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46
제145화
해가 피를 토한 듯 서녘 하늘이 시뻘게졌다.
진천은 야트막한 둔덕에 올라 붉은 노을 아래 펼쳐진 황량한 평야를 내려다보았다. 지명이 정해지지 않은 저 자그마한 들판 끄트머리에 검왕의 모옥이 있을 터였다.
이곳은 지도상으로는 월교가 위치한 장구에 속해 있었지만 일종의 금역(禁域)이나 마찬가지였다. 권왕에 따르면 월교의 인사들은 검왕의 보금자리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검왕이 따로 명을 내려서가 아니라 번잡함을 싫어하는 그의 성정을 배려해 최소한의 인원만 들락거리다 그마저도 시나브로 줄어들어 결국은 반년에 한 번씩 벽곡단을 가져다주는 심부름꾼 외엔 아무도 출입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평야로 내려가려던 진천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까마득히 장구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월교가 터를 잡은 도시의 풍광은 범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기실 도시라고 부르기에도 어폐가 있었다. 삼층을 넘는 건물이 전무한 데다 인구도 일이 만에 불과해서였다.
천하사패의 일익인 월교의 터전이 소박하다 못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연유는 통치자인 검후(劍后) 송하령(宋霞玲)의 금욕적 성향 탓이었다. 월교의 제십육대(第十六代) 교주로 등극하자마자 검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황금대궐을 없앤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혔던 황금대궐은 단층 와옥들이 들어선 마을로 대체되었다.
월교의 원로들은 검후의 결정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황금대궐의 해체는 상징적인 조치일 뿐 실질적인 내용은 그들의 기득권 박탈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검후는 자신의 명에 반기를 든 원로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녀의 검에 의해 육십여 개의 목이 날아간 후 월교엔 분파들이 사라지고 오직 한 명의 절대자만이 남았다.
검후 이전의 월교는 일인자를 인정하지 않는 집단지도체제였다.
팔십팔 년 동안 열다섯 명의 교주가 나왔지만 십 년의 임기를 넘긴 이는 초대교주인 칠성검군(七星劍君) 이충(李忠) 뿐이었다. 그 이후의 교주들은 짧으면 삼사 년, 길어야 칠팔 년 만에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자의로 교주 위를 떠난 이는 둘 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전부 반역에 의해 쫓겨난 것이었다. 암살을 당한 경우도 다섯 번에 달했다.
백 년 가까이 자중지란을 벌였음에도 월교가 무너지지 않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내부의 권력투쟁에도 불구하고 외침에 대해서는 총력단결로 맞서왔던 월교 특유의 전통이 그 첫 번째였다.
이는 정사마(正邪魔) 무림 패잔병들의 결속체로서 창립되었던 월교의 성격에서 비롯되었다. 월교를 세운 무인들은 주도권을 쥐기 위해 서로 간에 피 터지게 싸우면서도 공동의 적에 대해서는 똘똘 뭉쳐 맞섰다. 그들은 외부의 적 앞에서의 분열이 멸망과 동의어임을 알고 있었다.
월교엔 운도 따랐다. 무림의 터줏대감들은 장구라는 오지에 똬리를 튼 기괴한 신흥방파가 얼마 가지 않아 자멸하리라 낙관했다. 워낙 이질적인 무리가 섞인 잡탕이었기 때문이었다. 무림이 태동한 이래 그런 식으로 형성된 집단이 오래 존속한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기껏해야 이삼십 년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초대교주였던 이충이 독살을 당해 급 사한 후에도 월교는 내부암투로 곧 붕괴되리라는 세간의 예상을 비웃듯 여봐란 듯이 성세를 과시했다. 붕괴되기는커녕 그들의 덩치가 점점 커지자 오대세가와 사파칠문은 긴장했다. 하지만 당시엔 느슨한 협의체만 있었기에 월교를 지우거나 최소한 견제해야 한다는 결론에도 불구하고 실행에는 미온적이었다.
