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28
제127화
원주 강가에서 온 도호들은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들이었다.
그들의 수는 다른 사대세가와 달리 십여 명에 불과했다. 다수의 위세로 압박감을 주었다는 뒷말을 꺼린 강민이 최소한의 인원만 대동한 탓이었다.
강가를 제외한 오대세가 명숙들의 안색은 그들과 대조적이었다. 노골적으로 기쁨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다들 강민의 패배를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진천은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가 본의 아니게 그들의 공포심을 해소시켜준 것이었다.
두 달여 전 강가가 꽁꽁 감춰두었던 보물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겉으로는 찬사를 보냈지만 사대세가는 속앓이를 했음에 틀림없었다. 강민의 무력은 그의 조부인 북천도왕에게서나 전례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비슷한 나이 때의 북천도왕보다도 확연히 윗길이었다.
마령 문가를 필두로 한 전통의 세가들은 절망감에 휩싸였을 터였다. 마흔두 살에 맹주 위에 오른 북천도왕은 무려 사십 년이나 절대 권력을 유지하며 정파 무림에 군림해왔다. 그의 치세는 최소한 십 년은 지속되리라 보아야 했다. 어쩌면 이십 년이 될 지도 몰랐다.
이십 년 후면 강민이 마흔두 살이 될 터였다. 그의 조부가 정파 무림의 지존으로 등극했을 때와 정확히 같은 나이였다.
사대세가로서는 상상이 강요한 악몽을 떨쳐낼 수가 없었으리라. 만약 강민이 북천도왕에게서 곧바로 정맹의 지배권을 물려받는다면 그들은 도합 일백 년을 원주 강가의 시종 노릇을 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런 황망한 사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악몽이 실현되는 것을 예방하려면 사대세가가 똘똘 뭉쳐 원주 강가를 몰아내는 수밖에 없었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길한 미래를 두고 전전긍긍하던 차에 불안의 근원이었던 강민이 초장부터 날개가 꺾여버렸으니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사대세가의 명숙들로서는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었으리라. 결정적인 고비에서 좌절을 겪은 유룡(幼龍)은 성장세가 급격히 둔화되는 법이었다.
광장에 퍼진 불온한 공기의 연원(淵源)을 파악한 진천은 절로 쓴웃음이 났다. 사대세가에겐 그가 강민보다 강하더라도 만만한 상대로 보일 게 뻔했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은 진천이 고량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이를 부탁하오, 고 형.”
진천의 말귀를 알아들은 고량이 앞으로 나섰다. 아직 천지문에서 입은 부상이 완쾌되지 않았지만 성큼성큼 진천에게로 걸어온 고량이 강민을 안아들었다. 말없이 진천을 일별한 고량이 백와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군중이 황급히 터 준 길을 지나가는 그를 강가의 도호들이 부랴부랴 따라갔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진천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여러 방향으로 포권을 취했다.
“장소가 협소하지는 않으나 이곳에는 여러분들을 대접할 인력과 재료가 없습니다. 근처의 연화각과 포흥객잔에 음식을 마련하도록 해 두었으니 그리로 가셔서…….”
군중의 누군가 진천의 말을 잘랐다.
“우리는 섬전도와 너의 비무를 구경하러 삼보장을 찾은 게 아니다. 밥이나 먹고 가려고 온 것은 더더욱 아니고.”
진천은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 척이 될까 말까 한 땅딸막한 노인이 그의 시야에 잡혔다. 키는 작았지만 떡 벌어진 어깨에 두툼한 가슴팍이 다부진 느낌을 주었다. 하의를 말아 올려 드러낸 종아리는 터질 듯 탱탱하고 팽팽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노인의 질문에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르신.”
진천의 답변에 노인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노인은 성주 성가의 맹장 개천수(蓋天手) 성대진(成大進)이었다. 올해 일흔 줄에 들어선 성대진은 오늘 삼보장에 들어온 정맹의 인사들 중에서는 최강자였다. 성주 성가 무력 서열 이 위의 그는 조만간 용좌 위에 오를 것이 확실시 되는 거물이었다.
삼사 보를 내딛어 군중과 자신을 분리한 성대진이 뒷짐을 지며 진천에게 물었다.
“나의 직책도 알겠지?”
“알고 있습니다.”
성대진은 정맹의 집법단주(執法團主)였다. 공식적인 서열만 따지면 십칠 위의 고위직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용무로 내가 이곳에 온 지도 알 터이지?”
“…….”
진천의 침묵에 성대진이 미간을 모았다.
“어째서 대답이 없느냐?”
