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47
제146화
진천은 기시감이 들었다.
여인이 쇄도해 오는 광경은 분명 언젠가 보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찬찬히 되짚을 겨를이 없었다. 한 번의 도약으로 삼십여 보의 거리를 지우고 그에게 육박한 여인이 그의 심장을 겨냥해 우수를 찔러왔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의아했다. 여인의 오른손에선 검강(劍剛)은 고사하고 검기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진천은 그녀의 일수를 가벼이 여기지 않고 팔영보 상의 이형(移形)으로 빗겨냈다. 아이처럼 앙증맞은 여인의 손은 진천이 남긴 잔상을 갈랐다.
진천은 반격을 가하지 않고 훌쩍 물러났다. 여인이 지체 없이 그를 따라잡았다. 진천은 공격을 삼가고 연신 후퇴했다. 여인은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고 있었다. 맨몸이나 다름없는 그녀에게 절멸도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진천은 혼란스러웠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여인의 움직임은 그로서도 긴장해야 할 정도로 빨랐으나 도저히 검왕의 상승무학을 펼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려웠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원시적인 동작들이었다. 마치 맹수가 타고난 본능으로 사냥감을 덮치는 듯한 몸놀림이었다.
진천은 퍼뜩 기시감의 연원을 때달았다. 방금 전 그에게 달려들던 여인의 모습은 아타족의 숲에서 조우한 가린과 붙었을 때 그가 선보였던 돌진과 흡사했다. 체구는 가린이 월등히 컸으나 속도와 위압감은 여인 쪽이 윗길이었다.
설마!
진천은 뇌리에 떠오른 한 가지 가능성에 전율했다.
입술을 깨문 진천은 결단을 내렸다.
방금 떠올린 가설을 확인하려면 절멸도를 뽑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좌수에서 고드름이 솟아나자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위험성을 감지했는지 마구잡이로 팔을 휘두르던 여인이 주춤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공격을 재개했다.
이전과 달리 보법으로 피하지 않고 진천은 절멸삭으로 맞불을 놓았다. 현란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절멸삭이 여인의 동체를 휘감았다. 여인은 경이로운 기예(技藝)를 선보이며 하얀 밧줄을 벗어났다. 하지만 절멸삭의 끝이 그녀의 허리에 걸렸다. 순간 여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악!”
예상을 했음에도 진천은 놀랐다.
십이 성의 공력을 주입하진 않았지만 방금 그가 부린 절멸삭은 초절정고수의 호신강기라도 가볍게 깨뜨릴 위력을 담고 있었다. 도검불침을 자랑하는 가린의 갑피도 여지없이 잘릴 터였다.
그러나 여인의 옆구리는 멀쩡했다. 홑옷이 찢어져 드러난 맨살엔 빨간 생채기만 났을 뿐이었다.
고통스러운지 앳된 얼굴을 험악하게 구긴 여인이 진천을 향해 맹렬하게 짓쳐들었다. 진천은 극상의 팔영보를 전개해야 했다. 여인이 분출하는 투기는 살기로 변해있었고 움직임 역시 한층 사나워졌다. 그녀의 손에 걸리는 날엔 뼈도 추리지 못할 터였다. 짐작이 맞는다면 여인은 진정한 ‘괴물’일 터였다.
진천이 충돌을 자제하고 회피에 주력했기에 쫓고 쫓기는 싸움이 이어졌다.
묵묵히 관전하던 검왕이 진천에게 주의사항을 상기시켰다.
“그 아이를 이겨야 진광의 청을 들어줄 것이다.”
검왕은 이어서 여인에게 조언을 주었다.
“배운 바를 활용하지 않으면 그를 꺾을 수 없다.”
여인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러더니 상체를 비스듬히 튼 채 오른팔을 쭉 뻗었다. 그녀의 달라진 태도와 자세에 진천은 긴장했다.
일순 여인의 몸이 진천을 향해 빛살의 속도로 날아왔다. 내밀고 있던 우수가 진천의 복부를 찔렀다. 비환으로 흘려내던 진천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녀의 팔이 길어지며 손끝이 그의 허벅지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도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갈리는 극통이 올라왔다.
