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45
제144화
진천은 진시(辰時) 말에 삼보장으로 돌아왔다.
세평회의 친우들이 모두 정문 마당에 나와 승전보를 가지고 돌아온 그를 반겼다. 하지만 진천에게 그들과 대화를 나눌 여유를 주지 않고 권왕이 암기(暗氣)를 쏘아 그를 죽림으로 불렀다.
진천이 대나무 숲을 헤치고 나아가자 좁은 공터의 바위에 올라서있던 권왕이 대뜸 역정을 냈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
진천은 절로 쓴웃음이 났다. 그저께 밤에 삼보장을 나섰으니 귀환까지 이틀도 걸리지 않은 셈이었다. 용천까지는 천리 길이니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을 볶는 속도로 해치운 격이었다. 그럼에도 진천은 순순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큰 형님.”
권왕이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사과가 너무 잦으면 진정성이 의심스러운 법이다. 사내는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 안 돼.”
그 점에서는 권왕과 의견이 달랐지만 진천은 반박을 삼갔다.
“어쨌거나 이제 바로 출발하자. 소 형이 코가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게다.”
진천이 보채는 권왕을 내려다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권왕의 일자 눈이 일그러졌다.
“왜? 설마 부상이라도 당한 게냐? 그러면 어서 환생결을…….”
진천이 급히 부인했다.
“아닙니다, 큰 형님. 다친 데는 없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똥 씹은 낯짝을 하고 있는 게냐? 사지가 멀쩡하다면 어서 가자.”
진천은 에둘러가지 않고 결론으로 직행했다.
“죄송하지만 검왕 어르신께는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큰 형님. 그리고 출발은 오늘 저녁에야 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 어쩌면 하루 정도 더 지연될 수도 있습니다.”
진천의 소매를 잡아끌던 권왕이 손을 놓았다.
“무슨 소리냐?”
권왕의 목소리에 깃든 노여움을 감지했지만 진천은 침착하게 설명했다.
“이번 용천 건으로 마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것입니다.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제 생각으로는 십중팔구 제가 뿌렸던 떡밥을 물고 송화나 평산으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허탕을 친 것으로도 모자라 허를 찔렸으니 심기가 들끓고 있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표출할 경우에 대비해야 합니다.”
권왕이 짧고 굵은 백미를 꿈틀거렸다.
“나더러 여기 남아서 네 뒤치다꺼리를 하라는 말이구나. 괘씸한 녀석 같으니. 하지만 마왕이 쳐들어온다면 나로서도 역부족이 아니더냐? 그에겐 막가가 딸려 있잖으냐? 까짓것 못할 것도 없지만 내가 그 작자 둘을 상대하는 동안 세평회 아이들은 누가 돌보느냐? 화염장인지 염병인지 하는 놈 하나에도 쩔쩔매는 약골들인데.”
“마왕은 쳐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당분간은.”
“뭐라? 어째서? 분기탱천하고 있을 거라며?”
“그가 삼보장을 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조건이라니?”
“우선은 장왕의 협조입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마왕은 단독으로 삼보장을 찾지는 않을 것입니다. 수하들을 잔뜩 거느리고 오더라도 결국은 큰 형님과 승부를 보아야 할 테니까요. 그로서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승리를 장담하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이긴다고 해도 중상을 각오해야…….”
권왕이 진천의 말을 잘랐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만 하나마나한 소리가 아니더냐? 막가와 함께 올 게 뻔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큰 형님. 이번에 미끼를 던지며 저는 장왕의 동태를 살피는데 집중했습니다. 그가 송화나 세평으로 출동했다면 전혀 다른 대책을 강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왕은 제 예상대로 열락궁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았습니다. 지난달 이곳에서 입었던 내외상이 완쾌되었을 텐데도 세평회를 잡을 절호의 기회를 뿌리친 건 큰 형님을 의식해서입니다. 혹시라도 큰 형님이 삼보장을 나간 그림자에 포함되어 있을까 봐 두려웠을 테지요. 장왕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몸을 사릴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흠, 그러면 내가 여기 있다고 소문을 내야겠구나. 마왕이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그렇습니다, 큰 형님. 실은 조금 전에 북운상단에 들러 오 단주에게 그 부분에 관해 부탁하고 온 참입니다. 늦어도 내일까지는 온 대륙에 큰 형님께서 삼보장에 머물고 계신다는 소식이…….”
