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23
제122화
콰가가가강.
하늘이 무너진 듯한 굉음이 석굴을 울렸다.
장왕이 뿜어낸 장공에 수백 년 수령의 느티나무 몸통만한 수십 개의 돌기둥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실로 무시무시한 파괴력이었다.
그러나 장왕의 장공은 나뭇잎에 붙은 개미로 화한 진천을 깨뜨리지 못했다. 단단히 대비하고 있던 진천은 비환으로 직격을 피하며 날아가는 돌가루 속에 섞여 장왕으로부터 멀어졌다.
장공의 여파에 내기가 격탕되긴 했으나 진천은 곧장 그를 쫓아오는 장왕에게 절멸비를 쏘았다. 심장이 깨질 듯 욱신거렸다. 하지만 무리한 보람이 있었다. 순식간에 그의 뒤에 붙었던 장왕이 주춤거린 것이었다. 그 틈을 타 진천은 일이 장의 거리를 벌었다.
손끝이 아릿했다. 진천은 장왕의 허리를 감았던 절멸삭이 그의 호신강기를 깨뜨리고 진체 근처까지 파고들었음을 알았다. 절멸참으로나 가능했을 성과였다.
이는 장왕의 호신강기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강기를 실은 장공을 퍼붓느라 막대한 내공을 소모하긴 했지만 장왕의 공력이 벌써 바닥났을 리는 없었다. 장공의 지존답게 장왕은 팔대무왕 중에서도 최상위 권의 공력을 자랑했다. 그의 내력이 무려 십 갑자에 달할 거라는 설도 있었다. 육체라는 한계를 지닌 인간이 쌓을 수 있는 내공이 아니었다.
진천의 절멸삭이 통했던 것은 장왕이 두른 호신강기가 약해져서가 아니라 절멸삭 자체의 위력이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운공에 들지 않은 채 환생결을 운용한 데다 나아가 심장을 쥐어짜는 극약처방으로 하마터면 생사의 경계를 넘어갈 뻔했지만 고비를 넘긴 진천은 망외의 힘을 얻었다. 심장에 도사린 독정의 일부가 깨지며 막대한 원력이 전신에 풀린 것이었다. 설사 수십 년의 수명이 날아갔더라도 당장의 누란지위(累卵之危)에서 벗어났으니 진천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절멸도는 불가능했다. 다시 강제로 독정을 깨려고 한다면 심장이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진천은 장왕의 위치를 가늠하며 팔영보를 전개했다. 극성으로 펼치려면 얼마간의 내공을 써야하지만 평상적인 경우엔 진신의 원기만으로도 충분했다. 장왕의 장공은 잇달아 진천의 환영만 지워버렸다.
먹물로 채운 듯한 암흑의 공간에서 강기의 태풍 대신 어린 소녀가 내는 것 같은 가냘픈 목소리가 날아왔다.
“거기 서라. 더 달아나면 기필코 끝까지 쫓아가 지옥으로 보내겠다.”
터무니없는 요구였지만 진천은 즉시 현란하게 움직이던 발놀림을 중단했다. 장왕도 멈춰 섰다.
“너에게 살수를 쓰지 않고 살려둔 까닭은 내 휘하에 거두기 위함이다. 듣자하니 너는 잔귀쌍마라는 자들의 제자라지? 정맹의 영토에서 놀았지만 네 사부들은 마도의 족속이 아니더냐? 오양 분타에서의 일은 불문에 붙일 테니 내 밑으로 들어 오거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세를 보장하마. 장마(掌魔)보다 너를 위에 둘 것을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한다. 어쩌려느냐?”
진천은 쓴웃음이 났다.
일곱 살짜리 아이나 쓸 법한 수작이었다. 장왕의 의도는 그를 구워삶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외조부, 즉 북천도왕과의 연관성을 밝히려는 것이었다.
진천에게서 대꾸가 나오지 않자 장왕이 보다 직설적으로 속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정말로 네 무공이 잔귀쌍마에게서 얻은 것이더냐? 혹시 다른 이로부터 지도를 받지는 않았더냐?”
진천은 여전히 묵묵부답했다. 장왕의 혼란을 부추기기 위해서였다.