“알려주시지요. 경청하겠습니다.”
성대진이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자신의 원군이 있음을 진천에게 주지시킨 성대진이 입을 열었다.
“용무를 밝히기에 앞서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근자에 네가 전날 본맹에 의해 무림 공적으로 공표되었던 잔귀쌍마의 후인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더냐? 미리 경고한다만 거짓된 말로 나를 기만할 생각일랑 버려라. 나중에 허위임이 드러나면 열 배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야.”
“제가 그들의 진전을 이은 것은 맞습니다.”
진천이 선선히 시인하자 군중이 술렁거렸다. 뜻밖이라는 듯 게슴츠레한 성대진의 눈이 커졌다.
“흠, 제법 줏대가 있구나. 자고로 아비의 죄는 자식이 지고 스승의 과오는 제자가 물려받는 법이다. 네가 그 악종들을 사승으로 두었음을 인정했으니 그들의 죄과에 대한 처벌이 따를 터. 어쩌려느냐?”
“어떤 처벌을 말씀하시는지요?”
“네 사부들이 저지른 죄상에 응당한 벌은 천참만륙밖에 없으나 네게도 항변할 구실이 있을 터. 들어보고 정상참작의 여부와 네게 내릴 형(刑)의 수위를 결정하겠다.”
“천 마디 만 마디의 변명을 한들 사부들이 지은 죄를 일 푼도 해소할 수 없음을 압니다. 죽음으로써도 그들의 죄업을 갚지 못할 것입니다.”
“허면 네 사부들을 대신해 즉참의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말이더냐?”
“제 목숨을 바쳐 사부들의 죄가 씻기고 희생된 분들의 원혼을 달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하지만 감히 청컨대 제게 사부들의 악업을 조금이라도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많은 이들을 살려 사부들이 지은 살업을 백분지일, 아니 만분지일이나마 속죄하고 싶습니다. 일평생 선업에 헌신하겠습니다.”
“가당찮은 소리. 그럴싸한 가언(嘉言)이다만 결국 말 몇 마디로 때우겠다는 얕은 수가 아니더냐? 그런 식으로 넘어가면 세상의 어떤 악인을 처벌할 수 있겠느냐? 엄한 사람을 죽여 놓고 다시는 살인을 범하지 않을뿐더러 차후로는 선행을 하겠다고 맹세하면 용서가 되겠느냐? 아무 잘못도 없이 잔살광마에게 살해당한 민초의 수가 일천을 헤아린다. 그것도 그냥 죽였느냐? 숨이 끊어질 때까지 잔인하게 고문하다 육포 뜯듯 찢어죽이지 않았더냐? 머리를 부수고 뇌수를 파먹으며. 그 잔악한 행사에 숨져간 이들에게 지금 네 궤변이 통할 성싶더냐? 뼈를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선업을 지을 터이니 봐 달라고 하면 사부와는 다른 종자라며 기특하다고 손뼉이라도 쳐줄 것 같으냐?”
“…….”
“귀도마의도 마찬가지다. 도둑질이야 배상이라도 한다지만 그 악종이 저지른 짓으로 인해 화마를 입은 이만의 생목숨은 어쩔 셈이더냐? 설령 네가 이만이 아니라 이십만의 민중을 구휼한다고 해도 귀도마의의 죄악을 상쇄하려면 어림도 없다. 목숨은 목숨으로밖에 갚을 수 없음이야.”
“…….”
“어째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느냐? 더는 항변할 말이 없더냐? 선고를 내리기에 앞서 마지막 기회를 줄 터이니 남은 말이 있으면 마저 뱉어 내거라.”
“그에 앞서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저에 대한 판결은 이미 정해졌는지요? 아니면 집법단주께서 이 자리에서 결정하시는 건지요?”
“중차대한 사안에 대한 처리는 본맹 정심원(正心院)의 소관이다. 나도 정심원에 속해있긴 하지만 엄격히 따지면 결정사항에 대한 집행의 책임만 있을 뿐이다.”
“외람되오나 제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닙니다.”
“네 처분을 두고 대체적인 틀은 잡혔으나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번에 맹을 떠나기 전 정심원으로부터 비상시 즉결처분을 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받았다. 이제 만족하느냐?”
“알겠습니다. 답변 감사드립니다.”
진천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창공에 하얀 구름이 한가로이 떠돌고 있었다. 초추의 양광은 더 할 나위 없이 밝고 따사로웠다. 하지만 그의 심정은 음울하기 그지없었다.
