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43
제142화
구륜회를 상징하는 명물인 앙천구주는 십오 장 높이의 철주였다.
꼭대기의 면적은 손바닥보다 약간 큰 정도였으나 진천은 용케도 한 발만 디디고 중심을 잡았다. 외발로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진천은 개미머리처럼 보이는 적들의 수를 헤아렸다. 광장에 운집한 이들은 어림잡아도 일백은 넘어보였다. 예상을 상회하는 숫자였다.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봉두난발의 괴인으로 추정되는 자의 목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저놈의 정체가 뭐냐?”
누군가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면상을 제대로 보지 못해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하남신룡 같습니다, 고루독군(古壘毒君).”
진천은 비로소 괴인의 신분을 알았다. 짐작대로 독마류의 이인자인 백야행(白爺幸)이었다. 백야행은 마련 십대마군에 속하는 거물이었다. 창인을 떠날 무렵의 무력이라면 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강호이기도 했다.
“하남신룡? 미꾸라지 같은 놈이라더니 과연 그렇군. 하지만 이젠 독 안에 든 쥐새끼나 마찬가지다. 혼자서 쳐들어오다니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왔구나.”
예의 음성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혼자가 아닐 것입니다, 고루독군. 전날 오양에서도 방수들을 대동했다고 들었습니다. 그자들이 바깥 어딘가에 잠복하고 있을 거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뭔가 석연치…….”
백야행이 콧방귀를 겼다.
“흥, 상관없다. 저놈을 족치면 튀어나오겠지. 도망가거나. 나오면 죽이고 달아나면 쫓으면 된다. 일단 저놈부터 잡자.”
“하지만…….”
“시끄럽다. 내 말에 토를 달면 네놈부터 녹여주마.”
수하의 이견 제시를 사전 봉쇄한 백야행이 명령을 내렸다.
“저놈을 끌어내려라.”
독인들이 움찔거렸다. 미끄러운 쇠기둥을 타고 오르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올라간들 하남신룡을 무슨 수로 잡는단 말인가. 그가 코뚜레에 꿰인 송아지처럼 곱게 따라올 리 만무하지 않은가.
백야행이 특정한 이를 지목하지 않았음을 위안으로 삼은 독인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그들의 상전은 명을 수행하지 않으면 같은 편에게도 살수를 서슴지 않는 악종이었다.
모두들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아무도 나서지 않자 백야행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지금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게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근처에 섰던 독인들이 부랴부랴 쇠기둥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철주에 매미처럼 달라붙었다. 가린만한 덩치의 거한이 그들을 뜯어내고 기둥을 안았다. 그러고는 어깨를 가리켰다. 그의 뜻을 알아들은 동료가 그들 디딤돌 삼아 올랐다. 다시 그 위를 또 다른 자가 밟고 올라섰다. 아래쪽에 있을수록 더 안전할 터이기에 독인들 사이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졌다.
위에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내려다보자니 진천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평범한 민초들에겐 죽음의 사신과도 같은 독인들이지만 그의 눈엔 덜 떨어진 반 푼 어치로 보였다.
절대다수의 독인들은 독인이 되는 과정에서 독성에 뇌를 침습당해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는 강호의 속설이 사실임을 깨달은 진천은 떨떠름했다. 독공을 익히진 않았지만 독정을 공력의 원천으로 삼았기에 그도 어떤 의미로는 독인이랄 수도 있었다. 한줌의 동질감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진천은 그들의 어리석은 행태에 까닭모를 동정심이 일었다.
그러나 진천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마중협(魔中俠)은 있지만 독중선(毒中善)은 없다는 것이 강호의 정설이었다. 무림사에 자취를 남겼던 독인들치고 악인이 아니었던 자는 전무했다. 일천 년 전 무림이라는 신세계를 탄생시킨 장본인이자 무인의 비조나 마찬가지였지만 독인은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 하는 족속이었다.
백야행이 그의 명으로 빚어진 난장판을 중단시켰다.
“물러나라, 한심한 것들. 어찌 하는지 보려고 했더니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구나. 이러니 다른 삼마류가 우리를 두고 석두니 뭐니 하며 조롱하는 게 아니더냐. 네놈들과 한 묶음으로 엮인 나는 무슨 죄냐? 일장에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 같으니.”
