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33
제132화
진동이 잦아들었다.
지하연무장은 별 탈이 없었지만 동굴은 그렇지 못했다. 내부에서 일어난 폭발로 통째로 붕괴된 것이었다.
기상길이 찢어진 눈을 부라렸다.
“쥐새끼들이 저 동굴에 화약을 설치해 장왕을 끌어들였군. 어쩌다 저런 유치한 함정에…….”
기상길은 말을 맺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위쪽의 동굴에서 하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백의를 걸친 서른 살 안팎의 청년이었다. 하지만 지상길은 그의 실제 나이가 그 두 배임을 알고 있었다. 세평회의 종자들 중 최강자라 평가받는 태극마선의 용모화를 질리도록 보았기에 몰라볼 수가 없었다.
“가소로운 놈들. 이런 어설픈 수로 장왕을 잡을 거라 생각…….”
기상길은 이번에도 중간에 말을 멈춰야 했다. 부채를 빼어든 여상구가 살벌한 살기를 발산하며 불문곡직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쌍장에 공력을 모은 기상길은 어지러이 회전하며 그에게 날아오는 청홍의 강기를 그의 별호이자 성명절기인 화염장(火焰掌)으로 태워버렸다. 기상길의 손바닥에서 발출된 시뻘건 불길이 태극선강을 튕겨버리고 여상구를 휘감았다. 여상구는 감히 호신강기로 받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일합에 우위를 과시한 기상길은 여상구에게 동굴로 피신할 여유를 주지 않고 바짝 몰아붙였다. 이십여 초의 공방 끝에 퇴보를 밟다 중심이 흐트러진 여상구는 바윗돌만한 쇳덩이도 녹여버린다는 화염강(火焰剛)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유일한 퇴로인 공중으로 비상하며 여상구가 필사적으로 태극탄살(太極彈煞)을 쏘아냈다. 그러나 그의 비기는 구명절초가 되어주지 못했다. 우장으로 탄강들을 막아내며 기상길이 좌장으로 허공에 뜬 여상구에게 지옥의 불을 뿜어냈다.
불에 든 나방 신세가 된 여상구는 최후를 직감했다. 그에겐 사랑하는 의제의 비환 같은 신기를 부릴 재주가 없었다. 자신을 덮쳐오는 화마를 직시하며 여상구가 이마주름을 잡았다.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으나 장왕을 유인했던 동굴에 갇힌 의제의 안위는 염려스럽기 그지없었다.
진천은 이를 악물고 장왕의 발목을 겨냥해 절멸삭을 날렸다.
궁지에 몰린 장왕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예상하고도 남았다. 그는 틀림없이 동굴을 무너뜨림으로써 권왕의 공세에서 벗어나고자 할 것이었다. 진천은 동굴이 붕괴되기 전에 장왕에게 조금이라도 더 피해를 줄 참이었다.
장왕은 근거리에서 감당해야 했던 권왕의 맹공에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었을 것이었다. 거기에 진천은 장왕의 우장에서 쏟아지는 장공의 위력이 현저히 줄어들었음을 확인했다. 그의 절멸참에 그어졌던 손목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는 방증이었다. 장왕을 가까이에 끌어들여 목숨을 걸고 날렸던 절멸비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은 적어도 장왕의 안구들 중 하나는 심하게 손상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진천이 쏘아낸 절멸삭은 그로서는 아쉽게도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사방의 벽에 무차별적으로 장공을 퍼붓는 중에도 위기감을 느낀 장왕이 비대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잽싼 동작으로 피해냈기 때문이었다.
장왕의 장공에 견디지 못한 토벽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진천은 호흡을 닫고 몸을 웅크렸다. 곧 백만 근의 압력이 그의 동체를 짓눌렀다.
진천은 장왕이 호수에 빠진 이가 바닥을 박차고 수면으로 올라가듯 땅 속을 수직으로 상승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가린이 떠올랐다.
지하연무장에 난 열두 개의 동굴은 가린의 솜씨였다. 진천의 청을 받은 가린은 쇠갈고리 같은 손톱과 강력한 완력을 이용해 불과 보름 만에 그가 원하는 굴들을 완성했다. 장왕에겐 가린과 같은 발톱이 없었지만 땅속을 헤집고 나가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을 터였다. 절대지경의 무인은 뭐든지 손쉽게 해내는 법이었다.
