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41
제140화
“나는 올해 무력이 급증했다, 대웅. 하지만 급격한 성장이 꼭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그 대가로 수명을 적잖이 깎아먹어야 했으니까. 나는 네 동생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수호보에서 그는 확실히 지난 사월 이곳에서 보았던 것보다 한 단계 위의 무위를 드러냈다. 그가 비약적인 성취를 이루었던 폐관수련을 마친 게 올 초라고 했지? 그러고서 다시 몇 달 만에 뚜렷하게 진일보했다는 건 정상이 아니다. 노력의 결과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십중팔구 내 생환결과 같은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했을 거다.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결국엔 나처럼 대가를 치르게 될 거고.
그러니 긴 안목을 가지고 보다 장기적으로 네 삶을 꾸리길 바란다, 대웅. 누누이 말하지만 네 재능은 나나 네 동생에게 뒤지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너보다 앞선다고 십 년이나 이십 년 후에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이십 년이 아니면 오십 년 후를 내다봐도 된다. 그래도 지금 팔대무왕보다 훨씬 젊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라고들 하지 않냐. 도중에 포기하지 않는 한 나는 네가 훗날 이 땅의 최강자가 되리라 확신한다. 부디 너 스스로를 아끼고 꾸준히 정진해다오. 그래서 무림의 절대지존이 되어 태평성대를 이루어다오. 먼저 떠날 나를 위해.”
진천의 음성에 담긴 진심이 대웅을 울렸다. 눈물을 흘리는 친우의 어깨를 다독이며 진천이 손을 내밀었다. 달빛이 서로의 팔뚝을 맞잡는 두 사내의 등을 자상하게 어루만졌다.
진천이 대웅과 밀담을 나눈 다음날 새벽 권왕이 돌아왔다.
그를 부르는 기운을 따라 죽림에 들어간 진천은 권왕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에게 맡긴 일이 성사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잘 다녀오셨는지요, 큰 형님.”
실망을 내색하지 않고 진천이 담담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권왕이 떫은 감을 씹은 표정을 지었다.
“다 글렀다, 아우야. 당최 말을 들어먹어야지. 차라리 쇠귀에 경을 읽어주고 깨우치길 바라는 게 낫겠더라. 자존심을 내려놓고 보름 내내 들러붙어서 졸랐지만 들은 척도 않더구나, 그 돌덩이. 그나마 코딱지만큼 남아있던 의만 상하고 말았다. 이게 다 네 녀석 탓이다. 분명 씨도 안 먹힐 걸 알았을 테지? 그러면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이 늙은 형님을 부려먹은 게지?”
“죄송합니다, 큰 형님.”
쓰게 웃으며 진천이 사과했다. 권왕이 실패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기 위해 괜한 트집을 잡는 게 아님을 알고 있어서였다. 기실 권왕을 보낼 때는 요행을 바라는 얄팍한 속셈도 상당했다.
진천은 권왕이 검왕을 삼보장으로 데려와 주길 바랐다.
구 사왕과 사패가 협약한 기한이 종료되었으니 검왕은 더 이상 월교에 머물러 있을 까닭이 없었다. 마련과의 전쟁에 동참하지 않더라도 그가 삼보장에 들기만 한다면 세평회는 최고의 안전판을 마련하게 되는 셈이었다. 외통수에 몰리지 않는 한 마왕은 권왕과 검왕이 들어앉은 용담호혈에 쳐들어오지 못할 터였다.
검왕을 들이려던 계획이 무산되었으니 이제 삼보장은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지난번에 크게 데인 장왕은 당분간 몸을 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하시라도 마왕의 요청에 응해 삼보장 침공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권왕 만으로는 그들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반사적으로 대책을 강구하고 있던 진천이 처진 눈꼬리를 올렸다. 권왕의 오므라든 입술이 씰그러졌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노여움이 아니라 장난기임을 알고 있었다.
“성공하셨군요!”
진천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권왕이 얼른 웃음기를 지웠다.
“네 녀석이 신통방통하다는 건 안다만 이번에는 헛짚었다. 아우야. 내가 거짓말을 못한다는 걸 잊었느냐? 소 형은 거처를 옮겨 나와 함께 지내자는 요구를 묵살했다. 이런 우라질, 말해놓고 보니 또 열 받네. 아무튼 소 형은 삼보장이 아니라 무릉도원에 가자고 꼬드겨도 응할 위인이 아니니까 기대를 버려라, 아우야.”
