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25
제124화
만상석굴에서 가린과 재회한 진천은 바로 주안으로 출발하지 않고 그곳에서 사흘을 더 머물렀다.
가린은 이전보다 회복속도가 느렸다. 장왕의 장공에 스민 경력은 발산도군의 칼에 실린 공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깨진 갑피는 진즉 아물었지만 망가진 내부는 아직도 엉망이었다. 사흘이 지나서도 거동에 불편함을 겪는 가린을 보며 망설였던 진천은 그가 달릴 수 있다고 우기자 만상석굴을 떠나기로 했다. 독기 때문에 여상구 등을 동굴 입구에 두어야 했는데 인적이 드물다 하나 민초들의 눈에 띌 확률이 적지 않아서였다. 세평회가 아직 오양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정보가 퍼지면 좋을 게 없었다.
삼인 중에서는 대웅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부상 정도는 그가 제일 심했다. 원천지기까지 쥐어짰기 때문이었다. 눈을 뜬 대웅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진천은 그의 결단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다며 아낌없는 감사를 표했다. 기실 대웅은 진천을 구하기 위해 무공 상실의 위험은 물론이고 죽음까지 각오해야 했다.
대웅에 이어 의식이 돌아온 고량은 진천과 가린이 장왕을 끌고 천지문을 떠난 후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진천이 임하은의 얘기를 통해 짐작했던 바와 일치했다.
맨 마지막으로 정신을 차린 여상구는 심각한 내상에도 불구하고 시종여일 싱글벙글했다. 세평회의 인사들은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라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장왕과 부닥치고도 목숨을 잃은 이가 아무도 없다는 자체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주안으로 돌아오는 길은 오양으로 갈 때보다 네 배나 걸렸다.
부상을 당한 이들이 낮 동안에는 물론이고 야간에도 수시로 운공에 들어야 하는 데다 가린이 전속력으로 달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상이 아님에도 가린은 세 사람 모두를 자기가 맡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들도 그에게 호응해 여상구와 고량은 각각 가린의 어깨에 오르고 대웅은 목말을 탔다. 진천은 ‘두목’에게 업힐 수는 없다는 동료들의 너스레에 손을 들었다.
만상석굴을 나선지 여드레 후 해 뜰 무렵 진천 등은 주안에 당도했다. 진천은 삼보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장 역할을 하는 죽림에서 일행과 헤어졌다. 그들의 귀환이 알려지기 전에 가봐야 할 곳이 있었다.
아침햇살이 대지에 죽치고 있던 어둠을 몰아내고 천지를 환히 밝혔다.
죽립을 눌러 쓴 진천은 이른 아침부터 장사준비에 여념이 없는 부지런한 상인들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고 저자를 지나갔다. 북운상단에 이른 진천은 평소처럼 대문으로 들지 않고 담을 넘었다. 높은 담벼락 안팎으로 여러 사람이 오갔으나 아무도 그의 잠입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북운상단 내부로 들어간 진천은 오재승의 처소로 갔다. 삼층 와옥의 지붕으로 오른 진천은 안의 동정을 살폈다. 잠시 후 그가 기다리던 기척이 감지되자 진천은 꼭대기에 난 덧창으로 스며들었다.
잠옷 차림으로 손수 즐기는 백엽차를 타서 음미하고 있던 오재승은 유령처럼 나타나 그의 앞에 서있는 진천을 보고는 놀라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진천은 다실(茶室)의 문을 닫고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어찌 된 일이오, 진 공자?”
잠에서 덜 깬 눈을 멀뚱거리며 오재승이 물었다.
진천은 단도직입했다.
“오양에서 장왕을 만났습니다.”
진천의 말에 담긴 의미를 곱씹던 오재승이 마른 침을 삼켰다.
“설마…….”
진천의 무심한 눈을 본 오재승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나를 의심하는 게요, 진 공자?”
오재승을 주시하던 진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재승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정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소. 그렇잖아도 거사를 성공시킨 후 세평회의 행방이 묘연해 요 며칠 내내 심려하고 있던 차였다오. 장왕일지도 모르는 괴인을 목격했다는 첩지가 있긴 했지만 신빙성이 일 할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애써 무시했더랬소.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게요?”
“말씀드린 대롭니다. 십일 일 전 천지문의 마인들을 소탕한 직후 장왕이 나타났습니다. 그와 부딪쳤지만 운 좋게 모두들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아아, 천만다행이구려. 그런데 장왕이 어찌 알고 그곳을 찾았을까요? 분명 세평회가 출정하기 이틀 전에도 그가 열락궁에 머무르고 있다는 특급정보를 받았는데 말이오.”
