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27
제126화
오륙 장의 거리를 지우고 날아든 뇌전(雷電)은 진천의 복부를 꿰뚫었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안목이 있는 이들은 방금 강민이 발한 초식이 원주 강가의 사대절학 중 하나인 광섬(光閃)임을 알아보았다.
예비동작도 없이 칼끝에서 분출되는 번개는 오직 최상의 무재를 지닌 천재들만이 체득할 수 있는 절기였다. 구결을 이해하고 구현자의 지도를 받는다 해도 실제로 광섬의 구사에 성공하는 자들은 극소수였다.
현재 원주 강가에서 광섬을 부릴 줄 아는 도호는 다섯 명 안팎으로 알려져 있었다. 강민을 제외하면 전원이 오십 대 이상이었다. 약관 어림의 강민이 얼마나 대단한 기재인지 증명하는 한 수가 아닐 수 없었다.
기실 탄성이 군중 전체에서 일지 않은 까닭은 대부분의 관전자들이 이미 두 달 전 견식했던 탓이었다. 당시 자하검선과의 비무에서 강선은 광섬으로 그녀의 패배선언을 이끌어냈었다. 광섬은 그에게 섬전도라는 별호를 안겨준 절초이기도 했다.
하지만 군중의 일부는 광섬 때문에 탄성을 지른 게 아니었다. 그들은 광섬을 무위로 돌린 진천의 신법에 감탄한 것이었다. 단 일 초에 승부가 결정되었다고 여겼던 수준이 낮은 무인들과는 달리 고수급들은 진천이 섬전과 맞먹는 속도로 광섬을 빗겨냈음을 알아차렸다. 뒤늦게 원래의 자리에서 반 보 떨어진 왼편에 나타난 진천의 진체를 발견한 군중이 웅성거렸다.
실로 화려한 공방전이었다.
약관 전후의 청년들이 시현하는 무학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절공들의 향연이 직경 십이삼 장의 원형 공간에 가득 펼쳐졌다.
공세를 취하는 쪽은 강민이었고 진천은 수비일변도였다. 그러나 아무도 진천이 수세에 몰렸다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귀두도까지 꺼내들고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강민보다 피하기에 바쁜 진천이 주도권을 쥔 듯한 인상이었다.
간간이 도강(刀剛)까지 뻗어내며 진천을 몰아세우는 강민의 압박은 강력했지만 그의 수단들을 헐거운 그물로 만들어버리는 진천의 몸놀림은 놀라운 정도를 넘어 경이롭기까지 했다. 관전하고 있던 정파 무림의 내로라하는 신법의 대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진천의 신기에 혀를 내둘렀다. 그들 대부분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경지였다.
광섬으로 비무가 개시된 지 반의반 각도 지나지 않았지만 워낙 속도가 빨라 벌써 일백 초가 흘렀다. 고개가 픽픽 돌아가는 현란한 전개에 군중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승부가 한 순간에 급작스럽게 끝날 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강민의 조바심을 느꼈다.
초반에 승리를 가져가 위명을 드높이려던 계획이 어긋났으니 초조한 모양이었다. 반면 진천은 강민이 쏟아내는 번천일백팔도의 절학들을 느긋하게 음미했다. 절멸도법의 뿌리라선지 처음 접하는 수법들임에도 어딘지 친숙했다.
강민의 무공은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강민은 다섯 달 전 강가의 제일연무장에서 겨뤘을 때보다 진일보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사실 그때도 곽건과의 혈전으로 내상을 입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고전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진천은 강민의 무위가 대웅보다는 높지만 곽건이나 소중걸에 비한다면 뚜렷하게 처진다고 생각했다. 그들과 싸운다면 강민은 이삼십 초 이내에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될 것이었다.
진천은 강민이 강가에서의 일전으로 그를 얕보았음을 깨달았다. 강민은 양패구상의 결과를 자신이 방심한 결과라고 여겼음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언제든 다시 붙으면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 자신했을 터였다.
진천은 씁쓸했다. 외가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재목은 온실 속의 화초였다. 소중걸이나 곽건까지 갈 것도 없이 대웅이 독기만 품는다면 그를 감당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강민의 광포한 공격에 깃든 조급함을 감지한 진천은 좌수에 공력을 불어넣었다.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할 시간이었다.
