 절멸비에 놀랐던지 장왕은 오륙 장이나 떨어져 추격하고 있었다.
산봉우리를 반쯤 돌자 진천이 말했다.
“저기로! 저 굴속으로!”
우측에 시커먼 동굴이 보였다. 동굴이라고 하지만 입구가 어지간한 성문보다도 컸다. 이 장이 넘는 폭에 높이는 칠팔 장에 달했다.
가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망치는 입장에서 입굴(入窟)하는 것은 스스로 궁지로 들어가는 셈이 아닌가. 진천에게 까닭을 묻고 싶었지만 한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상황이 아닌지라 가린은 그의 지시에 따랐다. 진천을 믿어야 했다. 이 신통방통한 친구에겐 분명 묘책이 있을 것이었다.
출정하기 전 진천은 천지문의 구조는 물론이고 오양 인근의 지리에 관해서고 샅샅이 조사했다. 여러 명소가 있었지만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장소는 오양 남단의 참주봉(站柱峰)에 위치한 만상석굴(萬狀石窟)이었다.
중원 십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지만 만상석굴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금지(禁地)였다. 굴 안 곳곳에 깔린 시독(屍毒) 때문이었다. 혹자는 오양만답이 천혜의 옥토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만상석굴이 대지의 모든 독소를 빨아들였기 때문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상석굴을 채운 독기의 원천은 따로 있었다. 신기하게도 오양 일대의 들짐승들과 산짐승들은 크게 다치거나 병이 들면 만상석굴로 기어들어갔다. 동물들의 행태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들로 자타가 공인하는 만수문(萬獸門)의 기인들은 그것이 죽기 전의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본능적인 행동일 거라 분석했다. 어쨌거나 수백, 수천 년 간 이어온 짐승들의 자살행렬은 만상석굴을 독인들조차 들기를 거부하는 사지(死地)로 만들었다.
진천은 동물들의 묘를 기사회생의 묘처로 삼을 요량이었다.
만상석굴의 특징은 유령처럼 휘돌고 있다는 독무(毒霧)만이 아니었다.
만 가지 형상의 석주들이 즐비한 만상석굴은 어마어마한 넓이를 자랑했다. 오래 전 만상석굴 내부를 탐사했던 절독문의 독귀(毒鬼)들에 따르면 만상석굴 전체의 면적은 십만 평도 넘을 거라고 했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진천에게 만상석굴은 창인의 지하미로를 연상시켰다. 지하미로는 외부인들은 살아남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길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데다 독거미나 전갈 같은 독물들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만상석굴을 지하미로처럼 활용한다면 장왕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자신의 심장을 점검한 진천은 안도했다.
찢어질 듯 아팠으나 터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더욱이 장왕에게 두 번의 절멸비를 쏘아 내고도 아직 여력이 남아있었다. 무리하게 환상결을 운용하느라 수명이 십 년 이상 단축되었을 수도 있지만 진천은 결과에 만족했다. 만약 비상수단이 듣지 않았다면 오늘 당장 염왕전에 갔어야 했을 터였다.
달빛도 들지 않아 만상석굴 안쪽은 완전한 암흑이었다. 더욱이 석주들이 빼곡하게 박혀있어 이동이 여의치 않았다. 전날 횃불을 들고 만상석굴을 탐험했던 절독문의 독인들은 그 돌기둥들이 인간이나 동물은 물론이고 구름이나 나무 같은 온갖 것들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짐승들의 최후의 안식처가 만상석굴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였다.
진천을 등에 태운 가린은 손으로 바닥을 더듬어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동작이었지만 건장한 장정이 달리는 속도보다 빨랐다.
장왕은 입구에서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었으나 마음을 정한 듯 가린을 따라 들어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장왕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의 기감은 어둠에 구애받지 않았다.
장왕이 소리 없이 접근하고 있음을 감지한 진천은 가린의 등에서 내려왔다. 가린이 움직임을 멈추자 진천이 그의 엉덩이를 밀었다. 진천의 뜻을 알아들은 가린이 그를 두고 홀로 전진을 재개했다.
가린을 보낸 진천은 황소의 뿔처럼 바닥에서 불룩 솟은 두 개의 바위 뒤에 숨었다. 장왕이 지척에 이르렀다. 진천은 그가 자신의 잠복을 알고 있음을 알았다. 그럼에도 장왕이 공격을 자제하는 것은 장애물 때문이 아니라 찝찝한 부분이 해소되지 않아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였다.
장왕의 갈등을 이용해 모험을 했던 진천은 때를 놓치지 않고 절멸삭을 뽑았다. 둥글게 휜 강기의 밧줄이 장왕의 비대한 몸통을 휘감았다. 그 순간 장왕의 장심에서도 가공스러운 강기 폭풍이 터져 나와 진천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