“누군가 우리의 동향을 장왕에게 알렸겠지요. 동향만이 아니라 행선지까지도 말입니다.”
“그게 누군지 아오?”
진천이 반문했다.
“오 단주님은 모르겠습니까?”
오재승의 표정이 굳었다.
“모르오. 혹시라도 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면 부디 믿어주길 바라오. 맹세컨대 나는 세평회와 관련된 극비사항을 누설한 적이 없소. 진 공자와의 약속에 따라 문서로도 일절 남기지 않았소.”
“압니다.”
진천의 말에 안도했던 오재승은 이어진 그의 다음 말에 낯빛이 파래졌다.
“하지만 비밀이 새어나간 곳은 여기입니다.”
진천에게 마도 타도의 뜻이 있음을 아는 이들은 삼보장의 인사들이나 북운상단의 오재승만은 아니었다. 원주 강가와 마령 문가에도 동일한 의지를 피력했으니 그들도 원칙적으로는 용의자에 포함시켜야 했다. 더욱이 외부로 나간 하수린이나 노미현이 부지불식간에 오양의 장마류가 세평회의 일차목표임을 발설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천은 북운상단이 장왕에게 이어진 끈이었음을 거의 확신했다. 단순한 직감이 아니었다. 몇 가지 근거가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요 몇 달 간에 걸친 오재승의 활발한 정보수집 활동 자체였다. 오양과 그곳에 똬리를 튼 마인들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취합하는 과정에서 북운상단은 마련의 촉각에 걸려들었을 것이었다.
문제는 오재승이 마련과 내통했느냐 여부였다. 진천은 오재승을 보기 전까지는 판단을 보류했다.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지만 속단하긴 어려웠다.
충격을 추스른 오재승은 진천의 단언에 반박하지 않고 수용하는 자세를 취했다.
“솔직히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진 공자가 그렇다면 그럴 것이오. 어떻게 이 책임을 져야 되겠소?”
“책임 소재를 따지러 온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은밀히 오 단주님을 방문한 까닭은 유사한 사태의 재발을 예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말씀은 누설자가 누군지 안다는 뜻이오?”
오재승이 실망스럽게도 진천의 고개가 좌우로 돌아갔다.
“아닙니다.”
아직도 오재승의 손에 들려있는 찻잔을 일별하며 진천이 말을 이었다.
“오 단주님과 더불어 백엽차를 즐기는 다녀(茶女)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웬일인지 오재승이 낯을 붉혔다.
“그렇소만.”
“실례되는 질문입니다만 혹시 그녀와 차 말고 다른 것도 즐기시는지요?”
살점 없는 오재승의 강퍅한 뺨이 부들부들 떨렸다. 진천이 고삐를 조였다.
“옆의 침실에 든 이가 그녀입니까?”
늘 침착하던 오재승의 목소리가 높아졌다.”오해외다, 진 공자. 내 말은 그 아이가 거기에 없다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아이에게 진 공자나 세평회의 일에 관해서 언급한 적이 없다는 뜻이오. 그러니 그 아이는 알 리가 없소.”
“의식적으로는 그러셨겠지요. 하지만 정신이 혼미해졌을 경우엔 자기도 모르게 입 밖에 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미약을 탄 백엽차를 마신 상태에서 방사를 치르다 과도한 흥분지경에 이르면…….”
“아아.”
오재승의 탄식이 진천의 뒷말을 막았다.
진천이 사색이 된 오재승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오재승은 그의 시선을 받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면목이 없소, 진 공자. 근래 그 아이와 잠자리를 같이 하다 가끔 과음한 사람처럼 기억의 일부가 끊긴 경우가 있었소.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한 탓이라고 여겼거늘 어째 이런 일이…….”
오재승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동공에 짙은 괴로움이 묻어났다.
“그 아이의 목을 치겠소. 그 아이를 처벌한 후 진 공자가 나에게 내리는 벌도 달게 받겠소. 내 명줄을 자르는 것을 포함해 무엇이든 진 공자의 처분에 따르겠소.”
진천이 일어서려는 오재승의 손을 잡았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오. 아끼는 아이이나 배덕을 용서할 순 없소.””그렇더라도 목을 치는 건 과한 처사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
“그녀를 벌하기보단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는 게 어떨는지요?”
“어떻게 말이오?”
진천은 찬찬히 그의 복안을 오재승에게 설명했다.
