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40
제139화
진천은 토굴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통로를 지나 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돌자 야명주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이 그를 반겼다. 사오 장쯤 더 나아가자 두 평 남짓한 원형의 공간이 나왔다. 대웅이 거처로 쓰고 있는 토실(土室)이었다. 후면의 벽에 수십 자루의 칼만 걸려있을 뿐 휑뎅그렁했다.
흙바닥에 좌정한 채 운기조식 중이던 대웅이 눈을 떴다.
진천은 그의 앞에 앉지 않고 서서 말했다.
“오랜만에 바람이나 쐴까, 대웅.”
진천을 멍하니 바라보던 대웅이 그의 권유를 거절했다.
“싫어.”
진천이 억지로 대웅을 일으켰다.
“그러지 말고 나가자. 한 동안 햇볕을 쬐지 못했는데 달빛이라도 흠뻑 받아야지. 만월인데다 구름 한 점 없어 눈이 시릴 정도다.”
대웅이 마지못해 진천의 손길에 응했다.
지하연무장을 나오자마자 달무리가 진 하늘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대웅이 투덜거렸다.
“쳇, 언제부터 거짓말쟁이가 된 거냐, 천.”
진천이 시치미를 뗐다.
“어? 언제 구름이 꼈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됐어.”
대웅이 진천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계단을 도로 내려가지는 않고 진천이 잡아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후원 쪽으로 걸어갔다.
연못에 이르자 대웅이 정자로 들어갔다. 천년노송까지 가고 싶었으나 진천은 잠자코 그를 따랐다.
정자에 오른 대웅이 천공에 뜬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주르륵. 그의 뺨 위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젠장.”
욕설을 내뱉은 대웅이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오해하지 마, 천. 그녀를 생각한 게 아냐. 갑자기 엄마와 누이들이 떠올랐을 뿐이야.”
진천이 대웅의 야윈 등을 토닥였다.
“그래, 대웅. 저 달을 보고 있자니 나도 창인의 벗들이 그립구나.”
두 사람은 잠시 묵상에 잠겼다.
다시 입을 연 이는 대웅이었다.
“나 참 한심하지, 천? 다들 수련에 여념이 없는데 혼자 토굴에 틀어박혀 골골거리고 있으니. 모두 나를 비웃고 있을 테지?”
진천은 자괴감을 수시로 드러내는 대웅이 안타까웠다. 가끔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보였던 위악적인 모습이 그리웠다.
“그럴 리가 있냐. 형님과 가린은 너를 생명의 은인으로까지 여기는데. 나는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보탬도 되지 않았잖아. 장왕은 그렇다 쳐도 화염장에게도 작은 타격조차 입히지 못했는데. 파도천망을 날리고는 맥없이 쓰러지기만 했으니 오히려 내가 구명지은을 입은 셈이지.”
진천의 음성이 진지해졌다.
“그렇지 않다, 대웅. 두 번 다 네 결단과 결행이 아니었더라면 결과가 완전히 달라졌을 거다. 네가 벌어준 시간 덕분에 나와 형님, 그리고 가린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설사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손 쳐도 네 행위는 찬사를 받아야 마땅하다. 적어도 우리 세 사람은 네 진의를 알기에 뼛속 깊이 감사하고 있다.”
대웅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한 줌의 가식도 없는 진실이었다.
그래도 침울함이 가시지 않은 대웅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진천이 말을 이었다.
“모르겠냐? 너는 이미 네 병을 치료했다, 대웅.”
허공을 배회하고 있던 대웅의 시선이 진천에게로 내려왔다.
“무슨 소리야?”
“동지들을 위해 목숨을 거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웅. 최고의 용자들만이 가능한 행동이다. 너는 여러 차례 네가 결코 겁쟁이가 아님을 증명했다. 특히 지난번 오양에서와 이번에 여기서 장왕과 하염장을 상대로 보인 용기는…….”
살점이라고는 한 점도 붙어있지 않은 낯짝을 일그러뜨리며 대웅이 진천의 말을 끊고 들어갔다.
“그러면 뭘 해. 그녀 앞에서 오줌이나 질질 싸는 놈인데.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이야. 나 같은 놈은 숨을 쉬고 있을 가치도 없어.”