그러다 세력권을 확장하던 월교가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지역까지 진출하자 정파의 사평 팽가와 사파칠문의 쾌부문(快斧門)이 개별적으로 응징에 나섰다. 월교는 정사의 강대문파들을 맞아 사력을 다해 항전했다. 놀랍게도 그 결과는 월교의 승리였다. 팽가의 절정검사들과 쾌부문의 맹호들을 격퇴한 월교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뒤늦게 위기감을 느낀 정사 무림은 대책마련에 골몰했다. 월교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으나 구체적으로 누가 나설지를 두고는 다들 타파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발을 뺀 탓에 논의가 흐지부지되었다.
국지적인 충돌이 빈번히 발생했으나 오대세가와 사파칠문은 월교와의 전면전을 망설였다. 제대로 붙으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터이기도 했지만 내버려 두면 월교가 분파들 간의 알력으로 결국은 스스로 찢어지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적 혼란으로 늘 위태로우면서도 월교는 끝내 깨지지 않고 위세를 유지했다. 그러다 검후라는 절대지경의 무존이 등장하면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세력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어느덧 천공을 붉게 물들였던 황혼이 물러가고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진천은 잡초만 무성할 뿐 수목은 한 그루도 보이지 않는 들판을 걸어서 가로질렀다. 수천 리를 쉬지 않고 달려오느라 지칠 대로 지친 육신이 서서히 회복되었다.
진천은 평야의 가장자리에 난 골짜기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름한 모옥이 보였다. 띠로 지붕을 덮고 흙으로 벽을 삼은 집으로 다가간 진천은 밖에서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남 무림의 진천이 검왕 어르신을 찾아뵈었습니다.”
바로 응답이 나왔다.
“들어오너라.”
진천은 아귀가 맞지 않아 너덜거리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 평 남짓한 좁은 방 뒤편에 백염백발의 노인이 좌정해 있었다. 그의 앞에 엎드린 진천이 다시 인사를 올렸다.
“진천이 검왕 어르신을 뵙습니다.”
“앉아라.”
진천은 검왕의 명에 따랐다.
검왕과 마주앉은 진천은 시선을 내리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호롱불도 밝혀두지 않아 어두웠지만 교교한 달빛이 스며들어 검왕의 얼굴을 알아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가히 선풍도골의 용모였다. 젊은 날 천하제일기남자로 불렸던 이의 면모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진천은 특히 검왕의 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욕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맑은 눈동자였다.
진천의 내기를 살피는지 검왕은 말이 없었다. 진천은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검왕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기품에 걸맞은 깊고 그윽한 음성이었다.
“네 무재가 대단하다고 들었다.”
진천은 겸양의 수준을 두고 갈등했다. 그러나 그가 반응을 결정하기도 전에 검왕이 말을 이었다.
“명민함 또한 하늘에 미친다지?”
진천은 반사적으로 답변했다.
“아닙니다. 아둔함을 간신히 면한 정도입니다.”
“진광은 수선스럽긴 하나 허언을 뱉을 사람이 아니다.”
“…….”
“무재는 곧 알게 될 터. 문일지십의 천재에 예견력도 출중하다던데 하나만 물어보자꾸나.”
“하문하십시오.”
진천을 응시하며 잠시 뜸을 들이던 검왕이 입을 열었다.
“무황이 살아있을 것 같으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진천이 처진 눈을 올렸다.
검왕은 즉답을 재촉하지 않고 진천에게 시간을 주었다. 장고한다고 정답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진천은 제일감(第一感)을 그대로 밝혔다.
“모르겠습니다.”
진천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검왕이 허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권왕처럼 집요하게 추궁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가자. 그 아이에게 데려다 주마.”
진천은 허탈했다. 이게 끝이란 말인가.
진천이 급히 토해낸 말이 일어서려는 검왕을 잡았다.
“허락하신다면 저도 한 가지 여쭙고자 합니다, 어르신.”
검왕이 다시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다.
“외람되오나 제 큰 형님과 하셨던 약속에 관해 확인하고 싶습니다. 제가 어르신의 제자를 이기면 주안 삼보장으로 가 주실는지요?”
“…….”
