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32
제131화
장왕을 본 사인(四人)은 그가 예상했던 반응을 보였다.
그들이 일제히 귀신을 본 듯한 표정을 짓자 장왕은 괜히 흡족했다.
다음 장면도 그가 예상했던 범위 안에 있었다. 일순지간의 마비 끝에 짧은 경악성을 토해내며 벌레들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난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장왕의 푸짐한 볼 살이 풍을 맞은 듯 푸들거렸다. 수천 평은 됨직한 지하연무장 곳곳에 굴이 나있었음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 굴들이 외부로 뚫려있다면 이곳은 쥐들을 가둔 거대한 독이 아니었다.
예상 밖의 사태에 당황한 장왕은 본능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냥감 뒤를 쫓았다. 진천이었다.
“거기 서라.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 나는 너희와 얘기를 하러 왔을 뿐이다.”
장왕의 심후한 공력을 담은 음성이 지하연무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그의 말을 믿고 도주를 중단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장왕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꼬드김을 포기하고 추격에 집중했다. 진천이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있었지만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장왕은 진천이 우측의 동굴로 들어가기 전에 따라잡았다. 그가 삼사 장 뒤에서 장공을 발출하자 진천은 감히 안으로 들지 못하고 옆으로 피해냈다. 그러나 장공의 여파에 휩쓸려 중심을 잃고 나뒹굴었다.
엎어진 상태로 진천이 장왕에게 절멸비를 쏘았다. 장왕은 경시하지 않고 강화한 호신강기로 튕겨냈다. 그 찰나의 지연을 틈타 진천이 동굴로 스며들었다.
장왕은 지체 없이 진천을 따라 입굴했다. 다행스럽게도 동굴은 비대한 그가 지나가기에 충분히 넓었다. 그러나 창자처럼 길이 구불구불해 진천을 조준하는 데 애를 먹었다. 등을 뭉갤만하면 진천이 굽은 길로 잽싸게 돌아가자 장왕은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화를 삭이고 냉정하게 굴어야 했다. 자칫 사냥감이 아니라 엉뚱한 벽을 때리면 동굴이 통째로 붕괴될 우려가 있었다. 그렇다 해도 흙더미에 파묻혀 질식할 일은 없겠지만 사냥감을 놓치면 낭패였다. 이천사백 리를 날아온 보람이 없지 않은가.
진천과의 거리가 삼사 장에 불과했지만 장왕은 공격을 삼가고 추격에 주력했다. 속도의 현저한 차이로 인해 이제 두세 호흡이면 진천의 목덜미를 낚아챌 수 있을 터였다.
마침내 진천의 일이 장 뒤에 붙은 장왕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거리에서는 제 아무리 신묘한 신법을 구사한다고 해도 절대로 그의 그물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었다. 우수를 앞으로 뻗어 진천의 등짝에 일관(一貫)을 발출하려던 장왕은 멈칫했다. 형언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심장을 쓸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궁리할 겨를 따윈 없었다. 불문곡직 몸을 튼 장왕은 진천 대신 후방에 장공을 갈겼다.
쾅!
폭약이 터지는 굉음과 함께 장왕이 뒤로 쭈르륵 밀려났다. 시큰거리는 손목을 살필 새도 없이 장왕이 뾰족한 괴성을 내질렀다.
“무슨 짓이냐, 늙은이?”
권왕은 장왕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재차 권강을 날렸다. 그러나 충격을 추스른 장왕의 반격에 이번에도 별 이득을 보지 못하고 평수를 이루어야 했다.
자책감으로 권왕의 면상이 찌그러졌다. 천려일실이었다. 대어를 낚았다는 희열감에 내기를 분출하는 바람에 장왕에게 은신을 들키고 말았다. 찰나의 방심으로 완벽한 기습의 효를 날려버린 것이었다.
진천의 권고에 따라 평북 무림에 가서 이런저런 소동을 일으키고 다닌 것은 장왕을 안심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 장왕은 그의 행적을 면밀히 살펴보다 세평회와는 관련이 없음을 확신하고서야 움직일 터였다.
권왕은 진천이 지시한 날에 삼보장으로 돌아왔다. 진천은 늦어도 사흘 내에는 장왕이 오리라 예견했다. 그리고 오늘이 이틀 째였다.
