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39
제138화
진천의 뇌리에 뱀눈을 가진 청년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반년 전 그와 치렀던 일전도 기억에 생생했다. 강호에 나온 이후 벌였던 싸움들 중 단연 가장 흉험하고 격렬했던 혈전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천지문에서 장왕과 조우했을 때보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곽건의 무위가 그보다 반수라도 위인데다 그가 대동한 방수들로 인해 친인들의 안위를 살펴가며 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진천을 보며 하수린이 이미 갈매기 모양을 이룬 눈썹을 더욱 찡그렸다.
“지금도 그치의 찢어진 눈이 떠오를 때마다 소름이 끼쳐요. 생긴 대로 논다고 뭔가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낯짝이더니 기어이 사고를 쳤네요. 장마(掌魔)의 흉내를 내려던 모양인데 너무 나갔어요, 그 작자.”
진천은 하수린의 판단에 절반만 동의했다.
나흘 전 사패가 전격적으로 중립지대 침공을 시작했을 때 사벌이 접수한 최초의 방파는 보영 수호보(守護保)였다.
일 갑자 전 일통무련의 본거지였던 보영은 그 당시의 성세와 영화는 사라진지 오래지만 여전히 대륙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삼십만의 인구를 자랑하는 대도였다. 일통무련이 해체되고 난 뒤 그곳에 몸담았던 일부 무인들이 의기투합해 창립한 수호보는 오십 년 동안 착실히 성장하며 중립지대를 대표하는 강대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수호보를 중립지대 최강의 세력으로 꼽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개파공신(開派功臣)들이 세상을 뜬지 오래지만 그들 못지않은 강자들이 뒤를 이은 덕분이었다.
보주인 묵검(黙劍) 장량(張良)은 초절정 중(中) 이상의 무위로 평가되었고 그 휘하의 수호칠걸(守護七傑)들도 다섯이나 절정에 든 강호들이었다. 특히 수호칠걸의 좌장인 십인장(十印掌) 조기(趙起)는 초절정 초입으로 알려져 있었다. 묵검과 수호칠걸만으로도 한 지역의 패자로 행세하기에 충분한 전력이었다.
그런데 오대세가나 사파칠문이 쳐들어오지 않는 한 누구와도 대적할 수 있다고 자부하던 수호보가 단 한 명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더욱이 그들을 지상에서 지워버린 이는 약관의 청년이었다.
일출 직후 정체불명의 괴인이 나타나 굴종을 강요했을 때 수호보의 무인들은 단순히 미친놈의 객기로 치부할 수 없었다. 그의 일도에 거대한 정문이 두 쪽으로 갈렸기 때문이었다.
묵검 장량을 비롯한 수호보의 고수들은 반년 전 장마 소중걸에게 멸문지화를 입었던 천지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침입자가 스스로를 벽력도문의 후예라고 밝히자 그들은 즉각 항전을 결의했다.
수호보를 세운 이들은 정파무림에서 넘어온 협사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오대세가 출신들도 여럿 있었다.
기실 묵검 장량과 십인장 조기의 사부는 각각 사평 팽가와 고암 설가를 떠나 일통무련에 가입한 풍운아들이었다. 정파의 명문을 뿌리로 두었다는 자긍심을 보석처럼 품은 수호보의 무인들은 한낱 사파의 종자에게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결의는 확고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벽력도문의 젊은 도객은 그의 무력을 확인하고도 달려드는 수호보의 무인들을 모조리 불귀에 객으로 만들었다. 천지문에서 십삼 인의 수뇌부만 몰살시켰던 장마와는 달리 그는 일반무사들에게도 가차 없는 살수를 뿌렸다. 이는 수호보의 무인들이 천지문의 문도들처럼 달아나지 않고 보주와 수호칠걸을 따라 옥쇄를 택했던 탓도 컸다. 그날 아침 흑의 청년의 칼에 목이 날아간 이들의 수는 삼백이 넘었다.
진천이 침중한 음성을 뱉어냈다.
“장마를 의식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지만 그보다는 본보기를 보이려고 했을 거요.”
수호보가 위치한 보영은 정맹보다는 사벌에 가까웠다. 하지만 수호보는 정맹에만 세금을 바쳤다. 사벌로서는 정맹에 속한 문파처럼 구는 수호보가 오랫동안 못마땅했을 것이었다. 구 사왕과의 협약만 아니었다면 진즉 수호보를 짓이겼을 터였다. 족쇄가 풀린 후 사벌이 제일 먼저 수호보를 노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수호보에서의 살겁에 겁을 먹은 주변 방파들이 알아서 복종할 것을 계산했다는 말이군요.”
