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35
제134화
말 몇 마디로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진천은 장왕이라는 대어를 낚기 위해 스스로를 미끼로 던졌다. 권왕이 은신한 곳을 통과하기 전에 장왕에게 걸리거나 권왕의 암습이 늦어지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터이기에 그로서도 상당한 모험이었다.
배수진을 친 까닭은 권왕의 일격이 통할 거라 자신해서였다. 권왕이 제때 제대로 장왕을 쳤더라면 만사가 계획대로 풀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권왕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사소한 실수라고 치부하기엔 후과가 상당했다. 어망까지 들어왔던 월척을 놓쳐 대업에 암운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하마터면 친인들이 변을 당할 뻔했지 않았던가.
진천은 권왕이 그가 범한 과실(過失)의 무게를 절감하기를 바랐다. 권왕의 대응은 달랐다. 걸터앉았던 바위에서 벌떡 일어선 권왕이 소리쳤다.
“책임을 진다니까, 이 녀석아. 내 당장 열락궁인지 얄락궁인지 쳐들어갈 테다. 기필코 막가 놈 멱을 따오마.”
진천은 고소를 머금었다. 그럴 바엔 아까 장왕을 끝까지 추적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짐짓 호기를 부리지만 말려주길 바라는 권왕의 심사를 짐작하고도 남았기에 진천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큰 형님.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구태여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다 큰 형님께서 피해를 입으시면 저희로선 큰일입니다. 부디 취소해주십시오.”
진천을 내려다보던 권왕이 못 이긴 척 도로 엉덩이를 바위에 붙였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하여간 막가가 오늘 운수대통 했구나. 용궁에 들어오고도 무사히 빠져나갔으니. 하지만 그치의 복운도 오늘이 마지막일 게다. 다음번엔 내 주먹이 깨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박살내마.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냐? 설마 나를 못 믿어서…….”
진천이 급히 해명했다.
“그게 아니라 큰 형님 입술에…….”
손등으로 입술을 훔친 권왕이 면상을 일그러뜨렸다. 달빛에 그의 선혈이 검은 얼룩처럼 비쳤다.”빌어먹을, 이게 얼마만의 내상이냐. 네 앞에서 피나 질질 흘리다니 체면이 말이 아니군. 어찌 된 게 막가 놈은 구십이 넘어서도 기운이 떨어지기는커녕 더 팔팔하더구나. 만날 대충 치고받다가 말아서 그치가 그렇게 딴딴할 줄 몰랐다. 막가가 강해진 게 아니라 내가 쇠잔해진 겐가?”
권왕의 목소리에 실의가 묻어났다. 반 수 아래로 여겼던 장왕을 압도하지 못한 데서 오는 자괴감일 터였다. 더욱이 진천이 적잖이 장왕을 괴롭히며 제 몫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습니다, 큰 형님. 장왕은 그야말로 필사적이었습니다.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선 배전의 힘을 발휘하는 법입니다. 내상도 큰 형님보다 훨씬 중할 것입니다. 그가 해볼만 하다고 여겼다면 그런 방식으로 달아나지는 않았을 테지요. 큰 형님께선 여전히…….”
권왕이 진천의 말을 잘랐다.
“됐다. 네 요구대로 암습을 성공시켜야 했어. 일대일로 맞붙으면 잘해야 양패구상일 터. 막가 하나를 어쩌지 못하다니. 나는 이제 퇴물이 되었구나.”
그답지 않게 풀이 죽은 권왕을 올려다보며 진천은 위로의 말을 찾았다. 하지만 무슨 얘기를 한들 역효과만 낳을 뿐임을 알기에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권왕의 자조가 이어졌다.
“막가와의 질긴 인연을 끝내려고 했는데 모두가 내 불찰이다.”
진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큰 형님과 장왕 사이에 제가 모르는 사연이 있는지요?”
수천 개의 별들이 총총히 박힌 천공으로 시선을 올린 권왕이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진천에게로 눈을 내린 권왕이 반문했다.
“너를 처음 만난 날 무황을 제거하려다 실패했던 일에 대해 들려주었던 걸 기억하느냐?”
