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30
제129화
청량한 목소리가 무거운 공기를 뚫고 장내를 갈랐다.
“진정하십시오.”
진천은 의형이 ‘큰 형님’이란 호칭을 덧붙이지 않은 그의 의중을 헤아려주길 바랐다.
진천을 슬쩍 쳐다본 권왕이 헛기침을 했다.
“헛험, 내가 저 아이의 역성을 들려는 게 아니다. 과거사를 들추면 정맹에도 제 발이 저릴 작자들이 부지기수임을 지적하려던 게다. 처음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거라들. 역지사지. 남의 뺨에 묻은 재를 욕하려면 먼저 자기 주둥이에 묻은 똥부터 닦아야 하느니라. 내 말에 이견이 있는 놈들은 튀어나와라. 무림의 방식으로 해결하자.”
누가 나서겠는가.
권왕이 진천과 성대진에게 양팔을 벌렸다.
“나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너희들끼리 해결해라.”
떨떠름한 얼굴의 성대진을 보며 진천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정맹으로의 출두를 얼마간 유예해주시면 안 될는지요? 벌려놓은 일들이 여럿인데 어느 정도 매듭을 지은 연후 찾아뵙고 싶습니다. 늦어도 올해 안에는 반드시 가겠습니다.”
성대진은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일축하지 못했다. 일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권왕이 무언의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진천의 청을 거절했다간 권왕이 한바탕 난리를 칠 게 빤한지라 성대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한을 정하는 것은 네가 아니고 우리다. 연말이 아니라…….”
권왕의 눈빛이 사나워지자 성대진은 뒷말을 바꿨다.
“내년 초가 될 수도 있다. 매우 바쁜 시기이니 지금으로선 특정하기 어렵다. 추후 통보하마.”
진천이 포권을 취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권왕이 이가 다 빠져 오므라든 입술을 활짝 벌리며 파안대소했다.
“훈훈한 결말이로다. 내 중재의 공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구나. 그런 의미에서 너희는 응당 나에게 감사해야 하느니라.”
진천이 얼른 지시에 따랐다.
“감사드립니다.”
성대진이 마지못해 호응했다.
“감사드리오, 어르신.”
권왕의 백미가 휙 올라갔다.
“감사드리오? 갑자기 혀가 짧아졌더냐? 길게 뽑아주련?”
“아닙니다, 어르신. 오랜만에 어르신을 뵈어 긴장한 탓에 ‘감사드리옵니다.’라고 하려다 실수한 것뿐입니다.”
“그래? 거짓말이면 진짜로 혀를 뽑아버린다.”
“하늘에 맹세코 정말입니다.”
“한심한 놈. 그만한 일을 갖고 맹세까지 할 건 무어냐. 여하간 이제 다시 이를 잡아야 하니까 예서 떠들지 말고 썩 물러들 가라. 아니면 회포도 풀 겸 나하고 모처럼 대작해 볼 테냐? 원하는 놈들은 남거라.”
너나 할 것 없이 권왕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정문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장내에 남은 이는 진천을 제외하면 두 명의 여인뿐이었다.
진천은 권왕과 죽림의 공터로 갔다.
바위에 뛰어올라 걸터앉은 권왕이 선수를 쳤다.
“잔소리하지 마라, 아우야. 그 꼬맹이의 헛소리를 듣고 있자니 속에서 열불이 나서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었느니라.”
진천이 쓰게 웃었다.
“잘 하셨습니다, 큰 형님.”
“엥? 진심이냐?”
“그렇습니다. 속이 후련했습니다. 정맹의 인사들을 질타하는 큰 형님의 사자후를 듣고 있자니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특히 역지사지를 강조하신 점은 단연 백미였습니다.”
권왕이 미심쩍다는 듯 가는 눈을 잔뜩 찡그렸다.
“아부를 하는 성정이 아님을 안다만 어째 찝찝하구나. 내 언설이 훌륭하긴 했지만 네 녀석 당부를 어겨 기껏 깔아놓은 판을 그르치게 생겼으니 한 소리 들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지요.”
“거 봐라. 이제야 본심을 털어놓는구나. 뭐, 막가를 이리로 끌어들여 껍질을 벗기려던 작전은 완전히 무산되었을 테지? 내가 너와 한통속임이 드러났으니 그 겁쟁이가 기어들어올 리가 없지 않으냐?”
“아닙니다. 큰 형님이 선을 넘지 않으신 덕분에 결정적인 비밀은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조건이 달라지긴 했지만 장왕이 저를 치러 삼보장을 찾을 가능성은 아직도 절반이 넘습니다.”