진천은 모골이 송연했다. 착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의 절멸도 같은 특수한 형태의 수강(手剛)도 아니었다. 여인의 팔은 문자 그대로 엿가락처럼 늘어난 것이었다. 만약 비환이 아니라 이형을 발했더라면, 그래서 여인의 수도가 조금만 더 깊이 파고들었더라면 다리가 속절없이 절단되었을 것이었다.
“으으으.”
회심의 일격이 실패로 돌아가 실망했는지 여인의 입술에서 신음성 같은 소리가 삐져나왔다. 진천은 다시 절멸도를 뽑아들었다. 강력한 경고신호가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다. 여인은 일종의 각성 상태였다. 조금 전 그녀가 현시한 한 수는 검왕의 무학과 그녀의 신체능력이 결합된 것이었다. 그런 절초와 신기를 지속적으로 구사한다면 그가 전력을 발한다고 해도 우세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진천의 좌수에 돋아난 백색의 칼에 대응해 여인은 더욱 흉포한 기운을 분출했다.
그러나 그녀는 초반처럼 맹목적으로 달려들지 않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진천은 개전 이후 처음으로 선공에 나섰다. 화연을 펼쳐 여인의 기감을 현혹시킨 진천은 그녀에게 바짝 붙어 절멸도를 여인의 우견에 찔러 넣었다. 여인은 피하기는커녕 자신의 어깨를 내미는 방식으로 응수했다. 그러면서 왼발로 진천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여인의 극단적인 방어법과 기본적인 반격수법에 진천은 당황했다. 결과도 썩 좋지 않았다. 그의 절멸참은 여인의 어깨를 쑤시고 들어갔으나 그 탓에 잡혀버렸다. 진천은 얼른 절멸도를 버리고 물러서야 했다. 아슬아슬하게 여인의 수도가 그의 목이 있던 공간을 자르고 지나갔다.
여인의 발은 진천의 무릎을 부러뜨리지는 못했으나 그의 균형을 흐트러뜨렸다. 그 탓에 진천은 충분히 거리를 벌리지 못하고 여인의 접근을 허용했다.
진천에게 붙은 여인이 목을 치듯 오른손을 그었다. 진천은 절멸도로 막아냈다.
캉!
쇳덩이가 부딪치는 기음과 함께 여인의 괴력에 짓눌린 진천의 몸이 땅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진천의 절멸도에 찍힌 여인의 팔뚝에선 선혈이 솟구쳤다. 부상에 아랑곳없이 여인이 신속하게 진천을 따라붙었다. 너무나 엄청난 속도였기에 그녀를 뿌리치지 못한 진천은 눈앞이 하얘졌다.
여인의 우수가 도끼처럼 진천의 두부를 찍으려는 찰나 그의 손에서 섬광이 번득였다.
“잇!”
여인이 기괴한 비명을 내질렀다. 진천이 날린 네 자루의 절멸비는 그녀의 사지에 골고루 꽂혔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 그가 발한 구명절초는 무위로 돌아갔다.
팔다리가 너덜너덜해졌음에도 여인은 운신불능이 되지 않았다. 송곳 같은 그녀의 검지가 진천의 왼 가슴을 찌르고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진천의 좌수에서 돋아난 절멸참이 여인의 목을 노리고 뻗어갔다.
최후의 공방은 승패를 갈랐다.
진천이 발한 절멸참은 여인의 목덜미에 한 줄기 혈선을 남겼을 뿐이었다. 반면 여인의 일지(一指)는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손가락에 찔렸을 뿐인데 진천은 황소에 받친 듯 튕겨 날아갔다. 여인이 보지 못하는 눈을 들어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인에게서 삼사 장 떨어진 곳에 쓰러진 진천은 즉사한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줌의 피를 토해내고는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진천의 생존을 감지한 여인이 그에게로 가려하자 검왕이 말렸다.
“내버려두어라.”
여인은 검왕의 말을 듣지 않고 절멸비에 맞은 다리를 질질 끌며 진천에게 다가갔다. 이형환위를 발한 검왕이 진천의 앞에 나타나 여인을 막아섰다.”아으 이 아아으 우이이 아으 어에어.”
여인이 울부짖듯 목소리를 키우자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던 검왕이 비켜섰다.
진천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여인이 그의 얼굴을 만지려하자 검왕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서라. 지금 건드리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어아이에어.”