눈을 내린 진천은 그에게 시선을 박은 수백 군중을 둘러보았다. 간혹 안쓰러워하는 눈길들과 마주쳤으나 절대다수가 경멸과 적의를 담은 안광을 여과 없이 쏘아내고 있었다. 진천은 정파 무림 명사들의 싸늘한 눈빛을 담담히 감내했다.
“저는 사부들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진전을 이은 것은 제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걸로 변명을 삼고자 함이 아닙니다. 다만 지금 제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그들의 제자가 되지 않을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철이 들고 사부들의 과거 행적을 알게 된 후 가슴이 문드러질 듯 참담했습니다. 제가 자란 곳은 열에 아홉이 악인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땅이었지만 사부들만큼 중대한 죄업을 짓고 도망쳐 온 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부들이 제 고향에 오기 전 저질렀던 악행을 들은 저는 결심했습니다. 훗날 바깥세상에 나가게 되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이 세상에 남긴 참혹한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하겠다고. 우연한 계기로 선업을 행하고자 하는 의인을 만나 그분을 도움으로써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고향을 떠나왔습니다.
부디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평생 참회하고 죽는 날까지 선업을 쌓겠습니다. 헐벗고 굶주린 이들을 돕고 악인들을 징치하겠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삿된 일에 빠져든다면 그땐 가차 없이 저를 벌하십시오.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진천이 진심을 다해 토해내는 호소에 장내가 숙연해졌다.
촌각의 정적이 흐른 후 성대진이 반응을 내놓았다.
“악에 뿌리를 두고도 물들지 않은 선기는 가상하나 그것만으로는 사면의 특혜를 주기 어렵다. 그나마도 네겐 나의 직권으로 아량을 베풀었음을 알아라. 원래 강호 공적의 후인에겐 해명의 변조차 허락지 않고 사형을 내리는 법이지만 마음껏 네 입장을 피력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았더냐.”
“…….”
“이제 본맹의 판결을 전하마. 네 사부들의 악행을 생각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죄를 물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으나 집법단주로서 네 변을 들어본 바, 네가 원하는 대로 한 번의 기회를 더 줄 참이다. 나와 집법단을 따라 본맹에 가자. 그리고 정심원에 출두해 최후진술을 하도록 해라. 너에 대한 최종적인 처분은 정심원이 결정할 터. 응하겠느냐?”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현재의 시점에서 정맹 행은 사지로 들어가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하지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에겐 비장의 패도 남아있었다.
마음을 굳힌 진천이 입을 열려는 찰나 심각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목소리가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장내에 뚝 떨어졌다.
“놀고 있네.”
성대진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웬 놈이냐? 썩 나서지 못할까?”
목소리가 날아온 방향으로 호통을 쳤던 성대진은 자신의 경솔함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오는 누리끼리한 그림자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그는 난쟁이였다. 천하에서 제일 유명한 난쟁이였다. 가장 골치 아픈 난쟁이이기도 했다.
권왕의 출현에 군중이 크게 술렁거렸다. 마령 문가의 도호들만이 그나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을 뿐 다들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성대진의 삼보 앞에 착지한 권왕이 성대진을 노려보았다.
“그래, 나섰다. 어쩔래?”
성대진의 눈동자가 바람을 맞은 촛불처럼 흔들렸다.
“궈, 권왕께서 여긴 어, 어쩐 일로…….”
권왕이 더듬거리는 성대진의 말을 싹둑 잘라먹었다.
“어쩐 일은, 이놈아. 나는 오면 안 되냐? 그나저나 어떤 애새끼가 그렇게 재수 없게 떠드나 했더니 성가의 꼬맹이였구나.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맨 정신에 개소리하는 습관은 여전하구나. 네놈이 네 죄를 알렷다. 하도 귀에 거슬려서 이를 잡을 수가 있어야지.”
권왕에 대한 공포심에도 불구하고 성대진은 울화가 치밀었다. ‘꼬맹이’는 그가 극도로 싫어하는 별명이었다. 절정의 경지에 든 사십사 년 전 이후 그의 면전에서 그 별명을 지껄이는 이는 권왕 밖에 없었다.
삼 척에도 미치지 못하는 난쟁이에게 ‘꼬맹이’ 소리를 듣자니 뱃속에서 분기가 치솟아 올랐지만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드러냈다가는 경을 치를 게 빤한지라 성대진은 표정관리를 했다.
“제 미흡한 점을 깨우쳐 주십시오, 어르신.”
권왕이 주먹을 들어보였다.
“일단 맞고 시작하자. 방금 나더러 ‘웬 놈’이냐고 했지?”
권왕의 주먹이 날아들기도 전에 성대진은 체통 불구하고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