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38
제137화
아직 동장군이 오려면 멀었지만 살이 에일 듯 날씨가 매서웠다.
갑자기 밀어닥친 한파에 거리를 오가는 인파는 평소의 삼분지일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른 아침 삼보장을 나선 진천은 한산한 저자를 지나 북운상단으로 향했다. 당금 강호 최고의 유명인사가 곁을 지나가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진천이 죽립을 깊이 눌러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조부와 치른 극한 비무의 여파가 아직 몸에 남아있었지만 진천은 스스로에게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고 서둘렀다. 보다 확실한 상황을 파악하고 후속대책도 마련해야 했다.
나흘 전, 그러니까 그가 한창 지하연무장에서 무아지경의 비무에 빠져있을 때 대륙엔 커다란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올 봄 각각 백도방, 농막, 천지문, 그리고 만금장을 하나씩 차지하며 간을 보았던 사패가 전격적으로 중립지대 공략에 나선 것이었다.
사패의 준동 시기는 진천의 예상 범위 내에 있었지만 다소 빠른 편이었다. 진천은 사패가 구(舊) 사왕의 반응을 본 연후 다음 행보를 결정하리라고 보았다. 그 기간을 반년에서 일 년으로 잡았다. 마령 문가가 백도방을 통째로 집어삼키려고 했던 때가 겨우 일곱 달 전이니 사패는 인내심을 오래 발휘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권왕 등이 눈에 띄는 반발 없이 사패의 발호를 묵과한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사패에 속한 제 문파들이 탐스러운 먹잇감들을 더 이상 두고만 볼 수 없었기 때문일 공산이 컸다.
일단 행동을 개시하자 사패는 파죽지세로 중립지대를 먹어치웠다. 단 사흘 만에 광활한 영역이 사패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유혈극이 잇달았다. 정맹과 월교가 차지한 지역에 든 문파들은 대부분 새로운 지배자들을 순순히 맞이했지만 사벌과 마련이 침공한 땅에 자리하고 있던 방파들은 극렬하게 저항했다. 그 결과 수천 리에 걸친 중립지대 서남부에서는 수많은 시산혈해가 생겼다. 특히 마련이 침략한 곳은 예외 없이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풍요로운 늦가을의 정취를 즐기던 천하는 때 아닌 전란에 바짝 웅크린 채 숨을 죽여야 했다.
북운상단의 대문 앞에서 진천은 죽립을 벗었다.
그의 얼굴을 본 경비무사들이 얼른 비켜섰다. 정문을 통과한 진천은 보원전으로 향하다 보고를 받고 그를 영접하러 달려 나온 오재승과 마주쳤다.
“어서 오오, 진 공자.”
잔뜩 상기된 얼굴로 진천을 맞은 오재승이 진천을 살폈다. 진천은 그가 자신의 늦은 방문을 의아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기실 외조부와의 일이 없었더라면 이틀이나 사흘 전에 북운상단을 찾았을 것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오 단주님. 날이 쌀쌀한데 들어가서 얘기하지요.”
의복을 제대로 걸치지 않고 나왔던 오재승이 비로소 추위를 느낀 듯 부르르 떨었다.
“허어, 겨울이 일찍 찾아온 것 같구려. 마치 무림의 기변에 발을 맞추기라도 하려는 듯 말이오.”
쓰게 웃을 뿐 대꾸가 없는 진천을 일별한 오재승이 그를 집무실로 안내했다.
진천은 백엽차를 내온 다녀(茶女)를 흘긋 바라보았다.
소녀 태가 남아있는 앳된 용모지만 몸매는 중년의 여인처럼 풍만했다. 진천의 신분을 아는 듯 눈도 들지 못하고 어려워하면서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가슴을 교묘하게 흔들며 야릇한 염기(艶氣)를 흘리고 있었다. 그녀가 나가자 진천은 바로 용무에 들어갔다.
“지난 나흘 간 일어났던 일을 자세하게 알고 싶습니다.”
진천의 청에 자리에서 일어난 오재승이 서랍에서 무언가를 빼왔다. 중원 전도(全圖)였다. 지도를 탁자에 펼친 오재승이 미리 준비했다는 듯 일사천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진천은 간간이 질문을 던질 뿐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오재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북운상단에서 어제 삼보장에 보낸 정보와 대동소이했다. 다만 간밤에 마련이 점령한 회양(淮陽)과 영흥(永興)에서 검마류(劍魔流)와 도마류(刀魔流) 마인들에 의해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끔찍한 소식이 추가되었다. 희생자들의 수는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두 군데 모두 일만은 넘을 거라고 했다.