그 점을 증명이라도 하듯 권왕이 수중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수월하게 진천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진천은 그를 구하려는 권왕의 손을 잡아 위로 들어올렸다. 그 동작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권왕이 주춤했다.
진천은 심중에 든 의문을 비로소 해소했다. 권왕은 장왕을 잡기 싫은 것이었다. 의식적으로는 그래야한다고 생각하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꺼리는 마음이 남아있음에 틀림없었다.
진천은 장왕이 동굴로 들어오면 반드시 일격에 운신불능의 중상을 입혀야 한다고 재삼재사 강조했었다. 장부로서 정정당당한 처사가 아니라며 권왕이 난색을 표했지만 진천은 그 기회를 놓치면 마도 타도의 대업에 심대한 차질이 빚어질 것임을 역설하며 그를 설득했다. 진천의 간곡한 부탁에 넘어간 권왕은 결국 자신의 임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권왕은 진천이 일임한 승부수를 성공시키지 못했다. 강적을 잡기 직전의 흥분으로 인해 철저히 갈무리하고 있던 기운을 노출한 탓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진천은 권왕에게 장왕과 관련하여 그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내재되어 있으리라 보았다. 어쩌면 권왕 자신은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그게 무엇이건 지금은 세세히 따져볼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든 장왕을 잡아 폐인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가 건재한 한 마련과의 전쟁은 승산이 일 할은커녕 일 푼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살행위가 될 터였다.
진천은 권왕이 마련한 작은 공간 속에서 그의 팔을 들어 올리며 못 다한 임무를 완수할 것을 촉구했다. 반사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이던 권왕이 마지못해 진천을 두고 위로 솟구쳤다. 하나의 과제를 해결했지만 진천은 쉴 틈이 없었다.
탈출 자체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방위의 분간이 어려울뿐더러 장왕과의 교전에서 심각한 내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기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권왕이 내민 구조의 손길을 순순히 받아들였어야 했다. 하지만 적잖은 부상을 안고 달아난 장왕을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운 형국이었다.
진천은 주위를 더듬었다. 동굴이 붕괴되기 직전 허파에 공기를 채웠으니 아직 일 각은 족히 버틸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서둘러야 했다. 진천은 지하연무장에서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친인들이 그의 당부를 어기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였다. 진천은 장왕이 데리고 왔을 방수들의 수에 따라 대응지침을 따로 세워두었다.
만약 하나라면 세평회의 세 사람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터였다. 천지문에서 입었던 내상이 완치되지는 않았으나 여상구는 십성의 무력을 발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전력을 쏟아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더라도 가린이 거들면 한 명의 적쯤은 어렵지 않게 처치할 수 있을 터였다. 거기에 칠팔 할의 무위를 회복한 대웅이 가세하면 초절정 최상의 강자라도 능히 대적할 전력이었다. 마왕이 장왕의 동행자가 아닌 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진천은 장왕의 수하가 둘이거나 그 이상이면 충돌을 삼가고 동굴에 은신해 있으라고 지시해두었다. 혹여 침입자들이 예상외로 막강한 자들이라면 동굴에 설치된 기관을 작동시켜 철문을 내리라고 일렀다. 한 자 두께의 강철은 진천과 권왕이 장왕을 처리하고 지하연무장에 나설 때까지 세평회 인사들을 보호해 줄 것이었다.
장왕이 거느리고 올 ‘조무래기’들의 수를 정확히 예측해보라는 여상구의 채근에 진천은 둘이라고 답했었다. 하나는 적었고 셋은 많았다. 하지만 실제로 그 숫자가 맞을는지는 진천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애매했다. 여상구와 가린은 공히 초절정의 무력이었다. 적이 둘이라면 동굴에 숨느니 맞서 싸우려 들 성격들이기도 했다. 그 점을 우려하여 진천은 그가 신호하기 전에는 가급적 개별적으로 움직이지 말고 지침에 따를 것을 주지시켰다.
하지만 동굴 붕괴라는 변수가 발생했으니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진천은 권왕의 암습이 실패로 돌아갈 시 장왕이 상하좌우를 무한대의 흙더미로 차단함으로써 활로를 열려고 들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겨우 설득한 권왕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실제로 닥치고 보니 미리 그런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친인들, 특히 여상구에게 언질을 주지 않았던 게 후회스러웠다.
