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48
제147화
진천이 대담하게 명의 면상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당신은 조금도 흉측하지 않소, 명.”
화들짝 놀란 명이 진천의 손을 뿌리쳤다.
“내 큰 의형의 말을 들었다면 내가 거짓을 말하는 이가 아님을 알 거요.”
“그렇지는 않소. 내 얼굴이 평범하듯 당신도 그러하오.”
명이 볼 수 없는 눈으로 진천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입술에서는 소심한 음성이 빠져나왔다.
“그렇소.”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명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천이 입을 열었다.
“나도 몇 가지 물어보고 싶소만.”
“우선 당신의…….”
진천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명을 따라 시선을 골짜기 쪽으로 옮겼다. 검은 그림자가 유령처럼 빈 공간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순식간에 수십 장의 거리를 지우고 날아온 검왕의 흰 수염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생사를 걸고 싸우더니 오누이처럼 친해졌구나.”
달빛 아래 명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를 일별한 검왕이 진천과 눈을 맞추었다.
“기이한 사술을 익혔구나. 심장이 뚫리고도 온전하다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진천은 침묵했다.
“네가 가능하다면 무황도 그럴 수 있을 테지?”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님을 알기에 진천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맑은 호수 같았던 검왕의 동공에 격랑이 일었다. 진천은 그 변화가 무황에 대한 집착과 승부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틀림없이 살아있을 게다. 그리고 반드시 빚을 갚으러 올 게다.”
자문자답하는 검왕의 눈에 광기가 아른거렸다. 진천은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검왕은 곧 예의 무심한 눈빛으로 돌아갔다.
“그만 가거라.”
느닷없는 축객령에 진천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외람되지만 저는 패하지 않았습니다, 어르신.”
“그럼 이겼단 말이더냐?”
“어르신의 판정에 따르겠습니다.”
진천의 승부수에 검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천은 검왕의 안목을 믿었다.
최후의 공방에서 그와 명은 동귀어진의 수법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가 발한 절멸참은 명의 목을 자르지 못하고 빗나갔다. 겨냥을 잘못 했거나 그녀가 피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진천은 차마 명의 목숨을 앗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스스로 절멸도를 비튼 것이었다. 촌각을 천분지일로 나눈 것보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그대로 실행했다면 그의 절멸참은 명의 검지에 앞서 그녀의 목을 떨구었을 것이었다. 그녀의 갑피는 가린보다 단단했으나 십이 성의 공력을 담은 그의 수강을 버텨내지는 못했을 터였다.
진천은 검왕이 이러한 정황을 감안해주기를 바랐다. 명의 검지에 당하긴 했지만 사망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승리를 주장해도 아주 억지는 아니었다.
검왕의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명이 나섰다.
명의 선언에 검왕의 목소리가 엄중해졌다.
“나의 검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너는 여기를 떠날 수 없다.”
진천이 반발하려는 명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기다려보오, 명.”
검왕이 백미를 추켜올렸다.
“명? 벌써 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줄 만큼 친해졌더냐?”
진천은 황당했다. 제자는 아니더라도 검공을 전수해주는 이의 이름도 여태 몰랐단 말인가. 진천은 검왕이 그녀의 진실한 정체조차 모르는 건 아닐지 의심스러웠다.
“제 작명이 아닙니다. 그녀의 모친이…….”
명이 진천의 말을 가로챘다.
떼를 쓰듯 같은 말을 뱉어낸 명이 별안간 작은 몸을 움츠렸다. 검왕이 쏘아낸 암기(暗氣)에 위축된 모양이었다. 진천이 명과 검왕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명을 등진 진천이 코앞의 검왕을 직시했다.
“판정을 내려주십시오.”
“너는 쓰러지고 그 아이는 서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여쭙고자 하는 건 누가 승자인지입니다.”
“꼭 정해야 한다면 너희 둘 다 패자다.”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검왕의 눈빛을 본 진천은 그가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포기하기엔 일렀다. 하나의 벽이 막히면 다른 벽을 두드려봐야 했다. 누가 알겠는가. 벽이 열려 문이 될지.
“명은 저와 함께 수련하면 더욱 빨리 강해질 것입니다. 무인에게 있어 호적수보다 강한 자극제는 없잖습니까?”
검왕의 동공에 기광이 번득였다. 진천은 제대로 찔렀음을 직감했다.
기실 처음부터 검왕과 명의 관계가 궁금했다. 검공을 전수하지만 제자가 아니라면 명은 검왕에게 어떤 존재일까. 두어 가지 조각들을 맞춰보니 그럴 듯한 그림이 나왔다.
검왕은 명을 키우려는 것이었다. 그녀가 그의 무위에 필적할 만큼. 혹은 능가할 만큼. 그러고는 그녀를 상대로 건곤일척의 승부를 보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명은 검왕에게 있어 무황의 대용이었다.
검왕이 백염으로 덮인 턱으로 명을 가리켰다.
“그 아이가 누군지 알고 있을 테지?”
모호한 질문이었으나 진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그 아이의 정체를 알게 되면 소동이 일어날 게다. 충분히 강해질 때까지는 은인자중해야 할 터. 바깥에 내놓기엔 너무 이르다.”
“어르신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하지만 삼보장에서도 비밀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삼보장에 오시면 별도의 공간에 모시겠습니다. 몇몇 제 친인들 외엔 아무도 명에 대해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아는 바를 누설하지 않을 테고요. 약속드립니다.”
“나와 그 아이를 마련과의 전쟁에 끌어들이지 않겠다는 말이더냐?”