“어허, 이제 보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구나. 나를 갖고 놀다니, 요 녀석.”
“죄송합니다.”
“그런 소리 말래도. 듣기 좋은 꽃노래도 자주 들으면 싫증이 난다지 않더냐? 적당히 해라.”
“네, 큰 형님.”
“막가는 그렇다 치고 다른 조건은 무어냐?”
“정맹과의 협의입니다. 공교롭게도 삼보장이 든 주안은 정맹이 장악한 지역의 한 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일종의 섬과 같지요. 마왕이 엷은 띠만 남은 중립지대를 넘어 주안으로 오려면 반드시 정맹의 영역을 지나야 합니다. 이는 사소한 사안이 아닙니다. 장왕의 도움 없이 세평회에 대한 보복을 결행하기로 작심했어도 마왕이 홀로 행동할 리는 만무합니다. 필히 최소 열 명 이상의 수하들을 대동하겠지요. 그렇다면 정맹과의 사전조율은 필수입니다.”
“정맹이 통과를 허용할 것 같으냐?”
“마왕이 요청한다는 전제 하에, 그렇습니다. 정맹으로서는 마왕의 행사를 가로막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마왕은 다른 방식으로 압박을 가할 것입니다. 주안을 먹어치우지 않고 방치한 정맹에 항의를 하며 그들로 하여금 세평회를 처리하도록 요구하겠지요.”
“정맹이 들어줄 턱이……. 그 쓴웃음은 뭐냐? 설마 그들이 마왕의 수작에 휘둘릴 거라는 뜻은 아니겠지?”
“정맹은 난처해 할 것입니다, 큰 형님. 중립지대의 지분 나누기에 여념이 없을 지금 시기의 분란은 바라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저와 세평회에게…….”
“가당찮은 소리. 무도한 마인들과 싸울 생각은 않고 도리어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엄한 너를 핍박하려 든다면 내가 참지 않을 것이다. 마련에 앞서 정파의 위선자들부터 쓸어버릴 테다.”
농담만은 아님을 알기에 진천은 진지하게 받았다.
“아무리 그들의 행태가 못마땅할지라도 정맹과는 척을 져서는 안 됩니다, 큰 형님. 마도를 지우고 사파를 타파하는 날까지는 싫든 좋든 한 배를 타야 합니다. 강 건너에 이르러 배를 내린 다음에는 그들과도 이런저런 일을 따져봐야겠지요.”
“이렇게 속이 터져서야, 원.”
분기를 가라앉힌 권왕이 물었다.
“구체적으로 정맹이 어떻게 나올 것 같으냐, 아우야?”
“글쎄요.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두고 봐야 알겠습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이 녀석. 뚜껑을 열어보나마나 네 머릿속에 이미 들어있다는 걸 모를 줄 알고. 괜히 되도 않는 겸양 떨지 말고 이실직고 하렸다.”
쓰게 웃은 진천이 짐작하는 바를 털어놓았다.
“그들은 저를 일신으로 부를 것입니다. 지난번에 못다 한 판결을 마무리 짓는다는 빌미로 말입니다. 그러고는 처벌을 유예하는 대신 자중을 강요할 듯합니다.”
마치 진천의 예상이 기정사실인 양 권왕이 불평을 토해냈다.
“한심한 인간들 같으니. 반평생을 그런 졸렬한 족속과 부대끼며 지내느라 내 속이 다 문드러졌다. 나는 솔직히 마도나 사파의 종자들보다 그치들이 더 밉다.”
정파에 대한 권왕의 반감을 잘 아는지라 진천은 그를 달래려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아까 오늘 저녁이나 내일에야 출발할 수 있다는 게 정맹의 처사를 기다려야하기 때문이었더냐, 아우야?”
“그렇습니다, 큰 형님. 이르면 오늘 중으로, 늦어도 내일 오전까지는 통보가 올 것 같습니다. 그들로서도 가급적 신속하게 처리하려 들 테니까요. 소환 날짜를 확인한 연후 검왕 어르신께 갔으면 합니다.”
“한 가지 물어보자꾸나. 이 모든 상황을 언제부터 예측했더냐?”
“일이 닥치면 그때그때 조금씩 고민했을 뿐입니다.”