독인들은 억울했지만 감히 반발하지는 못했다.
수하들을 물린 백야행이 우수를 앞으로 뻗었다. 그의 장심에서 녹색과 청색이 섞인 독무가 분출되었다. 진천이 올라간 쇠기둥이 독무에 감기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백야행이 현시한 무시무시한 독장의 위력에 독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백야행이 으스댔다.
“가소로운 놈들아. 내 힘의 반도 쓰지 않았는데 난리냐. 다들 눈을 똑바로 뜨고 저놈이 어디로 떨어지는지 지켜봐라. 절대로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구멍이 생기면 거기에 있는 놈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위에서 듣고 있던 진천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독장을 쏘기 전에 내렸어야 할 지시가 아닌가.
쇠기둥이 기우뚱거리자 진천은 옆의 철주로 건너뛰었다. 그러자 백야행의 독무도 그리로 옮아왔다. 그런 일이 반복됨에 따라 쇠기둥들이 하나 둘 무너졌다. 이윽고 마지막 철주만이 남았을 때 장내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기둥이 넘어지는 방향으로 몰려간 독인들이 원형의 포위망을 형성했다. 진천은 그 한 가운데로 떨어져 내렸다.
진천이 독장을 구사하는 독인들에게 쫓겨 쇠기둥으로 올라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기실 그는 용천을 첫 번째 목표물로 선정했을 때부터 그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진천은 독인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싶었다. 난전이 벌어져 각개격파를 하다간 상당수의 사냥감들을 놓칠 우려가 다분했다. 세 불리를 느낀 독인들이 달아나 버릴 터이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세평회의 인사들 중 가린만 데리고 올 작정이었던지라 독인들을 일망타진하려면 한 군데로 몰아넣거나 그들이 자발적으로 특정한 지점에 모이도록 만들어야 했다.
오재승의 정보력을 빌어 구륜회의 내부도(內部圖)를 조사한 진천은 자령전(慈令殿) 광장의 앙천구주를 보자마자 무릎을 쳤다. 독인들을 유인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초반에 대놓고 소동을 일으킨 후 진천은 독장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치는 척했다. 다행히 고루독군이라는 강자가 일찌감치 나타나 준 바람에 위장된 약세임을 들키지 않고 독인들을 광장으로 끌어 모을 수 있었다. 객관적인 이름값에서 그의 위명은 아직 고루마군을 능가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수적으로 절대 우위에 있었기에 독인들은 그가 일부러 약세를 보였으리라고는 털끝만큼도 의심치 않았다. 철주를 오른 것도 궁여지책이라 여겼을 게 틀림없었다.
아슬아슬해 보였지만 고루마군의 공격에 몰리다 자연스럽게 쇠기둥으로 피신한 진천은 잠시 긴장하기도 했다. 그의 정체를 알아내 고루독군에게 보고한 자가 그의 의도를 간파했음을 직감해서였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아무리 급했기로서니 막다른 골목이나 다름없는 철주를 도피처로 삼았다는 것은 미친 짓이 아닌가.
진천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고루독군이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는 자의 입에 자물쇠를 채운 덕분에 계획한 대로 일이 풀렸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수하들에게 무력을 과시할 요량으로 고루독군은 연달아 아홉 번이나 상당한 공력이 소모되는 독장을 날렸다. 최대한 빨리 그를 해치워야 할 진천의 입장에서는 고마운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 쇠기둥이 넘어가려는 찰나 진천은 내공을 담아 고함을 질렀다.
“가린!”
독인들이 펼친 원진(圓陣)의 중앙으로 하강하며 진천은 고루독군을 겨냥해 절멸비를 쏘았다.
그의 좌수에서 발출된 하얀 빛살이 고루독군에게 날아갔다. 진천의 수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루독군이 여유롭게 측보를 밟으며 흘려내려 했다.
그러나 비수는 하나가 아니었다. 고루독군의 일 장 전면에서 둘로 갈린 비수는 눈이라도 달린 듯 좌로 삼보를 옮긴 그를 쫓아갔다.