반 시진 가까이 이어진 설명을 마친 오재승이 다 식은 백엽차로 목을 축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이로써 중립지대는 사실상 사라진 셈이오. 사패 사이엔 간격이 수십 리에 지나지 않는 얇은 띠만 남았을 뿐이오. 어떻게 보오, 진 공자? 사패대전(四覇大戰)이 발발할 것 같소?”
오재승의 질문에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완충지대가 없으면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작은 불씨가 광야를 태우듯 사소한 싸움이 전면전으로 번질 가능성도 다분하고요.”
오재승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허어, 큰일이구려. 사패가 붙으면 지금의 난리는 아무 것도 아닐 텐데.”
“당장은 아닐 겁니다. 이번 행사를 치르며 사패 간에 전혀 마찰이 없었다는 것은 그들이 사전에 세밀하게 조정했다는 뜻입니다. 우선은 배가 부르니 소화를 시켜 가며 한 동안은 자중하겠지요. 하지만 일 년을 넘기기는 어려울 거라 봅니다.”
“전쟁이 공멸을 초래할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판을 벌릴까요?”
“그 점 때문에 일 년의 유예기간을 둔 겁니다. 하지만 전란의 발생은 필연일 듯싶습니다. 제가 그렇게 판단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패의 주인들이 최전성기에 접어들었다는 점입니다.”
오재승이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진천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부탁이 있습니다, 오 단주님. 마련이 장악한 지역들 중 검마류와 도마류가 거점으로 삼았다는 송화(松華)와 평산(平山)의 정황을 가능한 한 상세히 알아봐주시길 바랍니다. 주요 인물들의 신상과 무위에 관해서도 최대한 파악했으면 싶습니다.”
오재승의 동공에 기광이 스쳤다.
“분부를 받들겠소. 상운의 모든 역량을 총 동원해 송화와 평산에 들어앉은 마두들의 면면을 그려다 바치리다.”
“감사합니다.”
“언제까지 처리하면 되겠소?”
“보름 이내입니다. 늦어도 이번 달 안으로는 끝내주시면 좋겠습니다.”
“꽤 빡빡하구려. 알겠소. 최선을 다하리다.”
“그리고 몇 가지 다른 부탁들도 있습니다.”
“말씀해 보구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혼신의 힘을 다해 들어드리리다.”
오재승과 논의를 마친 진천은 주안 외곽의 평야에서 천민들을 위한 도시 건설에 여념이 없는 노덕에게 들렀다가 정오 무렵 삼보장으로 돌아갔다.
대문을 들어서던 진천은 처진 눈을 살짝 치떴다. 지하연무장에서 기음이 올라오고 있었다. 여상구와 대웅은 아직 비무를 할 만큼 회복되지 않았으니 가린과 고량이 붙었을 터인데 뭔가 소리가 이상했다.
지하연무장 쪽으로 걸어가던 진천은 곧 누가 와있는지 알아차렸다. 아래로 내려가자 그의 짐작대로 하수린이 가린과 함께 격렬하게 치고받고 있었다. 진천을 본 하수린이 사납게 휘두르던 채찍을 회수하고 진천에게 달려왔다. 가린이 불만을 표하자 하수린이 그를 달랬다.”이이하고 급히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가린. 금방 끝내고 올 테니까 이따가 다시 하자.”
싸울 땐 무시무시한 야수지만 평소엔 순한 양 같은 가린이 군말 없이 동굴로 들어갔다.
지하연무장을 나온 진천과 하수린은 후원으로 갔다. 천년노송에 이른 두 사람은 너럭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큰일 날 뻔했어요.”
하수린의 일성에 진천은 고소를 지었다.”무슨 말인지 알죠?”
“그러지 않아도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소.”
진천은 한 달 전 강민과의 비무를 관전하러 삼보장으로 돌아온 하수린의 요청으로 그녀의 난제를 해결할 묘책을 알려주었다. 내용인즉슨 팔정파의 방도들을 통째로 주안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진천은 하수린의 조부를 포함한 팔정파의 원로들에게 권왕이 세평회의 일원임을 알려주면 어렵지 않게 그들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보았다. 팔십 명 남짓하다는 팔정파의 무인들이 오면 세평(世平)라고 이름 붙인 도시 건설에 투입할 계획이었다. 그들에겐 질서유지의 임무가 주어질 터였다.