“결정적인 비밀이란 게 우리의 관계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장왕은 큰 형님의 출현과 개입이 돌발적인 사태라고 판단할 공산이 큽니다. 평상시의 행동방식으로 보건대 크게 이상하다고 여기진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전보다 주의를 기울이긴 하겠지요.”
“그렇다면 금명간 온다고 보아야겠구나. 네가 찍은 날짜가 닷새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아느냐?”
“그보다는 늦을 것입니다. 돌다리를 두드려 볼 테니까요. 그리고 가능성이 절반을 넘을 거라 한 것은 우리 쪽에서 조치를 취했을 경우입니다. 그냥 두면 오지 않거나 오더라도 아주 늦게 올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조치? 무슨 조치?”
“미끼를 던져야지요.”
“무슨 미끼?”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지긴 했지만 아직 한낮에는 더위가 여전한데 시원한 평북 무림으로 바람이나 쐬고 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큰 형님?”
“갑자기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그렇게 비실해실 웃지 말고 알아듣기 쉽게 풀어놔 보거라.”
진천의 설명을 들은 권왕이 까끌까끌한 턱수염을 문질렀다.
“쩝, 내가 뿌린 씨니 거둘 밖에. 오냐. 한 번을 했는데 두 번을 못 할까. 까짓 것 네 말마따나 바람 쐬는 셈치고 후딱 갔다 오마.”
“고맙습니다, 큰 형님.”
“헌데 늙은 나를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니냐?”
“죄송합니다.”
“혹시 아예 잘못 짚은 걸 오늘 일을 핑계로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속셈은 아니겠지? 오양의 일이 있은 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왔으면 진즉 왔을 성싶은데. 막가는 애당초 올 생각이 없었던 게야. 안 그러면 이렇게 오래 미적거릴 까닭이 없지 않으냐?”
“장왕의 입장에서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을 겁니다. 두 가지 사안을 확실히 처리해야 했을 테니까요. 남북천의 도왕들이 관련되어 있을 지도 모르니 그로서는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련과의 마찰을 꺼린 벽력도문이 대웅을 파문했고 저에 관해서도 원주 강가로부터 자신들과 관련이 없다는 확답을 받았을 테니 이제 무력행사에 나서는 데 장애물이 없어진 셈입니다. 그러니…….”
“잠깐. 네 말엔 어폐가 있다. 그 정도 일을 처리하는 데 한 달씩이나 걸릴 턱이 없지 않으냐. 길어도 보름이면 충분할 터. 벽력도문이 그 삐쩍 마른 녀석을 제 알 바 아니라고 내친 게 벌써 스무 날 전이다. 그렇다면 막가가 열 번은 쳐들어오고도 남았을 시간이 아니더냐?”
“제가 구월 십사일로 날짜를 잡은 것은 오늘의 행사 때문이었습니다. 장왕은 저와 섬전도의 대결에 정맹의 인사들이 대거 관전하러 오리라 예측했을 것입니다. 제 사문이 밝혀졌으니 정맹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라 보았을 테고요. 이곳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봐서 행동에 돌입할 시기를 선택하려 했겠지요.”
“그럴듯하다만 우둔한 막가가 그렇게 복잡하게 머리를 굴렸을 성싶지는 않구나. 나중에 막가를 만나면 사생결단을 내기에 앞서 물어봐야겠다. 정말로 그런 식으로 주판을 튕겼는지.”
“…….”
“그리고 네가 오늘 정맹으로 끌려갔으면 만사가 달라졌을 게 아니냐? 그들이 그렇게 나오리라 예상하지 못했더냐?”
“몇 가지 가정했던 줄기 중에 있었습니다.”
“허면 그 꼬맹이를 따라갈 작정이었더냐?”
“네.”
“어쩌려고? 용기는 가상타만 범의 아가리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격인데. 너무 네 재주를 믿는 게 아니냐? 까딱했다간 옴짝달싹 못한 채 네 사부들의 죄를 뒤집어썼을 게다. 처형이 아니라 근맥절단의 형을 받더라도 낭패가 아니더냐. 요즘 정심원 것들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아까 꼬맹이의 수작을 보건대 옛날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을 터. 차라리 벽하고 얘기하는 게 덜 답답할 꽉 막힌 족속들이다. 명민한 녀석이니 그 점을 간과했을 리는 없을 테고 필히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겠지, 아우야?”
“대비책까지는 아니지만 생각해 둔 바는 있습니다.”
“무엇이더냐?”