진천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방금 전 그가 포착했던 단서가 너무나 확연했다.
“혹시 검후께서 저희와 함께 타도 마도의 대업에…….”
진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권왕이 싹을 잘랐다.
“꿈 깨라, 이 녀석아. 그녀가 뭐가 아쉬워서 손해 볼 짓을 하려 들겠느냐? 세평회가 전날의 일통무련 만큼 강대해지면 모를까 그 전에는 어림도 없다.”
“……그렇군요.”
“어린 나이답지 않게 감탄할만한 평정심을 가진 네가 이렇게 앞뒤 재지 않고 흥분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중요한 문제였구나. 하긴 그러니 나를 그렇게 마구 부려먹은 게지.”
“죄송합니다.”
“무릇 사내는 사과를 입에 달고 살면 안 되느니라. 딱 한 번이면 족해.”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풀 죽은 척 하지 마라, 이 녀석아. 어울리지도 않고 속도 빤히 보이니까. 다 글렀다는 내 말을 믿지 않는 게지?”
“아닙니다, 큰 형님. 다만 어느 정도의 성과는 거두셨으리라 믿고 있을 따름입니다. 장도에 나섰던 큰 형님께서 빈 손으로 돌아오셨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갈수록 혀가 번드르르해지는구나, 이 녀석. 그렇게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처럼 굴다간 언젠가 원숭이처럼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을 게다.”
적당한 비유가 아니었으나 진천은 걸고넘어질 생각이 없었다.
일자 눈 속에 감춰진 동공에서 파란 빛을 쏘아내며 권왕이 진천을 시험했다.
“나름 고생했으니 거저 줄 수는 없다. 네 재주로 선물보따리를 풀어 보거라, 아우야.”
고소를 머금은 진천은 기꺼이 권왕의 놀이를 받아들였다.
“검왕 어르신께서 무언가 조건을 내걸지 않으셨는지요?”
권왕의 백미가 이마 가운데로 몰렸다. 진천은 정답을 말했음을 알았다.
“허어, 대체 어떻게 아는 게냐? 만리통술(萬里通術)을 익혔을 리도 없고. 나에게도 비법을 알려다오, 아우야.”
“비법 같은 건 없습니다, 큰 형님. 그냥 그렇지 않을까…….”
“어허, 또 그 소리. 그러니까 너는 되고 나는 안 된단 말이지? 너는 ‘척’만 들어도 ‘착’을 잡아내는 명석한 두뇌를 가졌고 나는 ‘척척’을 일러줘도 ‘착착’도 알아내지 못하는 석두란 말이지? 그런 게냐?”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됐다, 이 녀석아. 오냐, 어디 얼마나 대단한지 끝까지 가보자. 어떤 조건인지도 맞춰 보거라.”
고민하는 시늉을 하던 진천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권왕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르긴. 알면서 쓸데없는 겸양을 떠는 거 다 안다, 이 녀석아. 알아맞히기 전에는 절대로 알려주지 않을 테니 그리 알아라.”
농담만은 아님을 알기에 진천은 난감했다.
“혹시 그분께 제자가 있지는 않은지요?”
진천의 응수타진에 움찔거리더니 권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괘씸한지고. 다 짐작하고 있으면서 이 노형을 희롱하다니.”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이 녀석이. 그만하자. 신기한 것도 한두 번이지 자주 보니 식상하구나.”
진천은 억울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헛기침을 한 권왕이 경과를 알려주었다.
“고 형이 하도 요지부동인지라 나도 오기가 생기더구나. 그래서 심상수련도 하지 못하게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옆에 붙어 앉아서 귀에 딱지가 않도록 같은 소리를 수백, 수천 번 읊조리고 있으려니 석상 같던 소 형도 반응을 보이더구나. 그런데 그 반응이라는 게 완전히 내 예측을 빗나간 것이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온 지 아느냐? 긴장할 거 없다, 이 녀석아. 맞추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네 얘기를 묻더구나. 정말 그렇게 강하냐고. 그래서 냉큼 그렇다고 대답했다. 네가 우리는 물론이고 전날의 무황보다도 뛰어난 재목이라고 했더니 느닷없이 제안을 하더구나. 자기가 검공을 전수해준 아이가 있는데 만약 네가 그를 꺾으면 내 청을 들어주겠다고. 어떠냐? 소 형을 끌고 오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임무를 훌륭히 완수한 셈이 아니더냐?”