“그렇소. 그래서 일부러 끝까지 대항할 수호보를 첫 번째 희생자로 삼은 거요. 실제로 수호보의 변고는 기이하리만치 급속히 퍼졌다고 하오. 사벌이 사전에 준비해두었다는 뜻이오. 여하간 사벌은 그 덕을 톡톡히 보았소.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저항을 포기하고 바짝 엎드렸으니 말이오.”
“하지만 내가 지나왔던 포성에서도 꽤 많은 무인들이 사벌의 침략자들에 맞서다가 목숨을 잃었어요.”
“포성은 예외에 속하는 곳이오. 북운상단의 오 단주에게 듣기로는 사벌이 장악한 영역 중 네 개의 시진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고 하오. 그래도 사벌은 마련처럼 무차별적인 학살은 하지 않았소. 그들의 치하에 든 백성들은 이제부터 생지옥을 경험하게 되겠지만.”
하수린의 작고 도톰한 입술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사패의 힘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며칠 만에 그 광대한 땅을 몽땅 집어삼키다니. 솔직히 전에 당신이 사패가 마음만 먹으면 사흘 안에 중립지대를 집어삼킬 수 있을 거라 했을 때 믿지 못했는데 사실이었어요. 그들의 세력이 이렇게나 강대했다니. 한편으로는 그들의 발을 오십 년이나 묶은 구 사왕의 위엄도 엄청나네요. 무림은 소수의 절대강자들이 좌지우지하는 놀이터라더니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었어요.”
하수린이 진천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중립지대가 사라졌으니 사패의 충돌은 필연이겠죠?”
“그럴 거라 보오. 하지만 당분간은 그들도 숨을 고를 거요. 어쩌면 일 년, 혹은 그 이상 평화가 유지될 수도 있소.”
“우리는 어떻게 할 건가요? 손가락만 빨고 있지는 않겠죠?”
“물론이오. 무엇보다 마련의 행태를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소.”
하수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언제 출동할 건가요?”
진천은 솔직히 대답했다.
“빠르면 열흘, 늦어도 이십일 후면 나가게 될 성싶소.”
하수린의 동공 깊숙한 곳에서 전의의 불길이 타올랐다.
“좋아요. 채찍의 날을 벼려두겠어요.”
“…….”
진천은 차마 그가 머릿속으로 정한 다음 출전자 명단에 그녀가 들어있지 않음을 밝힐 수 없었다.
이틀 후 팽하연이 왔다.
지하연무장에서 가린과 하수린, 그리고 고량을 상대로 집단비무를 벌이고 있던 진천은 여상구와 함께 나타난 그녀를 보고는 반색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진천의 인사에 팽하연이 환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진천은 병을 앓은 사람처럼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에 그간의 마음고생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시일을 맞추느라 고생했어요.”
팽하연은 전날 시월 십 일까지는 일을 마무리 짓고 삼보장으로 귀환하겠다고 했었다. 그녀는 스스로 정한 날짜를 지킨 것이었다.
진천에게서 경과를 묻는 질문이 나오기 전에 팽하연이 결과를 알렸다.
“진 공자가 염려한 대로 팽가는 절대로 나를 놓아주려하지 않더군요.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철없이 가출하는 아이들 마냥 서신 한 장 남기고는 무작정 뛰쳐나왔어요.”
마침 거처로 삼은 동굴에서 빠져나오던 대웅이 그 소리를 듣고는 면상을 붉혔다.
여상구를 흘깃 바라본 팽하연이 말을 이었다.
“여 공 말마따나 일단 일을 저질러 보려고요. 물이 쏟아진 다음에는 가문의 어른들도 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겠죠. 아무튼 돌아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으니 거둬주길 바래요.”
여상구가 이마 주름을 잡았다.
“앞으로는 이곳이 천하의 중심지가 될 거외다, 검선. 그러니 돌아갈 필요가 없소. 그들이 이리로 몰려들 테니. 팽가가 검선의 선견지명에 감사하는 날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
팽하연이 빙긋 웃었다.
“그리 되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여 공.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 그보다 내가 방해가 된 모양인데 하고 있던 비무를 계속하세요들.”
“그러지 말고 검선도 같이 하는 게 어떻겠소? 이제 어엿한 세평회의 일원이 되었으니 모두에게 검선의 위용을 보여주구려. 내가 그 아름다운 검을 받고 싶지만 보다시피 몸이 이러니 오늘은 내 의제에게 영광을 양보하겠소.”
여상구의 제안에 팽하연의 봉목에 기광이 떠올랐다.
“불감청이언정고소원이에요. 많이 부족하지만 진 공자의 무학을 직접 겪어보고 싶네요. 허락해 주겠어요?”
진천이 해야 할 대답이 여상구의 입에서 나왔다.