“네, 큰 형님.”
진천은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전날 벼랑에서 권왕은 호야곡 비사의 전모에 대해 윤곽만 알려주었을 뿐이었다. 그 사건으로 사패와 중립지대 공존의 시대가 열렸지만 정확한 전후 사정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이제 궁금했던 내용을 알게 될 터이니 설레기까지 했다.
진천의 처진 눈을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이던 권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를 비롯한 호련사성이 무황의 휘하에 든 데는 각기 다른 동기가 있었다. 나는 정사마의 기득권자들을 쓸어버리고 천하를 일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그의 웅지에 반해 기꺼이 수족이 되었다. 막가는 단지 무황이 지상 최강의 무인이었기에 그 밑에 기어든 것뿐이다. 그치는 강자에겐 한 없이 순종적이고 약자에겐 무자비하기 이를 데 없는 족속이다.
소(蘇) 형은 우리와는 달리 무황이 구슬려 일통무련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는 검 밖에 모르는 위인이다. 오죽하면 당시 별호가 검치(劍痴)였겠느냐. 무황은 일통무련에 들어야지만 도전에 응하겠다는 구실로 소 형을 끌어들였다. 호련사성의 일인이 되었지만 소 형은 검공 수련에만 몰두할 뿐 정복전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광대한 영역을 일통무련에 귀속시킨 건 그가 명목상으로만 수장 노릇을 한 청룡단(靑龍團)이 독자적으로 이룩한 업적이다.
진진은 애초부터 무황과 한 편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무황의 제자이자 애첩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혹여 그녀를 보거든 절대로 애첩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말거라. 듣자마자 너를 한줌의 독수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아무튼 일 갑자 전 이런저런 이유로 무황 아래에 모여든 우리는 정사마연합군을 맞아 치렀던 호영대첩을 계기로 하나의 이름으로 묶였다. 서로 기질과 지향하는 바가 상이했지만 의외로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 넷은 전부 패권이나 야욕에는 일 푼의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막가도 당시엔 열락궁을 세운 뒤 벌인 온갖 추잡한 짓거리와는 거리가 먼 위인이었다.
사신수단(四神獸團)을 하나씩 맡은 우리는 천하일통의 기치를 내걸고 대륙을 내달렸다. 사실상 방관자였던 소 형과는 달리 백호단을 이끈 나는 적극적으로 내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 주안을 포함해 이 일대가 전부 내가 정파와 마도의 거센 저항을 물리치고 차지한 땅이다. 자랑할 일은 아니다만 진진의 주작단이나 막가의 현무단이 정복한 면적을 합친 것에 버금갔을 정도였다.”
진천은 오래 전 권왕의 활약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일권무적이라 불리던 삼 척 단신의 권사는 정사마를 막론하고 대륙의 모든 무인들이 피해 다니던 맹장이었다. 무황 나중강이 등장하기 전까지 천하제일인의 권좌를 두고 다투던 난세십군(亂世十君)조차 그의 주먹을 두려워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짧은 혀를 내밀어 오므라든 입술에 침을 바른 권왕이 술회를 계속했다.
“우리 호련사성은 넉 달에 한 번씩 정기적인 회합을 가졌다. 일 년에 세 번 꼴이니 그리 자주 보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래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친분이 두터워지고 동지애가 생겼다. 그 무심한 소 형조차도 우리와의 만남을 반겼다. 우리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자기의 검을 받아줄 강자들과 연달아 비무를 할 수 있다는 즐거움 때문이었을 테지만.
나는 특히 진진과 친해졌다. 모두가 꺼리는 독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싫지가 않더구나. 전에도 말했지만 그녀의 미모에 홀린 것은 아니다. 그저 그녀가 이따금 내비치는 음울함이 안쓰러워 벗으로서 다독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정말이다, 이 녀석아.”
독후 연진진을 회상하며 밝아졌던 권왕의 낯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어느 날 그녀가 내게 은밀히 알려주더구나. 무황의 야심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아니, 다르다기보다는 내가 겉만 알고 있었던 게지. 무황이 천하를 평정한 후 구현하겠다던 정의로운 세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인들을 제외한 모든 인민의 말살이었다.
