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37
제136화
날이 저물자 진천은 등을 걸러 나왔다.
와옥들 주위를 밝힌 후 후원의 별채로 향하던 진천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삼보장의 담장 역할을 하는 죽림으로 눈길을 돌렸다.
쓰으으으.
진천은 찬바람에 신음성을 흘리는 대나무 숲을 주시했다.
꿀꺽.
입에 고인 침을 삼킨 진천은 다음 순간 저도 모르게 끌어올렸던 공력을 풀고 어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소손 천이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흉험한 짐승이 도사린 듯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던 숲에서 시커먼 인영이 튀어나왔다. 그러더니 마치 진천이 줄을 잡아당긴 것처럼 일직선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진천은 칙칙한 갈색 무복을 걸친 짧은 백발의 노인에게 다시 허리를 접었다.
“난 줄 어떻게 알았느냐?”
정파 무림의 지존 북천도왕 강운이 물었다.
시선을 땅바닥에 둔 채 진천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십 장 이상의 원거리에서 그의 전신을 옭아 맨 암기(暗氣)를 쏘아낸 이는 팔대무왕 급의 고수일 터였다. 장왕이나 마왕이 친절하게 경고를 보냈을 리는 없으니 외조부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더욱이 진천은 이즈음 외조부를 만나게 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를 원주로 부르지 않고 직접 찾아온 것은 의외였지만 아주 뜻밖은 아니었다.
“그냥 알았습니다.”
고개를 들며 진천이 대답했다. 그의 싱거운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강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천은 사나운 강운의 안광을 담담히 받아냈다. 그가 왜 삼보장을 찾았는지 짐작하고 있었기에 두려워할 까닭이 없었다.
진천을 노려보던 강운이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뗐다.
“여기에 널찍한 연무장이 있다고 들었다.”
진천은 강운의 의도를 알아들었다. 살가운 대화는 기대하기 어려웠으니 바라던 바였고 좋은 징조였다.
“저쪽입니다, 할아버님.”
옆으로 비켜서며 진천이 왼팔로 지하연무장 입구를 가리켰다. 그가 앞서자 강운이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조손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들어섰다.
넓기만 할 뿐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연무장에 실망했는지 강운이 미간을 모았다.
“저 안에 든 자를 내보내라.”
좌측의 동굴을 바라보며 강운이 명했다.
마침 평소와 다른 기척에 동굴에서 나오던 가린이 그 말을 듣고는 으르렁거렸다. 진천은 얼른 가린에게로 가서 그를 출입구 쪽으로 이끌었다.
“입단속을 하고.”
강운의 명이 추가되었다.
“알겠습니다, 할아버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외조부의 양해를 구한 진천이 가린을 달래 밖으로 나갔다. 청와옥에 가서 여상구에게 사정을 알린 진천은 크게 놀라는 그를 뒤로 하고 지하연무장으로 되돌아왔다.
강운은 너른 연무장 중앙에 서있었다. 진천이 가까이 가자 강운이 손을 뻗었다. 진천은 그에게서 삼십여 보 떨어진 지점에서 멈췄다.
“네 재주를 볼 것이다.”
직설적으로 방문의 목적을 밝힌 강운이 쌍도를 동시에 뽑았다. 하지만 귀두도는 땅에 내려뜨린 채 오른손에 쥔 협도만 슬쩍 움직였다. 그러자 도첨에서 청광이 일렁이더니 한 줄기 섬광이 진천을 향해 날아갔다.
오륙 장의 거리를 단숨에 지운 강운의 강선(鋼線)이 진천의 동체를 꿰뚫었다. 강운이 백미를 일그러뜨렸다. 그의 탄강을 빗겨낸 진천의 실체가 성큼 목전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당황한 이유는 진천이 현시한 신묘한 신법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천의 좌수에서 뻗어 나온 기이한 백기(白氣)가 그를 휘감아오자 강운은 급히 귀두도를 사선으로 그어 방어에 나섰다. 진천의 절멸삭을 싹둑 잘라낸 강운이 본격적으로 쌍도를 부리기 시작했다.
진천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할 작심이었다.