진천은 권왕이 걸터앉은 바위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큰 형님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좋아하긴 아직 이르다, 아우야. 네 녀석을 믿지만 왠지 찜찜하단 말이지. 후인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하늘이 무너져도 눈썹 하나 까딱거리지 않을 그 인간이 당혹스러워 하더구나. 그 아이가 외인을 몹시 꺼린다며. 그러면서 그 아이 역시 석년의 무황을 능가하는 기재이니 단단히 준비하고 오지 않으면 낭패를 겪을 거라고 경고하더구나. 소 형은 허튼 소리를 내뱉는 위인이 아니다. 무황을 누구보다 높이 평가하는 그가 그런 말을 했을 때는 그만한 근거가 있음이야. 그의 전인은 필히 보통내기가 아닐 게다.”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바위 위에서 진천을 내려다보던 권왕이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그래야지. 네가 그 아이에게 지기라도 하면 있는 대로 큰소리를 친 내 체면도 구겨질 테니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나와 특훈에 들어가자꾸나. 반의반 보라도 나아간 연후에 소 형의 제자와 붙어야 안심이 될 터. 긴 말 할 것 없이 바로 시작하자. 따라오너라.”
진천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권왕이 몸을 날렸다.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으나 진천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우르릉, 쾅.
지하연무장에 때 아닌 뇌성이 울려 퍼졌다. 권왕의 주먹이 일으킨 강기 폭풍에 삼천 평의 공간이 몸살을 앓았다.
지축을 울리는 진동과 굉음에 놀라 부랴부랴 연무장으로 달려 내려온 세평회 인사들은 처음 견식하는 권왕의 무위에 넋을 잃었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유감스럽게도 권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출수를 멈추었다. 관전자들의 등장에 심기가 상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일자 눈 속에서 기광이 번득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이더냐?”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의 의미를 간파한 이는 진천뿐이었다.
“큰형님께서 다녀오시는 동안 약간의 성취가 있었습니다.”
진천의 답변에 권왕이 주름으로 덮인 낯짝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나가서 얘기 좀 하자, 아우야.”
“네, 형님.”
입구를 향해 날아가려던 권왕이 발에 준 힘을 뺐다.
“아니,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하던 비무나 계속하자.”
진천은 방금 전과 똑같이 응답했다.
“네, 형님.”
진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권왕이 날린 탄강이 그의 동체를 덮쳤다. 팔영보 상의 절초인 사일(斜日)로 권왕의 공격을 빗겨낸 진천은 달아나는 대신 절멸삭을 뽑아들고 반격에 나섰다.
가공할 무위를 뽐내며 노소가 펼치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에 관전하는 육인의 입에서 끊임없이 탄성이 새어나왔다. 이백여 초의 격전 끝에 권왕이 손을 거두었다. 한계에 이르렀던 진천이 쓰러지지 않고 간신히 신형을 지탱했다.
그런 진천을 가만히 지켜보던 권왕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진천은 그가 목전에 이르자 자세를 한껏 낮췄다. 그대로 서 있으면 정수리 높이가 그의 배꼽 어림에 불과한 의형을 내려다보는 불경을 저지르게 될 터였다.
진천에게 바짝 붙은 권왕이 이상한 행동을 했다. 진천의 머리에 손을 얹더니 그 손으로 자신의 발목과 무릎, 그리고 허리를 차례로 짚은 것이었다. 진천은 무슨 뜻인지 알고도 남았다.
“오래살고 볼 일이라는 옛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구나. 살아생전 너 같은 괴물을 보게 될 줄이야. 준비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 당장 떠나자. 가서 고 형의 높은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주자꾸나, 아우야.”
쓴웃음을 지은 진천이 권왕을 진정시켰다.
“검왕 어르신을 찾아뵙기 전에 긴히 ‘할 일’이 있습니다, 큰 형님. 사흘만 기다려 주십시오.”
진천의 입에서 검왕의 별호가 나오자 가린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정작 그가 강조한 ‘할 일’에 관심을 둔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