“누굴 속이려고, 이 녀석. 분명 오래 전부터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테지? 그렇지 않으냐?”
“저는 그저 여러 갈래의 가능성들을 염두에 두고…….”
“어허, 그래도 이 녀석이! 빙빙 돌리지 말고 딱 부러지게 말하라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느냐, 몰랐느냐?”
어떻게 대답해도 책을 잡힐 터이기에 진천은 침묵했다. 짐짓 그를 노려보던 권왕이 안구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만약 정맹이 너더러 당장 오라고 하면 어쩔 테냐? 그러면 소 형은 뒷전으로 밀리는 게 아니냐?”
진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검왕 어르신을 이리로 모셔오는 것은 현재로선 가장 중차대한 일입니다. 정맹이 정한 시한이 촉박하더라도 월교로 먼저 떠날 참입니다.”
권왕의 만면에 흡족한 미소가 퍼졌다.
“그래야지. 가서 소 형이 키운다는 후인을 눌러 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려무나, 아우야.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네가 그 아이에게 지기라도 하면 너를 두고 천년기재니 뭐니 하며 오만 큰 소리를 다 쳐 놓은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테니 무조건 이겨야 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큰 형님.”
늙고 젊은 의형제는 미소를 교환했다. 둘 모두 패배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기엔 진천이 근자에 이룬 무위의 상승이 너무나 컸다.
정맹의 특사는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 삼보장에 들었다.
집법단주 성대진 명의의 첩지를 갖고 온 마령 문가의 중견강호 문상훈(文常勳)은 평소 그를 접하는 절대다수의 사람이 그에게 대하는 태도를 세평회 인사들에게 보였다. 그가 너무 저자세를 취하는 바람에 보는 이들이 민망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천하의 권왕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데다 용천의 거사로 다시 한 번 대륙을 흔드는 위명을 과시한 진천을 대하려니 어렵기도 할 터였다. 팽하연은 친분이 있는 문상훈이 진천에게 첩지를 건네며 손을 떠는 모습에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문상훈이 대접도 마다하고 달아나듯 떠난 직후 진천도 삼보장을 나섰다. 정맹은 고작 닷새의 말미만 주었다. 서둘러야 했다. 닷새는 충분한 시간이 아니었다. 월교를 경유해야 하니 몹시 빡빡한 일정이 될 터였다.
주안을 벗어나자마자 마침 해가 떨어져 진천은 전속력으로 경신을 전개했다. 월교가 자리 잡은 장구(長邱)는 직선거리로만 사천 리가 넘었다. 정맹과 사벌의 영토에 끼어있는 중립지대로 이동해야 하니 실제로는 육천여 리를 가야 할 터였다. 더욱이 세인의 관심을 끌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하지만 진천은 이틀 안에 장구에 당도하리라 자신했다. 배가된 그의 내공이 속도의 향상에 더해 무한체력을 선사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북운상단을 나오며 오재승에게 받아둔 지도들을 낮 동안 숙지했기에 길을 잃고 헤맬 염려도 적었다.
봉천을 지나 중립지대에 들어선 진천은 양자호까지 일천팔백 리 길을 다섯 시진 남짓 만에 주파했다. 소기의 목표를 초과달성했거니와 한계를 느낀 진천은 인적 없는 새벽의 호숫가에서 얼마간 휴식을 취했다.
바다 같은 호수를 바라보고 있자니 진천은 전날 대웅이 정자에서 불한당들을 을렀던 일이 떠올랐다. 기억은 자연스럽게 그와 처음 만났던 포성으로 흘러갔다.
진천은 문득 포성에 들러볼까 생각했다. 사벌의 치하에 든 이후 그 도시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했다. 여덟 달 전의 활기차고 풍요로웠던 분위기는 기대하기 어려울 터였다. 무림대회를 구경하러 온 인파들로 넘실거리던 저자는 사파의 무인들 외에는 아무도 나다니지 않는 삭막한 거리로 바뀌었을 것이었다.
어둠에 잠긴 호수를 보며 갈등하던 진천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월교에 가는 데만 집중해야 할 때였다. 포성을 거치면 불필요한 시간을 소요하게 될뿐더러 괜한 시비에 말려들 우려도 있었다.
포성이 있는 남쪽을 일별한 진천은 동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공을 재개했다. 해가 뜨기 전에 최대한 멀리 가 둘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