강민이 드디어 아껴두었던 패를 꺼내들었다.
진천이 예상한 대로 사대절학의 하나인 쌍전이었다. 일단 광섬을 날려 진천의 주의를 돌린 강민은 연달아 쌍전을 발출했다. 쌍도에서 뻗어 나온 두 줄기 강선(鋼線)이 진천의 동체를 옭아맸다.
진천은 자만심을 경계했다. 이미 한 번 경험했지만 쌍전은 알고도 당한다는 비학이었다. 직선으로 지나가는 광섬과 달리 쌍전은 시전자가 마치 이기어검술을 부리듯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심지어는 회수도 가능했다.
극상의 비환으로 쌍전을 흘리며 진천은 절멸비를 쏘아냈다. 그의 좌수에서 하얀 기운이 솟아나자 강민은 바짝 긴장했다. 전날 그가 쌍전의 아류라고 간주한 그 수법에 당해 옆구리가 뭉개졌던 악몽을 상기했기 때문이었다. 기실 강민은 공세를 취하면서도 비무 내내 진천의 반격을 신경 쓰고 있었다.
하지만 진천의 손끝에서 나온 강기의 비수들은 강민을 겨냥하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다름 아닌 쌍전이었다. 진천을 잡지 못하고 지나갔던 강선들은 허공에서 선회해 다시 그에게 짓쳐들고 있었다. 진천의 절멸비는 벼락처럼 그에게 달려드는 쌍전에 맞불을 놓았다. 공중에서 불꽃이 튀었다.
진천은 이 한 수의 의미를 헤아린 강민이 포기하기를 바랐다. 방금 그가 현시한 대응책은 둘 간의 무력 격차를 확연히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수가 아니기에 강민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진천은 강민이 그의 바람과는 달리 미련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강민의 눈동자에서 발산되는 안광은 그에게 너무나 익숙했다. 그것은 자신에게서 팔비수와 원앙각을 배운 아들한테도 절대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던 모친의 눈빛이었다.
쌍전을 무마시킨 진천은 강민의 동공을 유심히 살폈다.
충격과 절망감이 범벅이 된 가운데 살벌한 결기가 떠올랐다. 진천은 그가 무리를 할 것임을 직감했다.
평범한 수단으로는 형세역전이 불가능하니 남은 사대절학 중 하나일 터였다. 진천은 분천일획(分天一劃)이기를 바랐으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강민이 그 신공을 터득했다면 진즉 선을 보였을 터였다.
그렇다면 파즉살(破卽殺)임에 분명했다. 전날 절벽에서 떨어지며 외숙이 발했던 살상무학이었다.
진천은 암울했다. 강민은 지나친 승부욕으로 말미암아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려드는 것이었다. 칼을 깨뜨려 파편을 암기로 부린다는 점에서 벽력도문의 파도천망과 흡사한 듯싶지만 원주 강가의 파즉살은 정반대의 지향점을 가진 살초였다. 파도천망이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하며 다수의 적을 일거에 섬멸하는 데 주안점을 둔 반면 파즉살은 좁은 타격점에 집중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적의 즉살을 노리는 수법이었다.
문제는 충분한 공력이 뒷받침되지 않을 시엔 반대의 결과를 얻게 된다는 점이었다. 대웅의 파도천망이 어설픈 파즉살의 효과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강민도 그러할 공산이 컸다. 그의 파즉살은 파도천망처럼 변해 진천만이 아니라 관전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날아갈 것이었다. 그리 되면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진천은 강민이 손을 쓰기 전에 행동에 돌입했다. 그로서는 비무가 시작된 이후 최초의 공격이었다.
시종여일 거리를 유지했던 진천이 엄청난 속도로 쇄도해오자 강민은 당황했다.
파즉살을 펼치려면 일시에 전 공력을 귀두도에 주입해야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진천의 손에서 흘러나온 기이한 이물(異物)에 걸릴 게 뻔했다. 강기는 아니었다. 마치 밧줄이나 채찍처럼 흐느적거렸기 때문이었다.
강기가 아니더라도 경시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위장용이라고 치부하기엔 느낌이 섬뜩했다. 본능이 철저한 대비를 촉구하고 있었다.