“너는 그 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 대웅. 공식적인 비무에서 그를 꺾어라. 충분히 할 수 있다. 너와 그의 차이는 크지 않다. 천 개의 칼을 부러뜨린다는 각오로 수련에 매진하면 이삼 년 내로 그를 잡을 수 있다. 나를 믿어라.”
“하지만 그런다고 그녀가 이리로 돌아오진 않을 거잖아. 그녀는 이미 그자의 여인이 되었을 테니까.”
“노 소저가 그와 이루어졌는지는 아직 모른다. 중요한 건 그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네 자존감을 회복하는 거다. 그리고 그 과제는 오직 그를 물리침으로써만 이룰 수 있다.”
“정말 내가 섬전도를 이길 수 있을까, 천?”
“물론이다, 대웅. 그만이 아니라 네 동생도 넘을 수 있다. 얼마든지.”
조금씩 달아오르던 대웅의 얼굴이 급격히 식었다.
“설마 내가 수호보의 변사를 듣지 못했다고 여기는 건 아니지, 천? 그 놈은 혼자서 묵검과 수호칠걸을 몰살시켰어. 나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야. 수호칠걸 중 하나인 십인장만 해도 나보다 상수야. 건이 놈은 더 세졌어. 당연히 나와의 차이는 더 벌어졌고. 나는 골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그놈을 당할 수 없어.”
곽건을 떠올리기만 해도 무서운지 대웅이 진저리쳤다.
진천이 떨리는 대웅의 어깨를 양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방금 전에 했던 말, 정정하마. 너는 많이 좋아졌지만 완치된 건 아니다, 대웅. 궁극적으로는, 아니 근본적으로는 네 동생과 맞설 수 있어야지만 네 병이 완전히 나을 거다. 회피해선 안 돼. 매일 눈을 뜰 때마다 네 공포를 직시하고 기필코 극복하겠다는 결의를 다져야 한다. 네 무재는 그에게 뒤지지 않는다. 조건 또한 나쁘지 않다.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강자들과 비무수련을 할 수 있으니까. 마련과의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실전경험도 쌓을 수 있고.”
떨림이 잦아들었지만 대웅은 여전히 의기소침했다.
“내가 느는 만큼 그놈도 늘 거야. 격차가 줄어들기는커녕 갈수록 커질 게 뻔해. 건이 놈에게 갈 것도 없이 너하고도 그렇잖아. 포성에서 너를 만나 처음 손을 섞었을 때 나는 비록 졌지만 우리의 무력이 거의 비등하다고 믿었어. 하지만 지금 우리를 봐. 내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너는 비교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버렸어. 네 성장을 질시하는 게 아냐, 천. 건이 놈을 따라잡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가뜩이나 더 강해지려고 혈안이 된 놈인데 너한테 설욕하기 위해 얼마나 발광하겠어?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영원히 그놈 발바닥에도 미치지 못할 거야.”
대웅의 어깨를 놓아준 진천이 천공으로 시선을 올렸다.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 대웅. 나중에 하려고 했지만 오늘 꺼내는 게 낫겠구나.”
“뭔데?”
“나는 오래 살지 못할 거다.”
대웅이 왕방울 눈을 한껏 부릅떴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내가 익힌 심공은 일종의 마공이다. 내 공력의 원천은 독정(毒精)이고.”
“네가 마인이자 독인이라고? 말도 안 돼.”
“물론 나는 마인도 독인도 아니다. 다만 그들처럼 체득한 신공의 부작용에 시달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의 경우는 수명 단축이 되겠지만.”
대웅의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내 사부는 마흔넷에 죽었다. 심공의 후유증으로 인한 병사였다. 나의 화후는 당시의 사부보다 월등히 높다. 그러니 그보다 훨씬 일찍 명이 끊어질 공산이 크다. 어쩌면 얼마 남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어어…….”
충격으로 인해 대웅은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작년에 심공이 무르익어 절멸도를 발할 수 있게 된 후 불현듯 그런 예감이 들더구나. 이걸 쓸 때마다 명이 짧아질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었는데 올해 세 차례 심공 상의 환생결을 운용한 후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내가 강해지는 만큼 내 수명을 줄어들고 있음을.”