“어째서 답이 없느냐? 목이 상해 말을 할 수 없다는 핑계는 대지 마라. 이곳에 들기 직전까지 요괴에게 속닥거리지 않았더냐?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장왕의 재촉에도 진천은 입을 열지 않았다. 어둠 저편에서 장왕의 일그러진 면상이 보일 듯했다.
“괘씸한 놈! 죽여 버릴 테다.”
인내심이 바닥 난 장왕이 고양이 발톱처럼 뾰족한 음성으로 호통 쳤다. 하지만 엄포와는 달리 진천을 향해 짓쳐들지 않고 제자리를 고수했다. 진천은 그 이유를 능히 짐작했다.
역한 독기가 평화를 깨뜨린 불청객들을 쫓아버리려는 듯 한꺼번에 몰려왔다.
장왕이 진천을 멈춰 세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절대지경에 들었으니 만독불침(萬毒不侵)의 신체가 되었을 터이나 장왕은 독을 꺼려했다. 전날 독후 연진진의 독공(毒功)에 쓴맛을 본 적이 있어서였다.
절정의 독인들도 두려워한다는 시독이지만 장왕에겐 고약한 냄새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독기의 원천으로 다가오는 걸 주저하는 까닭은 진천의 반응 때문이었다. 진천은 일부러 숨소리를 닫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그의 고른 호흡은 시독의 안개에 휩싸였음에도 중독되지 않았다는 반증이었다. 장왕으로서는 그의 정체가 더더욱 궁금해질 터였다.
진천은 장왕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다. 장왕은 그의 침묵을 그를 비밀병기로 키웠을 북천도왕과 행한 서약의 실천쯤으로 상상하고 있을 것이었다. 장왕이 어떤 결론을 내릴 지도 뻔히 보였다.
“이렇게 썩은 내가 나는 곳에서 대화를 나눌 게 무어냐? 밖에서 기다릴 테니 내 제안에 응할 결심이 서거들랑 나오너라. 좀 전에 한 말은 잊어버리고. 너를 죽일 요량이었으면 벌써 그랬을 터.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진천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장왕이 물러갔다.
구차스러운 후퇴의 변을 남기고 멀어져가는 장왕의 기운을 끝까지 쫓으며 진천은 머릿속으로 다음 수순을 정리했다.
일다경 후 진천은 가린을 찾았다.
그의 외침이 석굴에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움직임이 포착되자 진천이 불렀다.
“여기다, 가린.”
잠시 후 암흑을 밀어내고 가린이 육중한 동체를 불쑥 들이밀었다.
“좀 어떠냐?”
진천의 질문에 가린은 우물거렸다.
진천은 그의 부상이 심각함을 깨달았다. 운신은 가능했지만 겉과 속 모두 엉망이 되었을 것이었다. 정통으로 적중 당하지는 않았다고 하나 장왕의 장공을 여러 차례 맞고도 명줄이 붙어있는 자체가 기적이었다.
“잘 들어, 가린. 나는 지금 나가서 천지문으로 돌아갈 거야. 친우들이 어떻게 됐는지 살펴봐야 돼. 너는 여기서 기다려. 입구 근처에 있으면 해가 뜨고 지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만약 내가 내일 해질녘까지도 돌아오지 않으면 더 깊이 들어가 다 나을 때까지 숨어있어. 사흘이면 너끈히 회복되겠지? 그러면 석굴을 나가 주안으로 가. 왔던 길을 되짚어가면 돼. 할 수 있지? 삼보장에 가면 전에 보았던 작은 노인께 오늘의 일을 말씀드려. 그 다음엔…….”
단숨에 쏟아내던 말끝을 흐렸던 진천이 말을 이었다.
“아타의 숲으로 돌아가.”
가린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가린은, 같이 간다. 가린은, 너를 지킨다. 먹기 전까진.”
진천은 가슴이 뭉클했다.
“안 돼, 가린. 내 걱정은 마. 방금 한 얘기는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 것뿐이야. 실제로 내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해도 좋아. 아까 우리를 쫓아왔던 뚱뚱한 괴물은 진즉 떠났을 테니까 나를 위협할만한 건 없어.”