강민은 귀두도에 불어넣었던 내력을 분산해 협도에도 힘을 실었다. 그러고는 쌍도를 휘두르며 진천에게 맞달려갔다. 칼과 밧줄이 부딪치는 근접전에서는 그가 밀릴 리가 없었다.
그러나 판단착오였음이 금방 판명되었다. 그의 쌍도와 밧줄이 엉키자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강민의 확신과는 달리 잘린 건 밧줄이 아니었다. 밧줄에 휘감긴 그의 칼들이 속절없이 부러져나가자 강민은 아연실색했다.
진천은 물러섰다.
파즉살을 구사하는 데 필요한 도신(刀身)을 잃었으니 강민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계산이 어긋났다. 일순지간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강민이 손잡이만 남은 칼들을 들고 달려들자 진천은 황당했다.
강민의 눈에 서린 열패감이 광기로 바뀌었음을 간파한 진천은 결단을 내렸다. 목전의 외사촌은 끝을 내지 않으면 끝이라 인정하지 않을 위인이었다. 모친과 마찬가지로.
진천의 좌수에서 하얀 고드름이 돋아났다. 이지가 반쯤 마비된 상태에서도 강민이 움찔했다. 강기에도 쉽사리 손상되지 않는 보도(寶刀)를 칼로 무 자르듯 베어버린 밧줄이라면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은 그의 몸쯤은 공기를 가르듯 지나가며 두 동강 낼 터였다.
진천은 그의 절멸삭에 강민이 움츠러든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띄웠다. 뻑! 진천의 슬격이 명치에 작렬하자 뼈가 깨지는 기음과 함께 강민이 뒤로 날아갔다. 그리고 강민의 주장에 따르면 ‘당금 무림 최강의 후기지수를 가리는 역사적 비무’가 종결되었다.
꿀꺽. 꿀꺽.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여름날 연못가의 맹꽁이 울음소리처럼 여기저기서 올라오며 광장에 깔린 정적을 간지럽혔다.
이백여 군중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벌리고 장내를 주시했다. 승패 자체는 충격적인 결과가 아니었으나 하남신룡이 현시한 무위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관전자들 가운데는 강호(江湖) 어디를 가든 대접을 받는 강호(强豪)들이 즐비했지만 아무도 하남신룡에게 패배한 섬전도를 이기리라 자신하지 못했다. 그런 섬전도에게 사실상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하남신룡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늘의 일전이 있기 전 도박사들의 판돈은 거의 오대오로 양분되었다. 막상막하일 거라는 분석에는 이견이 없었으나 섬전도의 우세를 점치는 쪽이 약간이라도 많았다. 하남신룡이 구인결에서 꺾은 창천도군의 이름값을 감안하면 당연히 그에게 돈을 걸어야 할 테지만 당시의 승부 외적인 요소를 들어 그의 승리를 폄하하는 무리도 상당수였다. 반면 섬전도는 누구나 인정하는 강자인 자하검선에게 깔끔한 쾌승을 거둔 데다 북천도왕의 친손자라는 후광도 업고 있었다. 명가의 저력은 무시할 수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섬전도는 하남신룡의 상대로는 부족한 바가 있었다. 하남신룡은 비무 초반에 운 좋게 노림수가 통해 승리를 거머쥔 게 아니었다. 섬전도로 하여금 모든 재주를 쏟아 붓게 만든 연후 밑천이 바닥나자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은 것이었다. 이제 세상은 적어도 정파 무림에는 변방에서 올라온 천룡과 견줄 인재가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진천은 천천히 강민에게 걸어갔다.
피를 토하고 혼절한 강민을 보면서도 아무 감흥이 일지 않아 진천은 당혹스러웠다. 한 줌의 정도 느껴지지 않지만 어쨌거나 그는 외사촌 형이었다. 밀림 이족들의 풍습에서 사촌은 형제나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형제는 제 목숨이나 한가지였다.
진천은 친족의 정을 나누고 싶었던 이와 가까워지기는커녕 척을 지게 된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강민이 모친과 유사한 유형이라면 설욕을 다짐하며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히려 들 것은 불문가지였다.
쓴웃음을 지은 진천은 고개를 들어 그를 주시하고 있는 군중을 둘러보았다. 빠르게 면면을 살피던 진천은 처진 눈을 살짝 치떴다. 묘한 분위기가 장내를 휘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