부담스러운 침묵이 이어졌다. 진천은 검왕의 답을 촉구하지 않고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이윽고 검왕의 입이 떨어졌다.
“그 아이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내 검공의 일부를 전했을 뿐.”
진천은 난감했다. 동문서답이어서가 아니라 검왕이 거절의 빌미를 내건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속단하기엔 일렀다.
“하지만 네가 그 아이를 꺾는다면 진광의 청에 응할 것이다.”
진천의 안색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검왕의 유현한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자신만만하구나.”
뒷말이 남아있는 기색이었으나 검왕은 말을 잇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오거라.”
검왕은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
일다경 쯤 지나 걸음을 멈춘 검왕이 좌측의 절벽을 향해 말했다.
“그가 왔다.”
절벽에는 암굴이 있었다. 진천은 진즉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숨소리를 감지하고 있었다. 안정되지 않고 흥분기가 묻어나오는 호흡이었다.
불규칙적인 발자국소리가 들리더니 자그마한 그림자가 동굴을 빠져나왔다. 진천은 눈을 멀뚱거렸다.
인영은 여자였다. 아니, 소녀였다. 이제 열두 살이나 되었을까. 사 척이 될까 말까했고 가녀린 체구였다.
진천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소녀는 어릴뿐더러 맹인이었다. 눈이 있어야 할 곳에 텅 빈 암흑이 고여 있었다.
“이으으 으아 아우우 어어.”
소녀의 얄따란 입술에서 새가 지저귀는 듯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진천의 당혹감이 커졌다. 장님으로도 모자라 벙어리였단 말인가.
“여기는 장소가 협소하니 자리를 옮기자.”
검왕이 불문곡직 경공을 발할 태세이자 진천이 황급히 만류했다.
“잠깐만요, 어르신.”
소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진천이 말을 이었다.
“저 소녀가 제 상대인지요?”
“그렇다.”
진천은 어이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그녀는 저와 겨루기엔 너무 어립니다.”
소녀가 별안간 기성을 토해내었다.
“아으 어이이 아아!”
그녀를 힐끗 쳐다본 검왕이 진천에게 말했다.
“너는 아직 약관이 되지 않았다지? 그렇다면 저 아이의 나이를 문제 삼을 것 없다. 너보다 연상일 테니.”
“…….”
“겉만 보고 경시하지 마라. 진광이 전한 무위라면 너는 저 아이의 적수로는 부족하다. 무사하기를 바란다면 지금 포기하는 게 나을 게다.”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형언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검왕이 그를 상대로 실없는 농담을 할 리 만무했다. 소녀, 아니 소녀처럼 보이는 여인은 곽건이나 소중걸 이상의 강자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녀와 승부를 하겠습니다.”
여인을 일별한 진천이 뜻을 밝히자 검왕이 지체 없이 신형을 날렸다. 그를 뒤쫓는 여인의 신법을 본 진천은 침을 삼켰다. 그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 속도였다.
일노이소(一老二少)는 평야로 나왔다.
진천은 검왕의 손짓에 따라 여인에게서 오륙 장 떨어진 곳에 섰다. 검왕이 바로 비무 개시를 선언할 기색이자 진천이 급히 말했다.
“그녀의 검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답은 여인의 입에서 나왔다.
“아으 어이 이오어어.”
알아듣지 못하는 진천을 위해 검왕이 설명했다.
“내 검공을 익혔으나 이 아이는 검을 쓰지 않는다.”
진천은 여인의 작은 손을 주시했다. 수강(手剛)을 뻗어내 검처럼 부린단 말인가.
“진광에게서 네가 석년의 무황을 능가하는 기재라고 들었다. 그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는지 볼 것이다.”
“부족함이 많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검왕에게 예를 차린 진천은 눈이 보이지 않는 소녀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한 수 배우겠소.”
소녀의 응답은 길었다.
“아으 우이이 이어. 어으 우이어아. 으애어 에아 오으 아아으으 아 우이어아.”
진천은 까닭 모를 오한이 일었다.
멀찌감치 물러선 검왕이 나직이 말했다.
“시작하라!”
그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여인이 날카로운 괴성을 내지르며 진천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