차소영이 마령 문가와 성주 성가가 백도방과 도화각에서 내보낸 호화나찰들 중 쓸 만한 이들을 추려 치안대를 조직했으나 워낙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아 손이 딸렸다. 팔정파의 팔십 무사가 가세하면 상당한 도움이 될 터였다.
하수린이 가지런한 눈썹을 찡그렸다.
“일 자체는 수월하게 풀렸어요. 장차 천하를 평정할 세력의 창립 공신이 되는 셈이니 당장의 작은 불편함은 감수하자는 호소엔 콧방귀만 뀌던 할아버지가 권왕 어르신이 우리와 한편이라니까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금방 넘어오더라고요. 당신이 정파 무림 최고의 기린아를 보기 좋게 꺾어 이름값이 더 올라간 덕을 본 것도 컸어요.
아무튼 그날로 이주에 필요한 준비에 착수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시일이 소요될 것 같더라고요. 가산 정리도 간단한 작업이 아니지만 식솔이 딸린 하급무사들을 무작정 내보낼 수도 없잖아요. 내가 있어봤자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며칠 지켜보다가 먼저 가서 세평회에 낭보를 전한다는 핑계로 팔정포를 떠났어요. 그게 아흐레 전이에요.
즐거운 마음으로 오다가 예전에 내가 참가했던 무림대회를 개최하는 포성을 지나는데 날벼락을 맞았지 뭐예요. 사벌 육방검문(六方劍門)의 고수들이 새카맣게 몰려와서는 일시에 그 도시를 접수해버리더군요. 당신의 충고가 떠올라 그들과 시비에 휘말리기 전에 조용히 떠났지만 난감했어요. 혹시 몰라 포성 인근의 세 시진을 돌아봤는데 사정이 비슷했어요. 어디에나 사파 무림의 무인들이 득실대더란 말이죠.
팔정포로 돌아가야 할지 내쳐 여기로 와야 할지를 두고 갈등하다가 후자를 택했어요. 팔정포로 돌아가면 다시 이리로 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중간에 사벌이 가로막고 있을 테니. 나는 체제가 굳어지기 전에 주안으로 가는 게 낫겠다고 결론 내렸어요.
양자호 너머로는 정맹의 무인들이 판을 치고 있더군요. 정운(政雲) 인근에서는 사평 팽가의 검사들과도 마주쳤어요. 내가 주안 삼보장으로 간다고 하니까 순순히 보내주더군요.
여기 오는 내내 도처에서 혼란이 가득했어요. 듣자하니 마련이 시영(始映)일대까지 진출해있다면서요? 여기서 이삼백 리밖에 떨어지지 않았잖아요? 당신이 이번에도 나를 빼고 출정할까 봐 이틀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렸어요. 가린이 조르는 바람에 비무에 응하기는 했지만 폐가 터질 지경이라고요.”
아닌 게 아니라 하수린의 퀭한 눈엔 수십 가닥의 핏발이 서 있었다.
진천은 절로 쓴웃음이 났다. 하수린이 지금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다면 노발대발할 게 뻔했다.
심중에 든 생각을 감추며 진천이 물었다.
“이렇게 와 버리면 팔정포는 어찌 하려오, 하 소저?”
하수린의 아미가 기어이 갈매기를 그렸다.
“잊었나요? 이럴 경우에 대비해서 당신이 알려준 제이안(第二案)이 있잖아요. 팔정포를 떠나기 전 할아버지한테 거듭 주지시켰으니까 문제없을 거예요. 사실 그래서 팔정포로 돌아가지 않은 것도 있어요. 갔다가 발이 묶이면 곤란하잖아요. 마련을 부순 다음엔 사벌을 친다면서요?”
진천은 전날 만약 하수린이 팔정파를 이끌고 주안으로 오기 전에 사패의 중립지대 공략이 시작되면 모든 행사를 중단하고 사벌의 그늘에 들어가라고 일렀다. 마련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사벌의 발뒤꿈치에 붙은 팔정파를 뭉개려들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십 할의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기에 하수린이 세평회의 활동을 하려면 후속조치를 취해야 했다.
진천이 입을 열기 전에 하수린이 말을 이었다.
“사벌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 소식 들었나요?”
진천은 하수린이 무엇을 묻는지 알고 있었다. 요 며칠 대륙을 휩쓴 대혼란의 와중에 유독 세인들의 관심을 끈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