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36
제135화
권왕의 입에서 진천이 예상한 말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나만 계속 떠들었더니 힘들구나. 재미도 없고. 잠시 혀를 쉬게 해 줄 참이니 네가 뒤를 이어 보거라, 아우야.”
장왕과 권왕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맞춰보라는 뜻이었다.
모른다고 해봤자 들어먹을 권왕이 아니기에 진천은 머릿속에 떠오른 추론을 밖으로 꺼내놓았다.
“장왕에겐 미인계를 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진천이 결론부터 내밀자 권왕의 일자 눈이 씰그러졌다.
“그게 다냐?”
“…….”
“그거야 누구나 건져낼 수 있는 뼈다귀가 아니냐? 살을 붙여야지.”
권왕의 요구에 쓴웃음을 지은 진천이 보다 자세한 설명을 보탰다.
“장왕은 압도적인 무위를 지닌 무황에게 경외감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존경심보다는 두려움이 몇 배는 더 컸겠지요. 그런 그를 생사를 건 도박에 끌어들이려면 그만한 대가를 제시해야 했을 텐데 외람되지만 독후 어르신 외에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장왕은 무황 시해의 거사가 성공할 시 독후 어르신을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을 받고서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목숨이 걸린 문제니 독후 어르신 본인에게 확약을 받으려 했겠지요. 아마도 큰 형님은 장왕을 끌어들이는 것보다 독후 어르신을 설득하는데 더 공을 들였지 싶습니다.”
권왕이 감탄했다.
“하아, 볼 때마다 신기하구나.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얘기하다니. 진진에게 막가가 원하는 말을 해주라고 달래느라 진이 다 빠졌더랬다. 처음에 그 말을 꺼냈을 때는 나를 잡아먹으려 들더구나. 나는 대계를 성공시키려면 똥물을 뒤집어 쓸 각오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이 끝난 후 씻어내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에 진진이 어이가 없는지 웃더구나.
간청에 가까운 설득을 반복한 끝에 어찌어찌 진진의 허락을 받아내고 막가와 삼자대면을 했느니라. 내 인생을 통틀어도 그날처럼 조마조마했던 날은 손에 꼽을 정도다. 나는 지금도 그날 진진이 막가의 눈알을 파먹지 않은 게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황당한 게 뭔지 아느냐? 나처럼 둔한 사람의 눈에도 진진이 억지로 속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게 빤히 보이는데 정작 막가는 눈에 뭐가 씌었는지 그저 발정난 개처럼 할딱거릴 뿐이었다. 진진이 다른 이에게 누설하면 대가리를 녹여버리겠다고 협박하는데도 싱글벙글하더란 말이지. 막가가 불쌍할 지경이었다.”
권왕의 감상을 공유하긴 어려웠으나 진천은 과거의 장왕이 단순할뿐더러 순진한 인물이었음을 이해했다.
권왕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선혈을 보며 진천이 운공을 권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내상을 다스리는 게 어떠실는지요, 큰 형님?”
권왕은 일언지하에 진천의 권유를 거절했다.
“싫다, 이 녀석아. 똥을 싸다 말라는 게냐? 찝찝하게.”
썩 아름답진 않지만 권왕치고는 적절한 비유였다.
“막가는 그렇다 치고 그 까다로운 소 형은 어떻게 한 편으로 만들었을까, 아우야?”
진천은 권왕의 만면에 가득한 기대감이 부담스러웠다.
어려운 문제였다. 검왕은 권세나 재물은 물론이고 경국지색의 미녀도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취급하는 성정으로 유명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무공뿐이었다. 더욱이 그는 다수가 얽히는 진흙탕 싸움을 혐오하고 일대일의 대결을 고집하는 승부사였다.
전날 정사마연합군을 맞아 치렀던 보영대첩에서 검치 소진은 단 한 명만 상대했을 뿐이었다. 당시 난세십군을 턱 밑까지 추격했다고 평가받던 사파 무림의 검호 칠성검군(七星劍君) 우자충(禹紫忠)이었다. 삼류무사도 쓰지 않을 법한 녹슨 철검을 들고 일세를 풍미했던 노장을 단 몇 초 만에 황천길로 보낸 소진은 무명 검사에서 일약 강호 최고의 신성으로 등극했다.
