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3
제12화
진천은 코를 찡그렸다.
퀴퀴한 냄새가 암굴에 가득했다. 한구석에 희끄무레한 인영이 보였다. 진천은 그림자에게로 다가갔다. 입구에 달빛이 고였지만 암굴 속은 제 손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웠다. 그러나 진천의 시력은 체념과 분노로 범벅이 된 얼굴을 뚜렷이 잡아냈다. 고량이었다. 진천이 고량의 몸에 손을 댔다.
“무슨 짓이냐?”
고량이 상처 입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진천은 아무 대꾸 없이 지나치다 싶을 만치 꼼꼼하게 고량의 전신을 묶은 쇠사슬을 마저 풀어 주었다.
고량이 특이한 해혈법(解血法)을 익혔을지도 모르니 마혈을 찍는 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는다며 ‘안전장치’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는 대장간의 작은 배씨였다. 동생이라 ‘작은 배씨’라고 불리긴 하지만 배불뚝이인 그는 말라깽이 형보다 몸무게가 두 배나 나가는 거한이었다. 그럼에도 만사에 느긋한 ‘큰 배씨’와 달리 매사에 예민하고 신중했다.
처러렁처러렁.
진천이 이 장 길이의 칙칙한 쇠사슬을 고량 옆에 쟁여 놓았다. 마치 코끼리가 싸 놓은 배설물 같았다.
“좀 어떻소?”
진천의 질문에 고량이 고리눈을 부릅떴다.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는 건가?”
“나는 고양이가 아니고 당신을 쥐라고 생각하지도 않소.”
“…….”
눈싸움이라도 벌이듯 두 사내가 눈꺼풀을 고정시킨 채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고량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왔나?”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소.”
“무슨 이야기?”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요.”
“…….”
진천과 고량은 다시 침묵의 경쟁에 들어갔다. 이번에 승리한 쪽은 고량이었다. 진천이 불쑥 물었다.
“대관절 황금 일백 관은 왜 필요한 거요?”
고량의 동공에서 살기가 폭사되었다.
“그 늙은이가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군. 네 알 바 아니다.”
진천이 미간을 모았다.
“늙은이라니, 말이 너무 거칠지 않소. 그래도 당신에겐 의숙인데.”
“…….”
“만약 나쁜 일에 쓸 게 아니라면 내가 당신을 도와줄 수도 있소만.”
“무슨 말이냐?”
“황금 말이오.”
“자옥을 내주겠다는 말인가?”
“그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소? 아타족(族)의 신성한 돌은 귀물(鬼物)이오. 욕심을 내다간 제명에 못 살 거요. 그런데 참 이상하군. 아타족의 땅은 밀림의 부족들도 모르는 비지(秘地)인데 노 대인이 어떻게 알고 있을까? 물어보는 걸 깜박했군.”
진천의 중얼거림에 잠시 망설이던 고량이 노덕 대신 답을 주었다.
“내 선친이 알려 준 거다.”
진천이 아는 체를 했다.
“주안철권이라 불렸다던 분 말이오?”
“그 늙은이에게서 많은 걸 들었구나.”
“그렇긴 하오만 늙은이라는 호칭은 이제 그만 쓰는 게 어떻겠소? 이러니저러니 해도 당신에겐 의숙이자 은인이 아니오.”
“흥, 제 얼굴에 금칠을 했군, 그 늙은이.”
“그렇지 않소. 오히려 전부 자신의 잘못이라고 합디다. 차마 말하기 어려운 치부까지도 드러내며. 오로지 당신을 구하려고. 노 대인의 절절한 호소와 간청이 아니었다면 당신은 무공이 폐지되고 지하뇌옥에 떨어졌을 거요.”
“…….”
“그나저나 고숭 대협은 어떻게 아타족을 알게 된 거요? 밀림 부족들도 모를뿐더러 외인의 범접이 불가능한 곳인데.”
“……젊은 날 선친은 잠시 포차(捕叉)로 일한 적이 있다. 흉인을 쫓아 밀림까지 들어갔다가 뱀이나 거미 같은 독물들에게 동료들을 다 잃고 홀로 헤매다 당신 역시 독충에 쏘여 빈사지경에 빠졌다더군. 피신했던 나뭇가지가 부러지며 아래로 떨어졌는데 마침 강가였기에 선친은 강물에 떠내려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얼굴에 파란 칠을 한 이족들이 당신을 둘러싸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러 대며 춤을 추고 있었다더군. 그때 당신이 자옥 위에 누워 있음을 알았다고 했다. 이족이 당신을 풀어 준 후 천신만고 끝에 밀림을 벗어나 중원으로 귀환했다더군.”