진천은 권왕과 헤어져 청와옥으로 갔다.
다연실(茶宴室)에 뜻밖의 손님이 앉아있었다. 자하검선 팽하연이었다. 반 시진 전 권왕의 축객령에 군중이 썰물처럼 빠져나갔을 때 팽하연은 하수린과 더불어 삼보장에 남았던 두 여인 중 한 명이었다. 그녀가 아직도 남아있을 줄 몰랐던 진천은 내심 반가웠다.
“어서 오게, 아우님.”
여상구가 유난스럽게 진천을 반겼다. 진천은 의형이 자하검선과 독대한 자리를 불편해했음을 알았다.
“권왕 어르신은 같이 안 오셨는가?”
“방금 떠나셨습니다.”
팽하연을 의식해 진천은 ‘큰 형님’이라는 주어를 생략했다. 눈치를 챈 여상구가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미안하네, 아우님.”
진천은 의형이 무엇을 사과하는지 단박에 이해했다. 여상구는 팽하연에게 이런저런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그와 권왕의 관계를 포함해.
“여 각주, 아니 이젠 각주가 아니니 여 공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무튼 여 공의 잘못이 아니니 그를 탓하지 말아요. 내가 호기심 많은 여자아이마냥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빈 소리를 못하는 여 공이 당한 거니까.”
진천은 팽하연에게 포권을 하며 뒤늦게 인사했다.
“진천이 자하검선을 뵙습니다.”
팽하연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나를 아는군요. 영광이에요. 무림의 초신성이 알아봐 주다니. 보잘것없는 이름이지만 인생을 헛살지 않은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진천은 팽하연의 서글서글한 음성이 마음에 들었다.
“인연이 있던 여 공에게 인사나 하고 가려다 대화가 길어졌네요. 그러다 속 깊은 얘기까지 하게 돼서 이렇게 결례를 범하고 있었어요.”
진천은 ‘속 깊은 얘기’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의형이 과거의 연심을 고백하기라도 했을까.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개구리가 황소를 삼킬 확률만큼이나 낮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남녀 간의 문제에서 의형은 의외로 숙맥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밖에 없었다. 짐작대로였다.
“세평회에 관해 들었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진 공자가 사실상의 회주라니 감히 청하겠어요. 나도 일원으로 받아들여주길 바래요.”
예상했으면서도 진천은 당혹스러웠다.
“내가 너무 성급했나요? 절차도 거치지 않고. 하지만 여 공 말로는 파사현정의 의지와 처지가 어려운 양인(良人)들을 돕겠다는 협심(俠心)만 있으면 누구라도 세평회에 들 수 있다고 하더군요. 내가 잘못 들은 건가요?”
“아닙니다. 형님 말씀처럼 세평회는 정의를 구현하고 평화를 실현하기를 바라는 이들에겐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검선께선 정맹의 용호이신데다 천검단(千劍團)의 부단주(副團主)이기도 하시니 세평회에 가입해 활동하시려면 적잖은 부담이 따를 것입니다. 저희는 이미 마련과의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팽하연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점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말아요.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어요. 내가 정맹을 나오면 되니까. 철곤귀도 벽력도문에서 파문당했다죠? 나도 곧 팽가에서 쫓겨날 거예요. 그러니 나를 받아줘야 돼요. 가문마저 버리고 나왔는데 갈 곳이 없으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진천은 인생이 걸린 중대한 결심을 담소를 나누듯 가벼운 어투로 밝히는 팽하연의 뱃심에 감탄했다.
“아까 진 공자의 변을 들으며 탄복했어요. 그런 선기와 웅지를 가진 젊은이가 얼마 만인지. 나를 비롯한 정파의 위선자들에게 떨어진 권왕 어르신의 일갈을 들으면서는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어요. 여 공에게서 세평회의 목적에 관해 들었을 때는 번개에 머리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어요. 부디 나를 받아들여줘요, 진 공자.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마도 타도와 정파천하(正派天下)의 대업에 동참하고 싶어요.”
진천은 팽하연에게 고개를 숙였다.
“불감청인언정고소원입니다. 검선께서 함께 해 주신다면 저희에게 크나큰 힘이 될 것입니다.”
여상구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내상이 낫지 않았지만 환영의 축하주를 마시지 않을 수 없겠군. 술을 즐기지 않는 걸 잘 아네만 오늘은 아우님도 꼭 한 잔 걸쳐야 하네.”
진천이 화답했다.
“물론입니다, 형님.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의좋은 의형제의 모습을 바라보는 팽하연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