허어, 그때 나도 지금 네 녀석하고 똑같은 표정을 지었더랬다. 절반의 충격과 절반의 불신. 온전한 인간이라면 어찌 그런 무시무시한 꿈을 꿀 수 있겠느냐. 하지만 사실이었다. 무황은 약자를 끔찍이 혐오했다. 벌레만도 못한 존재들이라고 여겼지. 그래서 천하를 수중에 넣은 후 무림만 남기고 인세를 지워버리겠다는 황당한 목표를 설정했다더구나.”
진천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독후께 들은 바를 무황에게 직접 확인하셨는지요?”
권왕이 고개를 저었다.
“내밀한 얘기를 흘렸다고 무황이 노여워할까 봐 진진이 하도 못 들은 걸로 해달라고 간청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내가 그녀에게 속았다고 생각하는 게냐? 전혀 아니다. 무황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나도 나름대로 알아보았느니라. 그와 독대한 자리에서 여러 차례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랬더니 그가 조금 전에 말했던 인식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거처인 무황전(武皇殿)엔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인은 얼씬도 못했다. 나는 그것이 그가 무심코 분출하는 어마어마한 내기(內氣)에 평범한 이들이 상할까 봐 저어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실상은 여염의 처자들이 쥐나 바퀴벌레를 질색하는 것과 대동소이한 이유에서였더구나. 일통무련에 들고자 하는 이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나 그가 절정 이상의 강호들만 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부릴 수 있는 무인과 존재가치가 없는 버러지들, 딱 두 종류였던 게야.”
진천은 소름이 돋았다. 권왕이 밝힌 무황의 인물상에 모친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모친이 그에게 명한 궁극적인 임무는 모든 무인의 몰살과 무림의 해체였다. 무황과 정반대의 목표였으나 그와 모친은 놀랍도록 닮은꼴이었다.
열기가 오르는지 권왕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나는 암담했다. 무황에겐 그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망상을 실현할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폐관수련에 들었던 무황이 오 년 만에 나와 절대지경을 완성했음을 알리고 본격적으로 중원 정복에 나서겠다고 공표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진 듯싶더구나. 지금에야 나를 포함해 여덟 명이나 절대지경에 들었으니 별 것 아닌 느낌을 준다만 당시만 해도 초인시대 이후 아무도 도달하지 못했던 신의 경지로 여겨졌던 탓에 무황이 절대무적의 천신으로 보였더랬다.
정사마를 대표한다는 난세십군은 우리 네 구닥다리들에게도 뒤쳐져 있었다. 천하에 누가 있어 무황을 저지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를 막지 않으면 수백, 수천만의 목숨이 저승으로 넘어갈 판국이었으니까.
나는 진진을 붙잡고 호소했다. 어떻게든 무황을 제거하자고. 부끄러운 얘기다만 그녀에게 매달려 아이처럼 눈물까지 쏟았구나. 평상시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하늘도 그날만은 내가 가여웠는지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해주었다.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녀가 선뜻 응낙해 나조차도 당황했을 지경이었으니까.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짰다. 나나 그녀나 너처럼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들이 아니기에 작전이라고 해야 간단하고 조악한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부족한 머리나마 최선을 다해 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관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진진이 만독불침의 신체인 무황을 중독시킬 수 있을지 여부였고 다른 하나는 막가와 소 형을 거사에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전자는 그녀가 알아서 할 거라고 했다. 자세한 과정은 언급하길 꺼렸지만 무황과의 잠자리에서 용독(用毒)할 작심이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녀로서도 목숨을 걸었던 게지.
막가와 소 형의 포섭은 내가 맡기로 했다. 무황을 없애려는 진정한 이유를 그들과 공유할 수는 없었다. 공감할 위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그들을 속였다. 거짓말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나지만 어쩌겠느냐. 수많은 죽음들을 막기 위해 불사언계(不詐言戒)를 어길 밖에.”
흥미로운 대목에서 회상을 멈춘 권왕이 묵묵히 경청하고 있는 진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진천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