진천이 탄성을 질렀다.
“아, 기이한 사연이군. 고 대협께선 정말 운이 좋으셨소. 틀림없이 ‘거룩한 달’에 그곳에 들어가셨을 거요. 그렇지 않았다면 잡아먹혔을 테니.”
고량이 움찔했다.
“그들이 식인종이란 말인가?”
“그런 건 아니오. 음식이 아니라 제물로 먹는 것이니.”
“궁금한 게 있다.”
“……?”
“아타족의 자옥을 가져가는 게 어째서 위험하다는 건가? 미개한 족속 전체가 달려들어도 너 하나를 어쩌지 못할 텐데.”
진천이 고소를 머금었다. 그러더니 부목을 대고 칡넝쿨로 감은 왼팔을 들어 보였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거기 갔다 오는 길이오.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었소. 죽다 살아났으니까.”
고량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 * *
진천과 고량이 사담을 나누던 그 시각, 창인의 반대편에서는 두 노인의 대화가 한창이었다.
“아까는 그가 기절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소. 그렇게 새파랗게 질리다니. 그 대목이 그토록 충격적이었소?”
노덕의 의문에 조인상이 쓰게 웃었다.
“그렇기도 하네만 그보다는 자네 얘기가 천아의 조문을 찔렀기 때문일세.”
“조문이라면?”
“천아 어미 말일세. 자네 처가 손목을 긋고 자해하곤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아이는 필경 죽은 제 어미를 떠올렸을 걸세. 그녀도 천아가 자기 뜻대로 따르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위협했다네. 손목이 아니라 목에 비수를 대고 말이지. 시늉만이 아니었기에 정말 무시무시했다네. 결국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지.”
충분히 짐작 가능했기에 노덕은 ‘끔찍한 일’에 관한 구체적인 질문을 삼갔다.
“그런 독한 여인을 모친으로 두고서도 그리 반듯하게 자라다니 참으로 훌륭한 청년이구려.”
“이를 말인가. 천아는 진흙탕에서 피어난 연꽃과도 같네. 나는 타고난 악당은 몰라도 타고난 선인(善人) 따위는 없다고 믿는 사람이었지만 그 아이를 보고서는 생각이 바뀌었네.”
“갈수록 그의 부친이 누군지 궁금하구려. 선악의 본성이 태생적으로 결정되는지는 의문스럽지만 경험적으로 보아 부모의 성정이 어느 정도는 후세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사실인 것 같소. 그의 모친이 그런 여인이었다면 다른 한쪽이라도 순후한 인품의 소유자가 아니었을까 싶소.”
“동감일세. 하지만 알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 나는 설령 천아의 애비가 개차반이라도 놀라지 않을 걸세.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여자를 보는 안목이 개판임에는 분명하네. 어떻게 그런 못돼 먹은 악녀와 붙어먹을 수 있단 말인가. 아직 뼈도 여물지 않은 어린 자식에게 허구한 날 가혹한 매질을 일삼는 것으로도 모자라…….”
노덕이 헛기침을 하며 방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천의 부모에 대해 번갈아 가며 원색적인 험담을 쏟아 내던 조인상은 노덕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아까처럼 진천이 마침 그의 집으로 오고 있다가 듣기라도 하면 곤란해질 터였다.
노덕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어제부터 내내 신경 쓰이는 점이 있소. 그의 팔다리 말이오. 밀림에서 막 돌아왔다고 하던데 설마 날붙이도 사용할 줄 모른다는 미개한 이족에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 아니오? 독에 의한 부상은 아닌 듯한데.”
“나도 의외라서 어제 자네가 기절한 후 물어보았다네. 천아 말로는 밀림에서 강적을 만났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떼거지가 아니라 한 명과 싸우다 다친 거란 말이오?”
“그렇다더군.”
“놀랍구려.”
“이보게, 노 장주. 편견을 버리게나. 중원이 세상의 전부는 아닐세. 강가의 모래알처럼 많다는 기인이사가 꼭 중원에만 있으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밀림이라고 하지만 저 아래도 어마어마하게 넓은 땅이 있다네. 무지무지하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 중 천아를 능가하는 강자가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세.”