진천은 반드시 암습을 성공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겁한 짓이라 내키지 않았지만 권왕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정당당한 생사결의 방식으로는 기껏해야 동귀어진이 최선이었다. 장왕과 더불어 염왕을 알현하러 간들 아까울 것은 없지만 그리되면 남은 아이들이 마왕을 상대할 방도가 없었다.
진천의 무재는 무황 나중강에 비견할 수 있을 만큼 출중했으나 그를 포함한 팔대무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하려면 아직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까지는 그가 바람막이 되어 주어야 했다.
권왕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내었다. 나중 일까지 심려할 계제가 아니었다. 장왕이 눈앞에 있지 않은가.
불끈 쥔 두 주먹에 십이 성의 공력을 불어넣으며 권왕은 전의를 다졌다. 기필코 장왕을 박살 낼 참이었다. 탐욕스럽고 졸렬하고 야비한 돼지에게 질 수는 없었다. 그에게 부채의식이 있지만 이젠 떨쳐내야 할 때였다.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권왕의 첫 일격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은 오늘의 일진이 예정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을 공산이 크다는 뜻이었다. 권왕과 장왕의 무력은 막상막하라고 보아야 했다. 오랫동안 권왕이 상수였다지만 지금은 오히려 장왕이 극미한 차이나마 우위에 있을 가능성도 상당했다. 장왕은 전성기가 끝나지 않은 반면 권왕은 쇠퇴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꼭 불리한 것은 아니었다. 장왕은 혼자지만 권왕에겐 그가 있었다. 물론 장왕도 십중팔구 방수들을 대동했을 터였다. 둘일 듯싶었지만 그 이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무위는 공히 초절정일 게 틀림없었다.
장왕은 그들을 지하연무장의 지상 입구에 대기시켜 두었을 것이었다. 행여나 그의 마수에서 빠져나오는 세평회 인사들을 잡기 위해.
진천은 서둘렀다. 장왕이 수하들을 부르기 전에 끝을 보아야 했다. 기실 동굴로 그를 유인한 데는 권왕의 은신과 기습을 용이하게 하려는 것 외에 작전이 실패로 돌아갈 시 장왕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역천기결을 운용한 진천은 좁은 동굴 안에서 권왕과 격돌하고 있는 장왕의 비대한 몸통을 절멸삭으로 감아갔다.
“빨리 들어와라!”
예닐곱 살 어린아이가 내지른 것 같은 얇고 높은 음성이 동굴을 빠져나갔다. 내공이 실린 그 목소리는 지하연무장을 가로질러 계단으로 올라갔다.
경황 중에도 소중걸과 화염장 기상길(奇常吉)을 부른 장왕은 좌충우돌했다. 우장(右掌)으로 권왕의 권강에 맞불을 놓는 동시에 뒤에서 그를 노리고 달려드는 진천에게도 남은 손으로 장공을 날렸다.
커흑. 억.
두 개의 기음이 동굴을 울렸다. 하나는 장왕이 낸 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진천의 신음성이었다.
진천 때문에 권왕에게 전력을 쏟아내지 못한 장왕은 내상을 입었다. 그의 입술에서 선혈이 흘렀다. 진천은 장왕보다 상태가 나빴다. 피를 토하고 날아간 진천은 동굴 벽에 처박혔다.
절멸삭으로는 장왕이 두텁게 두른 호신강기를 자를 수 없음을 직감한 진천은 절멸삭을 당겨 그에게 바짝 붙은 후 절멸참으로 손목을 베어갔었다. 호신강기가 균열을 일으키자 대경실색한 장왕이 진천을 뿌리쳤다. 진천은 장왕의 좌수에 실린 거력을 감당치 못하고 튕겨나간 것이었다.
장왕은 진천에게 가일수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력이 없었다. 진천의 절멸참에 손목이 상해서가 아니라 권왕의 무지막지한 권강이 그를 덮쳐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왕은 쌍장으로 권왕의 맹공을 차단했다. 쌍방 전력을 다한 결과로 양자 모두 뒤로 밀려나갔다.