가린이 진천의 좌수를 잡고 흔들었다. 그의 의사를 알아들은 진천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절멸도를 뽑아 보이긴 어려워. 하지만 나한텐 팔영보가 있잖아. 그리고 정말 위급한 상황이 닥친다면 절멸도도 쓸 수 있어. 그러니 아무 염려 마.”
가린이 진천의 팔을 놓아주었다.
“가린은, 기다린다.”
“그래, 가린. 특별한 일이 없다면 늦어도 해가 지기 전까진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만약 친우들이 무사히 피신했다면 해가 뜨기 전에 올 지도 몰라. 아마 그렇게 될 거야.”
가린을 안심시킨 진천은 그와 함께 입구 쪽으로 이동했다.
진천은 만상석굴을 빠져나왔다.
예상대로 장왕은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 진천은 그의 다음 행보를 어렵지 않게 추측했다. 장왕은 우선 외조부에게 밀사를 보내 ‘하남신룡’과의 ‘특별한 관계’ 여부를 확인하려 들 게 뻔했다. 외조부는 당연히 전면 부인을 할 터이고 그러면 장왕은 삼보장을 찾아 만상석굴에서 못 다한 응징을 마무리 지으려 들 것이었다.
진천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원래 구상했던 수순이 비틀렸으나 결과적으로는 장왕을 삼보장으로 유인하려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다만 몇 가지 변수는 있었다. 그렇더라도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신속한 회복과 무력 상승이었다. 큰 의형을 도와 장왕을 잡으려면 그가 작은 의형의 몫까지 해내야 했다.
극한으로 운용한 환생결에 치유와 회복의 공능 외에 내공 증진의 효용이 있음을 발견한 것은 고무적이었다. 진천은 오래 살아 영화를 누리기보단 짧은 인생일지라도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진천은 시냇가에서 시독이 밴 옷을 벗고 몸을 씻었다. 독에 약한 범인이 그와 접촉하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었기에 반드시 행해야 하는 조치였다.
기실 진천은 만상석굴에 들어가기로 결정했을 때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곳의 살인독무는 그와 가린에게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었다.
일 년 전 아타 족의 숲에서 가린과 격전을 치렀던 장소는 우연찮게도 독담 근처였다. 심장에 극독과 맹독으로 이루어진 독정을 품은 진천은 물론이고 가린도 독담에 빠지고도 멀쩡했다. 독사와 독충들이 우글우글한 밀림에서 일백 년을 견딘 가린은 독에 강력한 내성을 지니고 있었다. 만상석굴의 독기가 자신과 가린을 해치지 못하리라 진천이 확신한 이유였다.
입고 있던 무복을 등에 걸린 불에 태운 진천은 민가의 빨랫줄에 널린 허름한 마의를 훔쳐 입었다. 도둑질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그였지만 알몸으로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진천은 마음속으로 옷 주인에게 용서를 빌었다.
반 시진 전 천지문에서 일어난 사건을 모르는지 저자는 새벽녘의 호수처럼 고요했다. 하지만 진천은 그 정적 속에서 평온함보다는 억눌린 공포의 기운을 느꼈다. 저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집에 틀어박힌 오양의 백성들은 언제 마인들이 들이닥칠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이었다.
천지문에 가까워지자 진천은 청력을 키웠다. 그러나 바짝 세운 그의 귀에 들어오는 건 무심한 바람소리밖에 없었다. 천지문은 바깥의 공기와 마찬가지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진천의 심중에 독버섯처럼 돋아났다. 지금쯤이면 오양의 외곽에 배치된 마졸들이 분타 본단에서 벌어진 사달을 인지하고 몰려오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었다.
진천은 경신의 속도를 올렸다, 담장을 넘지 않고 활짝 열린 대문으로 들어간 진천은 우뚝 멈춰 섰다. 확실히 이상했다. 설사 마졸들이 천지문으로 오지 않았다고 해도 소음은 들려야 했다. 의형에 의해 사지가 잘리고 단전이 깨져 나뒹구는 마인들의 신음성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진천은 황급히 황금전각으로 달려갔다. 도중에 지나친 전각들 안에서는 인기척이 잡히지 않았다. 하인들이 삼보장을 빠져나갔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다 죽었거나.
황금전각의 광장에 이른 진천은 처진 눈을 치떴다. 참혹한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