“그야 그렇소만 절정 이상의 무위를 가진 이는 중원 무림에도 흔치 않잖소.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구려. 그의 상대는 누구였소?”
“얼굴을 파랗게 칠하고 다니는 놈이었다더군. 이번에 천아는 꽤 멀리까지 탐사했던 모양일세. 그러다 사람을 납치해 잡아먹는다는 종족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고 했네.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자주 밀림에 들락거려 그곳의 부족들과 아주 친하다네. 여기에 이족이 이주해 온 것도 절반 이상이 천아의 공일세. 그들은 우리만큼이나 천아를 좋아한다네.
어쨌거나 천아는 괴담을 흘려듣지 못하고 추적해 갔다네. 그러다 그 이야기가 허위가 아님을 확인하고는 갈등에 빠졌지. 그 아이는 기본적으로 각 부족의 풍습과 전통을 존중하는 입장일세. 하지만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문제에 관해서는 방관하기 어려웠지. 그래서 고민 끝에 그들을 찾아갔다네. 그런 행위를 중지하도록 ‘부탁’하기 위해서 말일세.
물론 그들이 천아의 요구를 들어줄 리 만무하지. 오히려 그 아이를 잡아 제물로 바치려고 했다더군. 천아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제압했다네. 그러고는 그들로부터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지. 그들도 인육을 즐기지 않지만 그들이 모시는 ‘수호자’ 때문에 먹어야만 했다고. 그래서 천아는 매달 한 차례 방문해 살육의 축제를 벌인다는 그 부족의 수호자란 작자를 기다렸다네.
마침내 그자가 왔고 천아는 대화를 시도했네. 하지만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작자였다더군. 그래서 치고받고 싸웠다지. 혈전 끝에 그자를 때려눕히고는 다시는 식인을 않겠다는 다짐을 받으려 했지만 이만 갈았다더군. 하지만 종내에는 ‘너를 잡아먹을 때까지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겠다.’고 타협했다지. 천아는 그 약속을 얻어 내고는 그곳을 떠났네. 그게 그 아이의 부상에 얽힌 전모일세.”
“허어, 참으로 신기한 이야기구려.”
“더 신기한 게 있다네.”
“……?”
“그 식인족이 누군지 아는가? 바로 자네가 자옥을 가지러 가고자 했던 아타족일세. 천아는 어제 객잔에서 자네가 ‘보옹’의 지리를 물었을 때 의아했다더군. 왜냐하면 보옹에서 강을 따라가면 아타족의 숲이 나오기 때문일세. 중간에 젊은 놈들 패싸움 때문에 객잔을 나왔을 때 잠시 들렀던 나한테서 자네가 중원의 유명한 상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아타족이 ‘신성한 돌’이라 부르는 자옥을 노리는 것이라고 짐작했다더군. 천아가 몹시 싫어하는 게 두 가지 있네. 살인과 도둑질일세. 자네가 남의 물건을 탐낸다고 생각하자 그 아이의 심사가 편치 않았지. 그런데 한편으로는 자네가 어떻게 밀림의 부족들도 알지 못하는 아타족의 돌에 대해 알고 있는지 궁금해하더군.”
노덕이 안색이 어두워졌다.
“의형에게 들었소. 표사가 되기 전 의형은 포차였소. 그는 당시 큰 포상금이 걸린 자를 쫓아 밀림까지 들어갔다가 우연히 그곳에 이르렀다고 했소. 거기서 ‘송아지만 한 자옥’을 봤다고 하더군.
나는 의형에게 위치를 물어보았소. 딱히 그 물건에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상인의 호기심에서였소. 그는 워낙 험하고 넓은 지역이라 자기도 다시 찾아갈 수 없을 거라면서도 하나의 지명을 알려주었소.
그게 ‘보옹’이오. 보옹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을 타고 가다 보면 삼지창처럼 솟은 세 개의 봉우리가 나오는데 그중 가운데에 자옥을 가진 부족이 산다고 했소. 벌써 이십여 년 전 일이오.
까맣게 잊고 있다가 작년 봄 파산하고는 실의에 빠져 있던 중 불현듯 의형의 이야기가 떠올랐소. 이족에겐 아무 쓸모도 없을 그 돌덩이가 나에겐 재기의 밑천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는 의질에게 동행을 청해 함께 남행한 것이었소. 하지만 나는 또 한 번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소.”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조인상이 짓궂게 캐물었다.
“결정적인 실수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