장왕은 저절로 진천이 쓰러진 곳으로 이동했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도 권왕을 주시하며 장왕이 상체를 비틀어 진천에게 소멸지(掃滅指)를 쏘았다. 두툼한 그의 검지에서 날아간 실오라기 같은 지공(指攻)이 진천의 두부에 꽂혔다. 간단한 일수처럼 보이지만 반 자 두께의 철근도 꿰뚫는 신공이었다. 하지만 장왕은 쾌재를 부르기는커녕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즉사했어야 할 진천의 가쁜 숨소리가 원래의 목표지점 바로 옆에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진천이 혼절하지도 않았고 운신불능의 상태도 아님을 확인한 장왕은 기가 막혔다. 애당초 그의 쇄혼수(碎魂手)에 정통으로 걸리고도 명줄이 붙어있다는 것 자체가 마뜩찮은 일이었다. 그런데 신법을 발하기까지 하다니. 참으로 질긴 놈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튕, 튕, 튕. 신경을 거스르는 불쾌한 기성과 함께 안면이 흔들리자 장왕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애송이, 아니 어린 괴물이 날린 암기가 호신강기에 맞고 튕겨나간 것이었다. 우안은 괜찮았지만 두 개가 꽂힌 좌안에서는 극통이 올라왔다. 안구가 찢어졌음을 직감한 장왕은 노기로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엎어진 채 미동도 없는 진천에게 화풀이를 할 여유는 없었다. 수백 년 공력이 담긴 권왕의 주먹질이 그의 동체에 쏟아지고 있어서였다. 권왕을 상대로 미친 듯이 쌍장을 휘두르던 장왕은 그제야 자신의 오른손이 온전치 못함을 알아차렸다. 호신강기를 자르고 들어왔던 진천의 절멸참에 손목이 상한 것이었다.
장왕은 간이 졸아들었다. 무리를 하다 좌수가 영구적으로 불구가 될 것을 우려해서만이 아니었다. 전력을 발할 수 없다면 당장 목숨이 간당간당한 형국이었다. 맹공을 퍼붓는 권왕에게선 오랜 세월의 정리를 내팽개친 살기가 완연했다.
장왕은 암담했다. 권왕의 저지를 뚫고 동굴을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했다. 설사 정상적인 상태라 해도 작심하고 달려드는 권왕을 밀어내기란 어려웠을 터였다.
장왕은 난국을 타개할 방도가 하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하남신룡을 인질로 삼아 권왕의 양보를 받아낼 수 있을는지 의문이었기에 그 방면으로의 미련을 버린 장왕은 우장(右掌)에 온 내력을 끌어 모아 방금 떠올린 방책을 결행했다.
소중걸과 기상길은 서로의 보기 싫은 면상을 마주보았다.
격전의 소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그들을 부르는 장왕의 명이 올라왔다. 이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다. 장왕의 목소리엔 분산하는 사냥감들을 일거에 포획하지 못한 데서 오는 당혹감보다는 그들의 반격에 놀란 사냥꾼의 다급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장왕은 세평회의 종자들이 전부 달려들어도 공깃돌 다루듯 갖고 놀 수 있는 절대강자였다.
동지애라고는 참새 눈물만큼도 없는 동료의 낯짝을 바라본다고 의문이 풀리는 것은 아니었기에 젊고 늙은 두 마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백 번 생각하는 것보다 한 번 행동하는 게 나았다.
그 와중에도 기상길은 소중걸에게 선봉을 양보했다. 장마류의 미래라는 애송이를 존중해서가 아니었다.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장왕이 급박하게 그들을 부른 데에는 필히 사정이 있을 터였다. 결코 긍정적인 내용이 아님은 불문가지였다.
만에 하나라도 지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소중걸이 먼저 맞닥뜨리도록 하는 편이 안전했다. 그런 연후 상황을 봐서 진퇴를 결정할 심산이었다.
기상길의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중걸은 거암이 비탈을 구르듯 엄청난 속도로 계단을 내려갔다. 순식간에 바닥에 이른 소중걸이 앞뒤 가리지 않고 지하연무장으로 들어가자 그를 따르던 기상길은 입구에 멈춰 서서 추이를 살폈다.
지하연무장에 들어선 소중걸은 굵은 눈썹을 한껏 찡그렸다. 삼천 평이나 된다는 넓은 공간이 텅 비어 있었다. 사방에 난 동굴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 소중걸에게 뒤늦게 들어온 기상길이 소리쳤다.
“저기다!”
굳이 기상길이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좌측의 동굴 중 하나에서 굉렬한 기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중걸은 동굴 쪽으로 경신을 전개했다. 잠시 망설이던 기상길은 입구를 돌아본 후 소중걸을 쫓았다. 그러나 동굴에 이르기 전에 두 사람 모두 발을 새워야 했다. 백만 근의 화약이 터지는 듯한 폭음이 들리더니 지하연무장 전체가 무너질 듯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