신경질적인 괴성을 내질렀으나 여인은 버티지 않고 일어섰다.
두 사람은 경미한 발작 후 다시 잠잠해진 진천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죽은 듯 보였으나 진천은 명줄이 붙어있었다. 시체는 숨을 쉴 수 없는 법이었다.
진천은 이를 악물었다.
일순지간 반자나 늘어난 여인의 검지에 뚫린 심장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극통을 선사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최후의 공방전에서 치명타를 피하지 못할 것을 예감한 진천은 여인의 손가락이 왼 가슴을 파고들자마자 환생결을 운용했다. 여인의 일수가 만든 구멍을 독정이 메웠다. 가까스로 파괴의 참사를 모면한 심장은 부지런히 회생의 작업에 들어갔다.
여인의 가일수가 염려스러웠으나 방어가 불가능했기에 진천은 운명을 하늘에 맡겼다. 아스라이 검왕의 목소리와 여인의 기성이 들렸다. 그녀가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진천은 가물거리는 의식을 부여잡고 회복에 전념했다.
진천은 눈을 떴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몸을 일으킨 진천은 주위에 검왕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여인에게 물었다.
“괜찮소?”
시간의 경과를 정확히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운공에 든 지 반 시진은 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절멸참과 절멸비가 남겼던 여인의 상처는 그새 아물어있었다.
“아으 아아오 아이이 아아어.”
여인의 ‘말’에 진천이 쓰게 웃었다.”다행이구려.”
여인이 자지러질듯 놀랐다.
“어어에 애 아으 아아으어이.”
진천이 여인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당신은 검왕 어르신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소? 그래서 주의 깊게 들으면 나도 그 어른처럼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소.”
얄따란 입술을 크게 벌리더니 여인이 탄성으로 짐작되는 기음을 토해내었다. 그러고는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여인의 말이 너무 빠른데다 양도 많아 진천은 알아듣는데 애를 먹었다. 그러나 집중하고 있었기에 대략적인 뜻을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진천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청력이었다.
‘몸은 아이인데 목소리는 늙은 사람’은 당연히 권왕일 터였다. 여인은 검왕의 모옥에서 이삼백 장이나 떨어진 암굴에서 권왕이 검왕에게 했던 이야기들을 엿들은 것이었다.
어쩌면 모옥 근처로 가서 들었을 지도 몰랐다. 권왕의 작은 체구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 경우에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권왕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그녀의 운신이 은밀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절대고수의 기감에 걸리지 않는 것은 결코 간단한 재주가 아니었다.
진천은 여인의 질문들에 역순으로 대답했다.
“당신이 괴물이 아니듯 나도 괴물이 아니오.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을 뿐 우리는 둘 다 엄연한 인간이오. 심장을 다치고도 무사한 건 내가 특별한 비술을 익힌 덕분이오. 내 작은 의형과의 사연을 아는 걸 보니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겠구려. 당신의 짐작이 맞소. 의도치 않게 비무가 격렬해지긴 했지만 아무런 원한이 없는 당신에게 살수를 쓸 수는 없었소. 설사 내가 죽더라도.”
여인이 진천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진천은 여인이 뒷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대뜸 진천의 팔을 잡아끌더니 손등에 검지를 댔다. 진천은 일순 움찔했지만 손을 빼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여인의 손가락이 그의 피부를 간질이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진천이 처진 눈을 올렸다.
“명(明)? 혹시 당신 이름이오?”
여인이 기쁜 듯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웬일인지 밝게 웃던 여인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진천은 자기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의 반응을 감지했는지 ‘명’이 구겼던 인상을 폈다.
진천은 명의 야릇한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구려.”
명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들이 진천의 이마와 눈과 코와 입술을 꼼꼼히 훑었다. 귀와 뺨과 턱도 빼놓지 않았다.
애매한 감상을 뱉은 명이 물었다.
진천의 답변이 나오기도 전에 명이 질문을 보탰다.
진천은 뻥 뚫린 곳에 암흑이 고여 있는 명의 눈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붉은 눈동자’가 들어있었을 눈이었다. 동공을 마구잡이로 후벼 판 듯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눈이 아니더라도 명은 예쁜 용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납작한 코에 얇고 비뚤어진 입술, 그리고 주걱턱.
진천의 대답이 늦어지자 명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