“물론입니다. 어르신께선 명과 더불어 삼보장에 머물러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어떤 외부활동에도 참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
검왕은 안색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유형이었으나 진천은 그가 미끼를 물 거라고 낙관했다. 예상은 들어맞았다. 갈등을 끝낸 검왕이 결론을 밝혔다.
“그곳으로 가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진천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로서는 큰 난제를 해결한 셈이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진천의 뒤에서 명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쓴웃음을 지은 진천이 그녀의 손을 떼어놓았다.
“미안하지만 급히 가 볼 데가 있어 어르신과 당신을 삼보장으로 안내할 수 없소.”
“정맹이오.”
진천은 명을 달랬다.
“공적인 용무라 곤란하오. 하지만 금방 다시 보게 될 거요.”
조그마한 명의 손을 다독거린 진천이 검왕에게 고개를 돌렸다.
“주안까지 가는 길은 아시는지요? 혹시 모르신다면 정맹의 일이 끝난 후 제가 모시러 오겠습니다. 빠르면 닷새 후에…….”
권왕이 진천의 말을 잘랐다.
“그럴 것 없다.”
진천은 기한을 못 박고 싶었으나 자제했다. 굳이 검왕의 심기를 건드릴 까닭이 없었다. 그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성정은 아닐 터이나 행여나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우를 범할지도 몰랐기에 조심하는 게 상책이었다.
“이 아이와 할 얘기가 있으니 그만 가 보거라.”
검왕이 다시 한 번 축객령을 내렸다. 처음과 달리 진천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삼보장에서 뵙겠습니다. 나중에 봅시다, 명.”
검왕에게 포권을 취한 진천은 명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후 평야 끝의 둔덕으로 몸을 날렸다.
진천은 날아갈 것 같았다.
일이 잘 풀려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의 신형은 실제로 한 번의 도약으로 삼사십 장 길이의 호를 그리며 쭉쭉 뻗어갔다. 누군가 그의 경신을 보았다면 저공비행 중인 거조(巨鳥)라 착각했을 터였다.
팔대무왕 급의 절대고수들이나 구현 가능한 최상승의 경공을 흉내 낼 수 있었지만 진천은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내력의 급격한 증가는 수명의 상당한 단축을 의미했다. 명과의 비무 직후 생환결을 운용했던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적시에 극약처방을 내리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염왕전으로 직행했을 것이었다.
어둠을 가르고 날아가며 진천은 검왕에 대해 생각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지만 그를 직접 만나보고도 딱히 잡히는 바가 없었다.
검왕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물이나 바람 같은 인물이었다. 그에게선 외조부나 권왕, 혹은 장왕과 달리 절대지경의 무존(武尊)다운 위압감이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진천은 검왕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그와 명의 대결은 비무가 아니라 생사투였다. 싸움이 격해지면 둘 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터임에도 검왕은 끝끝내 개입하지 않고 방관했다. 명이 그에게 중요한 존재였음에도!
진천의 상념이 검왕에게서 명에게로 흘러갔다. 그녀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면 검왕의 말마따나 소동이 벌어질 터였다. 소동 정도가 아니라 일대난리가 날 게 뻔했다. 천하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그녀가 무림사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초인의 신화를 재현할 수 있을지를 두고 끊임없이 입방아를 찧어댈 터였다. 진천은 그녀에게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불안했다.
장구에서 일신까지는 삼천리 길이었다.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지만 진천에게 있어 사흘은 넉넉한 시간이었다. 해가 난 동안에는 마방에서 빌린 말들을 이용해 대로를 달리고 밤에는 인적 없는 산야를 골라 경공을 전개한 진천은 검왕과 헤어진 지 이틀 만에 일신(日新)에 당도했다. 정맹이 지정한 날짜에는 하루의 여유가 있었기에 진천은 일신에 들어가지 않고 외곽의 주악산(朱岳山)에서 휴식을 취했다.
삼백오십 장 높이의 산정에서 내려다 본 일신의 야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기루의 불빛들로 불야성을 이루었던 봉천과 비슷한 느낌이었으나 규모 자체가 달랐다. 일백만의 인구를 품은 천하제일도(天下第一都)는 끝이 보이지 않는 빛 무리를 발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중원에 가면 가장 먼저 찾고 싶었던 곳이었으나 이상하게도 별반 감흥이 일지 않아 진천은 당혹스러웠다. 산에서 내려다보는 일신의 풍광은 크고 화려하다는 느낌 뿐 다른 도시들과 차이가 없었다.
날이 밝자 하산한 진천은 일신에 들어섰다. 이른 시각이었지만 번화한 거리엔 인파가 넘쳐흘렀다. 분주히 길을 오가는 행인들의 표정에서는 활기보단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조급함이 묻어났다. 풍요와 번영을 과시하는 그들의 터전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얼마 후 진천은 유명한 대화로(大華路)에 들어섰다. 대화로는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며 올려다보아도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고층 거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천하명소였다. 그러나 진천은 대처(大處)에 처음 나온 촌뜨기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며 걸었다. 당금 강호 제일의 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허름한 행색의 그를 주목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워낙 큰 도시인지라 반 시진을 넘게 걷고서야 진천은 일신을 세로로 양분하는 동강(東江)에 이르렀다. 정맹은 강 너머에 있었다.
폭이 오륙십 장에 달하는 대강이었지만 건너기 위해 배를 탈 필요가 없었다. 양편을 연결하는 대교(大橋)가 일곱 개나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평민들에게 허락된 삼정교(三正橋)를 지난 진천은 다시 반 시진을 걸어 정맹에 당도했다.
잠시 멈춰 서서 멀리 보이는 거대한 성문에 시선을 고정시킨 진천은 심호흡을 했다. 이제 곧 정파 무림의 본거지에 들어설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