그의 무력은 창인을 떠날 무렵에 비해 일취월장한 상태였다.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삼 년 이상 정체되었던 팔영보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세 번에 걸친 생환결의 운용으로 공력 또한 크게 증가했다. 한 번에 두 자루만 날릴 수 있었던 절멸비는 네 자루로 늘어났고 일이 각이 고작이었던 절멸도법의 구사도 반 시진 가까이 지속 가능해졌다. 현재 그의 내공은 소중걸은 물론이고 창천도군에 비해서도 아래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 이상일지도 몰랐다.
절멸도법 자체의 화후는 제자리였지만 여러 차례의 실전 경험으로 운영의 묘에서는 전날에 비해 확연히 발전한 수준에 이르렀다. 진천은 반 년 전과 달리 지금 창천도군과 겨룬다면 정면대결로도 능히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진천의 뇌리에 일사부의 음성이 울렸다.
‘혹시라도 네 외조부를 만나게 되면 내 평생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다오. 나의 절멸도법이 강가의 번천일백팔도를 능가하는 절학임을 그 어른에게 일깨워주면 죽어서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천이 최선의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은 건 일사부의 염원을 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외조부의 인정은 그와 세평회의 앞길에 매우 든든한 원군이 되어줄 터였다. 권왕에게 부탁한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외조부를 한편으로 만드는 것은 운명을 좌지우지할 결정적인 과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권왕의 후원만으로는 두 명의 무왕에 수많은 초절정 고수들을 보유한 마련에 역불급이었다.
진천은 외조부에게 그의 존재가치를 무공으로써 입증해야 했다. 강민과 비등한 무위라면 상황에 따라 버리는 패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월등한 무재임을 과시한다면 외조부로서도 쉽게 내치지 못할 터였다.
진천은 백일 전 강가 인근의 낭떠러지에서 외조부의 시험을 받지 않았던 것이 행운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때였다면 오늘처럼 외조부를 당혹스럽게 만들기 어려웠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실로 화려한 춤사위였다.
진천은 외조부의 쌍도가 펼쳐내는 심오한 무학의 향연에 흠뻑 젖어들었다. 두 달 전 강민의 본전을 탈탈 털어가며 견식했던 번천도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같은 절초지만 완전히 별개의 수법으로 보였다. 위력은 물론이거니와 깊이의 차이도 현저했다.
외조부의 신공절학을 받아내며 진천은 절멸도법이 강가의 비전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절감했다. 일사부의 장담과 달리 번천일백팔도를 넘어섰는지는 심히 의문이었다. 아류라고 폄하할 정도는 아닐지라도 진일보한 무학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웠다.
진천은 일사부가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신이 실현해야 함을 알았다. 절멸도법의 상승과 완성은 그의 몫이었다.
진천은 미칠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뼈를 갈아버리고 싶은 간지러움이 그의 내부를 휘돌았다. 이 기괴한 고통을 해소하지 않으면 정말로 광인이 되어버릴 지도 몰랐다.
온 정신을 모아 해법을 갈구하던 진천은 기이한 경험을 했다. 그의 의식이 몸을 빠져나와 허공에 둥둥 뜬 것이었다.
쌍도를 번갈아가며 휘두르는 외조부와 필사적으로 팔영보를 전개하며 간간이 절멸도법으로 반격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진천은 그의 본신이 몰아지경에 빠졌음을 알아차렸다. 외조부의 공세에 대응한다기보다는 혼자 발광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천은 곧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그의 반사적인 동작은 외조부의 조정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외조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었다.
진천은 자기에게 소리쳤다.
‘그러면 안 돼. 화연으로 벗어난 후 절멸비를 날려야지. 두 개는 목과 어깨로, 다른 두 개는 복부와 허벅지로.’
신기하게도 그의 몸뚱이가 허공에서 보낸 지시를 따랐다. 하지만 그의 좌수에서 발출된 절멸비는 강기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연기처럼 흐트러졌다. 내공이 바닥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외조부가 백미를 치뜨며 놀란 표정을 짓자 진천은 괜히 뿌듯했다.
신비한 체험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지러움을 느낀 진천은 구름 위에서 지상으로 추락하는 기분과 함께 그의 본체로 되돌아갔다.
우우웅.
강운의 도신이 토해내는 도명(刀鳴)이 지하연무장을 울렸다.