“어서 네 용한 재주를 펼쳐 보거라.”
아직 가닥이 잡히지 않았지만 권왕의 재촉에 진천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검왕 어르신은 무황 제거의 대사에 동참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검왕의 일자 눈 속에서 까만 동공이 반짝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전날 무황의 오른팔을 자른 이가 소 형이었다고 하지 않았더냐? 잊어버린 게냐?”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게냐? 소 형에 이어 내가 무황의 두개골을 부수고 막가는 복부를 터뜨렸다. 우리가 합심하지 않았으면 어림도 없는 성과였느니라.”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지만 처음부터 세 분이 합공하지는 않지 않았습니까?”
“……계속해 보거라.”
“검왕 어르신은 무황 제거의 일전에 참여한 게 아니라 단지 비무를 하려 했던 게 아닐까요? 물론 단지 무학을 겨루는 대결은 아니었을 겁니다. 큰 형님께서 그분에게 사전에 무황이 단비(斷臂)를 승패의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는 언질을 주었을 테니까요. 당연히 무황은 그런 적이 없었겠지요. 가벼운 마음으로 비무에 임한 무황과는 달리 검왕 어르신은 결사의 각오를 다지고 나섰을 것입니다. 그분 같은 검사에게 팔을 잘리는 부상은 목이 날아가는 것보다 더한 참사였을 테니까요.”
일자로 붙은 눈을 휘둥그레 뜬 권왕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소 형이 와서 네게 귀띔을 해 준 게냐? 아무리 너라지만 어떻게 그걸…….”
권왕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진천은 우쭐거리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무황은 진정 괴물이었다. 진진의 무형지독에 중독된 상태에서 소 형의 검을 받아냈으니 말이다. 거기에 나의 주먹과 막가의 장공을 맞고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머리통이 깨지고 배가 터지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가 괜히 그의 회생을 두려워해 전전긍긍한 게 아니다. 그는 가히 신의 재능을 부여받은 천재였다. 무황이 강호초출 시에 얻은 별호가 뭔지 아느냐? 십전객(十全客)이었다. 대륙을 종횡하며 비무 행을 벌일 시 그는 상대의 특장기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검에는 검으로, 칼에는 칼로.
마흔이 넘으면서 나는 권공으로는 천하에 적수가 없다고 자부했지만 무황에겐 역부족이었다. 막가도 무황의 장공 앞에선 맥을 못 췄다. 진진은 말할 것도 없다. 무황이 그녀의 사부나 진배없었으니.
세인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기형적으로 긴 무황의 오른팔이 신수(神手)라 불렸음을 알고 있겠지? 그러나 그는 너처럼 왼손잡이였다. 호야곡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고서야 무황은 비로소 감춰뒀던 비수(秘手)를 선보였다. 신수를 능가하는 왼팔의 위력을 목도한 나는 모골이 송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진의 독중지왕이 효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그날 우리 넷은 모조리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게다.”
진천은 오십 년 전 무저갱에 빠진 후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는 희대의 무존에게 까닭모를 전율이 일었다.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기에 팔이 잘리고 단전이 깨지는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사왕에게 부활의 공포를 남겨주었을까. 그가 살아있었다면 인세 말살의 끔찍한 야망이 실현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권왕은 세상을 구한 진정한 영웅이었다. 지난 수십 년 간의 평화도 중립지대의 존속을 이뤄낸 그의 공적이었다. 어떤 찬사로도 권왕의 위업을 빛내기엔 부족했다. 그러나 천하 만민의 절대다수는 권왕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해냈는지 모르고 있었다.
진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권왕이 한탄했다.
“무황이 되살아나지 않을 것을 알았다면 사패 체재가 굳어지기 전에 사마의 무리를 쓸어버렸을 텐데. 그때라면 우리 넷만으로도 얼마든지 무림을 뒤집어엎었을 게다. 아직 신(新) 사왕이 야물기 전이었으니까. 헌데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겁내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다니, 못내 한스럽구나.”
“그래도 큰 형님 덕분에 천마(天魔)의 재림을 막지 않았습니까? 언젠간 세상이 큰 형님의 노고와 희생을…….”
권왕이 진천의 위무를 중단시켰다.
“그만 둬라. 반백년이나 허송세월 한 위인이 들을 소리가 아니다.”
“…….”