고루독군은 다급히 독장으로 쳐냈다. 하지만 그의 장공에 막혀 튕겨나가기는커녕 비수들이 돌연 더욱 빨라지며 그의 동체로 빨려 들어갔다. 대경실색한 고루독군이 마구잡이로 팔을 휘둘렀다. 그 순간 두 개였던 비수가 네 개로 불어났다.
목으로 날아온 비수는 가까스로 빗겨냈지만 고루독군은 다른 세 개는 피해내지 못했다. 비수들은 그의 호신강기를 뚫고 왼 옆구리와 양쪽 허벅지에 꽂혔다. 볼썽사납게 바닥을 뒹굴며 고루독군이 악을 썼다.
“죽여! 죽여!”
독인들은 백야행의 명을 이행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에게 절멸비를 날린 직후 절멸삭을 뽑아든 진천이 착지하기도 전에 채찍처럼 휘두르자 장내는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진천의 왼손에서 흘러나온 백색의 밧줄에 걸린 독인들은 속절없이 다리를 잘리고 쓰러져야 했다. 그들의 절단부위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사방이 흥건해졌다.
진천에게로 조여들던 독인들은 동료들의 참극을 보고는 너도나도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아직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충격에 빠져있는 틈을 타 진천은 가일수를 했다. 양 떼에 뛰어든 늑대처럼 독인들 사이를 가르고 들어간 진천은 다시 절멸삭을 휘둘렀다. 고통과 공포의 비명이 난무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독인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쪽은 결사항전 파였고 다른 한쪽은 현실순응 파였다. 전자는 진천에게 달려들었고 후자는 그로부터 달아났다. 행태는 정반대였지만 그들의 운명은 대동소이했다.
진천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할 심산이었다.
관건은 고루독군을 조기에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독장은 그로서도 위험천만의 무기였다. 독무는 견딜 수 있을지라도 장공을 직격당하면 여지없이 몸이 녹아내릴 터였다. 곧 가세할 가린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최단시간에 고루독군을 운신불능으로 만들어야 했다.
진천이 선택한 수는 절멸비였다. 절멸비는 단순히 숫자만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 외조부와의 극한 비무수련을 통해 진천의 절멸도법은 새로운 경지에 발을 들여놓은 상태였다. 진천은 절멸비의 속도와 방향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었다.
강자들을 상대로 쌓았던 실전경험도 큰 몫을 했다. 고루독군은 목을 겨냥하고 날아온 절멸비에 집중하는 바람에 진천의 실질적인 노림수였던 하체를 돌보지 못했다.
승부수가 적중해 강적을 단박에 묶어버린 진천은 마음 놓고 사냥에 나섰다. 간혹 위협적인 독장을 발하며 맞서는 독인들이 있었으나 그의 팔영보를 잡지는 못했다. 진천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독인들의 다리를 베어나갔다. 불과 세 호흡 만에 그의 절멸삭에 쓰러진 자들의 수는 오륙십에 달했다.
일찌감치 달아난 독인들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진천의 신호를 받고 한달음에 광장으로 달려온 가린에게 붙들렸기 때문이었다. 너른 황야를 질주하는 야생마처럼 가린은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광장을 휘돌며 독인들을 닥치는 대로 쓸어버렸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 듯 몇 몇 독인이 독장을 퍼부으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가린의 갑피를 녹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가린과 더불어 순식간에 용천의 독인들을 제압한 진천은 꼼꼼하게 뒤처리를 했다. 고루독군을 필두로 모든 독인들의 독정을 파괴한 것이었다. 차라리 죽이라는 아우성이 여름날 매미소리처럼 광장을 시끄럽게 울렸다.
진천은 그들의 호소, 혹은 원성을 묵살했다. 손과 이는 멀쩡하니 독인들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었다. 자진은 그들 자신의 몫이었다.
악다구니를 쓰는 독인들을 광장에 내버려둔 채 진천은 구륜회를 빠져나갔다. 아직도 해가 뜨기 전이었다. 향후 천하를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릴 용천 기사는 진천이 구륜회에 모습을 드러낸 지 반의반 시진도 안 되어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