동굴의 변사에 놀란 의형이 그에게 배정된 굴을 벗어나 연무장으로 뛰쳐나갔을 상황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펼쳐지자 마음이 급해진 진천은 비상수단을 꺼내들었다.
헛!
상승을 멈추고 낙하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그에게 쇄도해오는 해일 같은 불덩어리를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있던 여상구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화마에 삼켜지려는 찰나 무언가 그를 낚아챈 것이었다. 뜨거운 열기가 그의 신체에 침범했다. 작열통에 질겁했지만 여상구는 자신이 아직 이승에 머물러있음을 알았다. 호신강기와 천잠갑의에 더해 또 다른 보호막이 그를 지켜준 덕분이었다.
그를 구한 이는 가린이었다. 전속력으로 날아와 화염지옥에 들기 직전이었던 여상구를 껴안은 가린은 그를 대신해 기상길의 장공을 감당했다. 도검불침의 신체였으나 가린의 갑피는 쇳덩이를 단숨에 쇳물로 만들어버린다는 위명을 지닌 화염장을 견디지 못하고 봄볕에 녹은 응달의 눈처럼 흘러내렸다.
그러나 가린은 여상구를 놓지 않고 기상길의 후속공격을 피해냈다. 기상길이 날린 불길이 가린의 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그 탓에 가린은 기상길과의 거리를 벌리는 데 실패하고 접근을 허용하고 말았다. 가차 없이 가린을 불살라버리려던 기상길은 손바닥의 방향을 돌렸다. 가린에게서 떨어진 여상구가 청홍의 강기를 날렸기 때문이었다.
기상길의 장심에서 쏟아져 나온 무시무시한 불길이 운신에 어려움을 겪는 여상구의 복부에 꽂혔다. 기상길의 기대와 달리 여상구는 한줌의 핏물로 화하지 않고 데굴데굴 구를 뿐이었다. 그제야 기상길은 그가 특별한 보의(保衣)를 착용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기상길이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그렇다면 머리통을 통째로 녹여버리면 그만이었다. 판단 이전에 그의 우장이 알아서 여상구의 두부를 겨냥했다. 그러나 기상길은 여상구의 목숨을 거두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드는 가린을 상대해야 했다. 천생괴력을 지닌 인면요괴의 손아귀에 걸리면 호신강기도 무용지물이 됨을 모르지 않았기에 기상길은 그가 달라붙기 전에 쌍장을 퍼부었다.
화염에 휩싸인 가린이 괴성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가린에게 결정타를 날리려던 기상길은 일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무엇이 그의 기감을 자극했는지 알아볼 겨를도 없이 기상길이 길쭉한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그 순간 그가 섰던 자리에 수백 개의 파편이 스치고 지나갔다.
허공에서 고개를 돌린 기상길은 그를 기습한 자의 정체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남천도왕의 손자임에 틀림없었다. 우습게도 그자는 한 번의 공격을 날리고는 제 풀에 혼절한 모양이었다.
일 장 반이나 뛰어올랐다가 아래로 떨어지며 기상길은 갈등했다. 세 마리의 벌레들 중에 어느 것부터 태워죽일까. 즐거운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갈등은 짧았다. 기실 갈등할 까닭이 없었다. 회전보(回轉步)를 밟으며 연쇄장(連鎖掌)으로 한꺼번에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물론 첫 번째는 감히 별호에 마(魔)를 붙이고 다니는 태극마선이어야 했다. 좌측으로 몸을 돌릴 참이니 다음 순서는 자연스레 철곤귀라는 아이가 될 터였다. 남천도왕의 손자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벽력도문에서 공식적으로 파문을 발표했으니 별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어차피 오늘의 행사는 전적으로 장왕의 소관이었다. 장왕은 이제 곧 폭약으로 무너진 동굴 안에서 흙벽을 뚫고 나올 것이었다. 그러면 꿔다놓은 보릿자루 노릇을 하고 있는 장마를 꾸짖고는 그의 완벽한 일처리를 치하할 게 분명했다.
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여상구를 시작으로 대웅과 가린에게 뜨거운 맛을 선사하려던 기상길은 대상을 바꿔야 했다. 무언가가 그의 후방을 노리고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보지 않고도 그를 방해한 자의 정체를 알아차린 기상길의 안면에 경련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