“더욱이 오늘 또 한 번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더냐. 어떻게든 막가를 잡았어야 했는데. 빈손으로 돌아오고도 뻔뻔하게 굴었다만 기실 네게 면목이 없구나. 내 과실로 인해 앞길이 막막해졌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닙니다, 큰 형님. 방법이 있을 테니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궁금한 거라니?”
“장왕 말입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큰 형님께서 그에게 상당한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그를 속여 무황 제거의 대사에 동참시킨 데서 오는 미안함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권왕이 먼 허공으로 시선을 두었다.
“나는 막가에게 목숨을 빚졌다.”
뜻밖의 말에 진천이 처진 눈을 올렸다.
“전날 호야곡에서 무황이 소 형에게 팔을 잘린 직후 나는 그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의 반격에 튕겨나가고 말았다. 중독된 데다 중상을 입었음에도 무황은 나보다 강했다. 무황이 바닥을 구르는 나에게 권강을 발출하려는 찰나 막가가 끼어들었다. 나를 구하려고 그랬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그가 나를 살렸다. 막가가 측면에서 날린 일격은 성공했다. 호신강기가 깨진 무황이 크게 비틀거리는 틈을 타 나는 사력을 다해 그의 두부를 쳤다. 머리가 박살나지는 않았지만 두개골이 깨졌음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거기에 막가의 장공이 그의 복부에 제대로 꽂혔다. 악동에게 밟힌 개구리 배처럼 터져나가는 걸 똑똑히 보았느니라. 하지만 하필이면 무황이 무저갱으로 빠지는 바람에 확실한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우환거리를 남겨야 했다. 아무튼 그날 내가 막가에게 구명지은을 입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랬군요.”
“그게 다가 아니다. 막가가 그 이후 온갖 추잡한 짓을 일삼는 악귀로 변한 데는 내 탓도 작지 않다. 이전의 그는 소 형 만큼이나 여색을 멀리하는 사내였다. 조금 살이 찌긴 했으니 지금과 같은 몰골도 아니었고. 나는 그가 나에게만 털어놓은 진진에 대한 연심을 이용했더랬다. 대의를 핑계로 삼았으나 비열한 술수가 아닐 수 없었다. 나와 진진에게 속은 것을 알게 된 막가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라도 막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실행에 옮기더구나.”
진천은 이제야 납득이 갔다. 그에게로 시선을 내린 권왕이 말을 이었다.
“오늘 내가 암습에 실패한 까닭을 막가에 대한 부채의식이라고 보는 게로구나.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닐 게다. 막상 막가를 치려고 하자 나도 모르게 망설여지더구나. 큰소리쳐놓고 일을 망쳤으니 네겐 미안할 따름이다. 하지만 다음엔 실망시키지 않으마. 아까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무책임하게 내뱉었지만 열락궁에 쳐들어가서 끝장을 볼 용의도 있다. 막가는 작지 않은 내외상을 입었을 터이니 아주 무모한 짓은 아닐 듯싶구나. 어쩔까?”
“그러지 마십시오, 큰 형님. 그보다 다른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늘의 별을 따오라는 것만 빼고 다 들어주마.”
쓴웃음을 지은 진천이 권왕에게 할 일을 알려주었다.
세평회의 삼인에게 기이한 동지애가 생겼다.
공교롭게도 세 차례나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중상을 입었다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여상구와 대웅, 그리고 가린은 모두 마령 문가와의 구인결에서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오양 천지문에서는 장왕과 조우해 공히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엔 화염장에게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를 경험했다.
여상구는 셋이 함께 있으면 사신이 찾아오지만 절대로 염왕이 부르지는 않을 거라며 앞으로도 똘똘 뭉쳐 다니자고 너스레를 떨었다. 가린은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대웅은 질색했다. 진천은 그들의 무사함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권왕은 세 사람을 보기 민망했던지 진천에게서 특명(!)을 받은 즉시 삼보장을 떠났다. 그가 떠나고 나흘이 지난 후 고량이 차소영과 더불어 돌아왔다. 노미현은 그들과 동행하지 않고 홀로 원주 강가에 남았다고 했다.
다시 닷새가 흘러 시월이 왔다. 진천은 하수린과 팽하연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들에 앞서 예기치 않았던 손님이 삼보장에 찾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