진천은 귀를 먹게 하는 칼 울음을 듣지 못했다. 기실 시력도 잃은 지 오래였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시퍼런 빛줄기들밖에 없었다. 청광이 번득일 때마다 그의 동체가 자동적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진천은 그의 움직임을 통제하려는 외조부의 시도에 맞서 계속 반발했다. 왼쪽으로 돌도록 몰아오면 우측으로 튀어 올랐고 절멸삭의 발출을 유도하면 절멸비를 쏘아냈다.
진천은 기실 그만두고 싶었다. 절멸삭이니 절멸비니 하지만 공력을 담을 수 없으니 시늉에 불과했다. 그의 손끝에서 나오는 건 겨울에 내뿜는 입김 같은 하얀 기운뿐이었다.
하지만 손을 거두고 쉴 수가 없었다. 발놀림을 멈추거나 출수를 중단하면 외조부의 칼이 목에 떨어질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쓰러져도 곤란했다. 그 경우에도 외조부는 가차 없이 그의 명줄을 끊어버릴 것이었다.
진천은 뼈를 갈아버리고픈 간지러움에 더해 외조부에 대한 공포심도 견뎌야 했다. 한편으로는 외조부의 가혹한 시험에 굴하지 않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극한의 탈진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정신은 오히려 명료해졌다.
그러다 일순간 의식이 몸을 나갔을 때처럼 그와 외부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귀두도와 협도에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강기의 폭우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자신의 모습에 실소한 진천은 가쁜 숨을 들이켰다.
어느 칼에서 나온 도강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외조부에게서 떠난 청색의 섬광이 그의 허리를 일도양단한 것이었다.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채 허물어지며 진천은 방금 그가 본 신기가 강가의 사대절학 중 으뜸으로 꼽히는 분천일획(分天一劃)임을 알아차렸다.
이상했다.
염왕전은 지하연무장의 천장과 닮은꼴이었다. 흐릿한 야명주. 울퉁불퉁한 흙벽.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던 진천은 불현듯 그가 아직 이승에 머물러있음을 깨닫고는 전율했다. 몸이 두 동강 나고도 숨이 붙어있단 말인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살피고 싶었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움직이려 하자 급작스럽게 엄청난 압력이 동체를 내리눌렀다. 진천은 비로소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연이도 그랬을까.”
아득한 곳에서 목소리 하나가 날아왔다. 하지만 눈을 끔벅거린 진천은 그의 망막에 맺힌 외조부의 얼굴을 보고는 바로 위에서 떨어진 음성임을 알았다. 입을 벌려 대꾸하려고 했지만 혀가 말을 듣지 않았다. 외조부의 말이 이어졌다.
“그 아이를 가르쳤다면 너와 같았을까.”답변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님을 인지한 진천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네 무공은 진이에게서 비롯되었을 테지? 그 아이의 유산이 무림사의 한 장에 신공절학으로 기록되도록 더욱 더 갈고 닦아라.”
외조부의 당부에 진천은 가슴이 울컥했다. 일사부가 들었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진천은 외조부가 모친과 일사부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침묵이 길어졌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은가, 아우님.”
진천은 외조부가 떠나고 의형인 여상구가 들어왔음을 알았다. 여러 개의 그림자들이 어른거리는 것으로 보아 여상구만이 아니라 삼보장의 친인들이 전부 몰려왔을 터였다.
“정말 걱정했다네. 북천도왕께서 방해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니 들어와 볼 수도 없고. 이레 동안 웅장한 칼 울음이 쉼 없이 올라오기에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네.”
진천은 깜짝 놀랐다. 하루나 이틀 정도가 아니라 칠주야(七晝夜)에 걸쳐 외조부와 비무를 치렀단 말인가.
“그 어른이 아우님에게 무슨 짓을 하고 간 건가?”
진천은 입을 열어 답변하고 싶었다.
‘기연을 얻었습니다, 형님.’
하지만 그의 생각은 소리가 되어 목구멍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보아하니 큰 부상은 없는 듯하구먼. 다행일세. 아우님이 이곳에 든 동안 바깥에는 엄청난 사태가 발생했다네. 천하가 온통…….”
고량의 것으로 짐작되는 목소리가 여상구의 말을 막았다.
“일단 천이를 청와옥으로 옮기는 게 낫겠습니다, 여 공.”
“아, 그럼세.”
여상구는 순순히 고량의 의견에 따랐다. 진천은 의형의 뒷말을 마저 듣고 싶었으나 선택권이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그를 안아드는 고량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