“그러면 다 집어치우고 창인으로 돌아가라, 천. 나도 같이 갈게. 거기 가면 싸울 일이 없을 테니 절멸도를 뽑지 않아도 되잖아. 혹시라도 사달이 벌어지면 내가 처리하면 돼. 거기서야 내 무력이 통하겠지.”
진천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고맙지만 사양하마. 나는 전란의 기운이 온 대륙을 덮은 이 시기에 세상에 나온 게 운명인 것 같다, 대웅. 숨이 붙어있는 동안 최대한 많은 일을 하고 싶다. 마도를 타고하고 사파도 혁파하고. 어디까지 이루고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떠나는 날까지…….”
“불길한 소리 하지 마.”
“하하, 그래.”
“웃지도 말고.”
“그래. 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당장 내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니까.”
“너는 천재잖아, 천. 틀림없이 네 심공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일찍 죽지 않아도 되잖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
“노력하마.”
“그거로는 부족해. 약속을 하라고.”
“그래, 최선을 다하마.”
“같은 소리잖아.”
고소를 지은 진천이 화제를 바꾸었다.
“내가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두 가지다, 대웅.”
대웅이 마지못해 진천의 의도에 응했다.
“이유라니?”
잠시 뜸을 들이던 진천이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좋다, 대웅.”
뚱딴지같은 말에 흠칫 놀라더니 대웅이 울먹거렸다.
“나도 그래, 천. 나처럼 형편없는 놈을 친구로 받아줘서 정말 고마워.”
진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는 형편없지 않아, 대웅. 나는 지금도 우리의 첫 비무를 떠올릴 때마다 절로 흐뭇해지곤 한다. 내 인생을 통틀어 그렇게 즐거웠던 비무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그렇게 격렬하게 싸우면서도 우리 둘 다 상대를 상하게 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품고 있지 않았더랬지. 고백컨대 황홀하기까지 했다.”
대웅이 맞장구를 칠 겨를을 주지 않고 진천이 말을 이었다.
“너와 동행하며 비무 때 가졌던 호의가 점점 더 커졌다. 특히 양자호반에서 못된 한량들을 혼내주고 여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네가 벽력도문 출신임을 진즉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창인에서 겪었던 사파 무인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야비하고 잔혹한 악한들이었다. 그런데 너로 인해 사파에 대한 내 편견이 깨졌다. 너를 보고서야 나는 사파인도 정파인 못지않은 협심(俠心)이 있을 수 있음을 알았다. 너는 바탕이 선한 사람이다, 대웅.”
일순 진천의 목소리가 엄숙해졌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부탁하고 싶다, 대웅. 네가 떠난 이후의 세상을. 세상의 평화를. 너무나 막중하고 어려운 임무이기에 너밖에 맡길 사람이 없다. 이것이 오늘 네게 내 비밀을 털어놓은 첫 번째 이유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천?”
“그럼. 나는 네가 훗날 팔대무왕에 필적하는 무존이 되리라 확신한다, 대웅. 시절이 수상하여 괴물들이 한꺼번에 여럿 등장했지만 차후 난세가 끝날 무렵이면 대부분 정리될 거다. 나는 혼란스런 시기의 전사가 될 터이니 너는 태평한 세상의 성군이 되어다오, 대웅.”
“그러지 말고 역할을 바꾸자, 천. 내가 나가서 미친개처럼 싸울게. 까짓 두 번이나 목숨을 걸었는데 세 번, 네 번이라고 못 하겠어? 그동안 너는 네 심공의 조문을 없애는 데만 전념해라. 네가 없는 인생과 세상은 상상하기도 싫어.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서…….”
진천이 뼈의 형태를 고스란히 드러낸 대웅의 손을 잡았다.
“이미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대웅. 이제 돌이킬 수는 없어. 너는 오래오래 살아남아 최후의 승자이자 최강의 무존이 되어야 한다. 둘도 없는 친구로서 부탁하는 것이니 꼭 들어다오. 그럴 거지?”
“…….”
대웅의 응답을 강요하지 않고 진천이 두 번째 이유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