진천이 삼보장에 돌아오자마자 권왕이 그를 대나무 숲으로 끌고 갔다.
“네 녀석을 기다리다 코빼기가 빠지는 줄 알았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
진천은 오양에서의 귀환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북운상단에서 지체한 것을 말하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아 즉답을 못했다. 후자였다.
“아이들에게 대충 얘기는 들었다만 간자는 잡았느냐?”
“그런 것 같습니다.”
“오재승인가 원숭인가 하는 놈이었더냐? 그놈이 실토하더냐? 자고로 신의를 저버리는 놈들은 모가지를 뽑아야 하느니라. 네 녀석은 독하지 못해 혀만 뽑고 말았을 테지?”
진천은 쓰게 웃었다.
“오 단주는 마련과 내통하지 않았습니다, 큰 형님. 세평회의 동향에 관해 그들에게 전해준 이는 그의 측근이었습니다.”
진천은 오재승과 나눴던 밀담을 권왕에게 간략하게 알려주었다.
“하여간 네 녀석 꾀도 여간 아니다.”
그 정도의 감상만 밝히고 권왕은 그 사안에 관한 관심을 거두었다.
“막가를 상대해 본 느낌이 어떻더냐?”
“큰 형님께 들었던 인상 그대로였습니다.”
“그래? 전날 그치에 대해서 하도 많은 말을 해서 내가 막가를 무슨 인상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구나. 이 노형이 이해하기 쉽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거라, 아우야.”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잔머리를 많이 굴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는 우유부단한 위인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흠, 막가가 그렇긴 하지.”
“장왕의 그러한 성향 덕분에 저희 모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허술한 행사와 무관하게 그의 무력은 저희들로서는 감당불가의 경지였으니까요.”
“그랬을 테지. 결국 막가를 잡으려면 내가 나설 수밖에 없음이야.”
“맞습니다, 큰 형님.”
“그런데 일찌감치 막가를 들쑤셨으니 이제 네가 짰던 계책은 물 건너 간 셈이 아니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확실해진 측면이 있습니다. 장왕은 우선 원주 강가에 밀사를 보내 제 외조부에게 저와의 관련성에 대해 알아보려 할 것입니다. 지금쯤이면 이미 답변을 얻었을 듯싶습니다. 그리고 북운상단의 오 단주에게 듣기로 어제 벽력도문에서 공식적으로 대웅을 파문한다고 발표했답니다. 아마도 장왕만이 아니라 마왕까지 나서서 사벌에 항의를 했을 공산이 큽니다. 남천도왕은 마련에게 책을 잡히기 싫어 꼬리를 잘랐을 테고요. 두 가지 부담이 사라졌으니 장왕으로서는 세평회에 대한 보복을 주저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는 반드시 삼보장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럼 나는 계속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야겠구나.”
“부탁드립니다.”
“막가가 언제쯤 올 것 같으냐?”
“빠르면 오늘내일이라도 올 수 있습니다. 늦어도 한 달을 넘기진 않을 것 같습니다.”
“범위가 너무 넓어. 막가를 기다린다고 긴장되는 건 아니다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그치가 기어들 시기를 알고 있어야 할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막연하게 빠르니 늦느니 하지 말고 날짜를 특정해 보거라. 틀려도 앞뒤로 사나흘 정도면 봐 주마. 아니, 그게 아니지. 그러면 결국 이레에 걸치는 셈이 되니까 앞과 뒤로 하루씩만 여유를 주마. 자, 어서 짚어보려무나, 아우야. 네 재주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니더냐.”
“…….”
“어서 해보래도.”
“다양한 변수가 있어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예측할 수가……,”
“어허! 그딴 소리는 누가 못해? 너니까 특별히 묻는 게지 다른 놈이었으면 손톱에 낀 때만도 기대하지 않았을 게다. 그러니 잔말 말고 그 신통한 재주를 부려 보거라, 아우야.”
“그러시다면 저는 한 달 후로 잡겠습니다.”
“구월 십사일 말이냐?”
“네.”
“그게 하한이라며?”
“그렇습니다.”
“근데 왜 하필 끝 쪽을 짚었느냐? 막가가 그 전에 오면 어쩌려고?”
“그 이유는…….”
“됐다. 네 비결을 알고 나면 시시해질 터. 나는 그날을 막가를 때려잡는 길일로 알고 있으마. 만약 네 예상이 빗나가면…….”
“…….”
“벌칙은 네 상상에 맡기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