“허락하다마다요. 오랜만에 검선의 멋진 솜씨를 구경하고 싶으니 얼른 시작하게나, 아우님.”
여상구의 재촉에 쓴웃음을 지은 진천이 팽하연에게 포권을 취했다.
“검선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팽하연이 마주 포권했다.
“내가 할 소리예요. 한 수 배우고자 하니 잘 부탁해요.”
팽하연의 내공을 주입받은 자색(紫色) 검신에서 노을빛 같은 검기가 피어올랐다.
검기는 곧장 삼사 장 떨어진 진천에게로 날아가 그의 동체를 감쌌다. 그러나 자하(紫霞)는 진천을 묶어두지 못했다. 진천의 신형이 유령처럼 검망을 빠져나가자 예상을 했으면서도 팽하연이 탄성을 터뜨렸다.
진천의 신묘한 신법을 확인한 팽하연은 마음 놓고 맹공을 퍼부었다. 지하연무장 일각이 그녀의 검에서 발현된 자줏빛 노을로 가득 찼다.
절멸도를 뽑아들긴 했지만 진천은 공격을 삼간 채 방어에 치중했다. 일백여 초의 공방전 끝에 팽하연이 검을 내려뜨렸다. 진천도 절멸삭을 회수했다. 흐물흐물한 백색의 강기가 진천의 좌수로 빨려 들어가는 기경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팽하연에게 여상구가 물었다.
“어땠소, 검선?”
진천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팽하연이 대답했다.
“전날 만수보에서 있었던 구인결의 결과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나는 강호에 떠도는 헛소문을 믿은 어리석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어요. 제아무리 대단한 초신성이라도 창천도군을 꺾는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오늘 확실히 알겠네요. 그 어른이 남천도왕을 경계하느라 한눈을 팔다가 하남 무림의 어린 신룡에게 망신을 당한 게 아니었음을. 우리 회주는 능히 그 위대한 도호를 꺾을 수 있는 천룡이었군요.”
진천은 두 가지 오해를 바로잡고 싶었다. 하나는 그녀가 말하는 ‘헛소문’이 상당부분 사실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가 세평회의 회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고 여상구가 팽하연의 말을 받았다.
“이제 곧 천하도 알게 될 거외다. 단순히 팔대무왕을 능가하는 희대의 기재가 출현한 게 아니라 장차 영세제일인의 권좌를 두고 천무대제와 다툴 불멸의 무존(武尊)이 탄생했음을 말이오. 아우님은 터무니없이 강할뿐더러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지모까지 갖췄다오. 거기에 인세에 보기 드문 기품과 정심의 소유자이기도 하오. 우리는 그 영웅이 써내려가는 신화에 함께하는 복운을 누리는 셈이오.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소?”
진천은 의형의 찬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수습에 난망해하는 그에게 팽하연이 짐을 얹었다.
“전적으로 동감이에요, 여 공. 그래서 걱정이군요.”
“무슨 말이오?”
“진 공자를 시기한 이들이 그가 성장하도록 두고 보고만 있지 않을까 봐 걱정이라는 말이에요. 당장 우리는 마련과 전쟁을 치러야 하잖아요. 정맹이 지원할 리 만무하니 여기 일곱 명의 전사들만으로 초절정의 마두들을 수십 명이나 거느린 마련에 맞서야 할 텐데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들과 벌이게 될 사투가 두려운 건 아니에요. 이미 각오를 하고 세평회에 참여했으니까. 하지만 여 공의 말처럼 천무대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무신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를 진 공자가 마도 타도의 대업을 이루는 도중에……. 미안해요, 불길한 소리를 해서. 아직 할머니가 되려면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속은 벌써 노파심으로 가득 찬 모양이네요.”
여상구의 이마를 가로지른 주름이 깊어졌다.
“우리는 일곱이 아니오, 검선. 중요한 회원을 빠뜨렸잖소. 권왕 어르신 말이오. 나처럼 아우님과 형제결의를 한 그분이 아우님의 위험을 두고 볼 리가 없소. 설사 그 어른이 없더라도 나는 아우님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소. 첫 만남부터 예감했던 건데 지난 칠 개월 간 아우님과 여러 차례의 위기를 함께 이겨내며 나에겐 확신이 생겼다오. 뭔지 아시오?”
잠시 말을 멈춘 여상구가 그를 주시하는 중인을 둘러보며 뒷말을 이었다.
“내 아우님은 불사신이라오. 그것만이 아니오. 아우님과 함께 하는 이들도 아우님의 가호를 받소. 여기 우리 모두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겪었소만 실제로 죽은 이는 아무도 없소. 아우님의 은덕이 아니고서는 우리에게 일어난 기적을 설명하기 어렵소.”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친인들을 보며 진천은 좀 더 일찍 의형과 팽하연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