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49
제148화
호맹단(護盟團) 경비대(警備隊) 제삼조장(第三組長) 허중(許重)은 남다른 기억력에 특별한 자부심을 지닌 위인이었다.
그는 정맹의 주요 인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시녀들과 하인들의 면면도 세세하게 식별할 수 있었다. 그의 머리에 저장된 얼굴의 수는 물경 이만에 달했다.
그러나 허중은 그에게로 곧장 다가오는 청년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면상이었지만 누군지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자존심이 상해 맹렬하게 머릿속을 뒤지던 허중은 불현듯 깨달았다. 누더기 같은 마의를 걸친 청년은 초면이었다. 면식이 있다고 착각한 것은 그가 너무 평범하게 생긴 탓이었다. 눈꼬리가 살짝 쳐졌다는 것을 빼면 특징이라고는 손톱에 낀 때만큼도 없는 낯짝이었다.
허중의 좌우에 선 삼조의 무사들은 그의 판단을 기다렸다. 그들로서는 당당하게 대문을 향해 걸어오는 청년의 정체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거지꼴을 간신히 면한 차림새로 보아서는 잡일이나 하는 아랫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다면 수많은 쪽문을 두고 팔대문(八大門)의 하나인 서문(西門)으로 들어올 리가 없었다.
삼조 무사들은 조장의 눈썰미를 믿었다. 그라면 청년이 단순히 정신이 나간 놈인지 아니면 대문을 통과할 자격이 있는 인사인지 구분할 수 있을 터였다. 조심해야 했다. 불경한 태도를 취했다가 만에 하나라도 후자라면 곤욕을 치를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쏠린 조원들의 시선을 의식한 집중했다. 지금이야말로 진가를 발휘할 때였다.
매의 눈으로 마의청년을 관찰한 허중은 그가 지척에 이르렀을 때 결론을 내렸다. 청년은 미친놈이었다. 혹시 정맹을 처음 방문하는 걸걸문(乞傑門)의 신진고수인지 몰라 유심히 살폈으나 그들의 표식이라 할 호리병이 허리에 걸려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가능성이 희박했다. 게다가 청년에게선 고수다운 풍모라고는 참새 코딱지만큼도 묻어나지 않았다. 고수는커녕 무인인지도 의문이었다.
허중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흐뭇했다. 간혹 다른 조의 동료들로부터 대문 근처에 얼쩡거리며 매를 버는 덜 떨어진 종자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으나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십오 년 경력의 경비무사라면 응당 몇 개는 갖고 있어야 할 경험담이 없어 괜히 언짢았던 허중으로서는 청년의 출현이 반갑기까지 했다.
허중의 삼보 전면에 선 청년이 포권을 취했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허중이 으름장을 놓았다.
“간덩이가 탱탱 부었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허중은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의 입을 막은 이는 막 대문을 나서던 중년인이었다.
배꼽 아래까지 늘어진 수염을 휘날리며 나타난 중년인을 본 경비무사들은 얼어붙었다. 그가 요주의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사소한 실수로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변을 당한 하급무사들이 부지기수였다.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릎이 꺾여 불구가 된 경우도 있었다. 중년인은 포악한 성정으로 악명 높은 고암 설가의 중견 강호 탈명장(奪命掌) 설구진(薛究眞)이었다.
설구진이 다가오자 허중을 비롯한 경비대 삼조의 여덟 무사는 창을 바로 세우고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하지만 설구진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마의청년에게 고정되어있었다.
“귀, 귀하가 여기는 어쩐 일로…….”
바짝 긴장한 와중에도 허중은 귀를 의심했다. 환청이 아니라면 분명 설구진의 목소리였다. 다은 순간 허중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마의청년은 설구진이 ‘귀하’라고 호칭할 정도로 지고한 신분이었다. 그런 이에게 ‘간덩이’ 운운했으니 이제 그는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었다.
하늘이 노래진 허중은 다리에 힘이 풀려 허물어졌다. 그러나 그의 엉덩이가 땅에 닿기 전에 누군가 그를 잡았다.
“괜찮습니까?”
느닷없이 쓰러지는 무사를 부축한 진천은 그가 별안간 거품을 물고 까무러치자 연유를 짐작하고는 쓰게 웃었다.
“이 분을 돌봐주십시오. 정신을 차리면 아무 문제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일러주길 바랍니다.”
경비무사들이 허겁지겁 진천에게서 조장을 받아 들었다. 그들에게 혼절한 무사를 맡긴 진천이 뒤늦게 중년인에게 눈을 돌렸다.
진천은 중년인을 알아보았다. 그가 누구나 알만한 명사라서가 아니었다. 개인적인 인연이 있어 따로 용모화를 보아두었기 때문이었다. 올해 마흔세 살이 되었을 중년인은 소년 시절 원주 강가의 소녀와 시비가 붙어 그녀의 주먹에 턱이 부서지는 망신을 당했던 설구진이었다.
“집법단에 볼 일이 있어서 왔소.”
진천은 자기소개도 생략하고 무뚝뚝한 어투로 용건을 밝혔다. 북운상단의 인명록에 기록된 설구진의 행적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만행으로 가득 차있었다. 모친과의 악연이 아니더라도 그는 도저히 호감을 느끼지 어려운 인물이었다.
하잘것없는 경비무사들에게는 경어를 쓴 진천이 그에게는 평대로 대하자 설구진이 눈 끝을 실룩거렸다. 하지만 설구진은 그 이상의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스스로를 거물이라 자부했으나 하남신룡의 위상에는 턱없이 모자람을 모르지 않아서였다. 정맹의 용호라 해도 천하제일신성의 위명 앞에서는 몸을 낮추어야 했다.
여유를 보이려는 듯 탐스러운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설구진이 진천의 말을 받았다.
“그렇구려. 괜찮다면 내가 안내할까 하오만.”
아직도 진천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경비무사들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대체 누구이기에 탈명장이 길잡이를 자처한단 말인가.
집법전까지 걸어가며 안면을 트고 친분을 쌓으려는 설구진의 심산을 짐작하고도 남았지만 진천은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진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설구진이 반색했다.
“따라오시오, 하남신룡. 참, 나는 고암 설가의 구진이라 하오. 무림의 동도들은 나를 탈명장이라 부른다오.”
설구진의 입에서 진천의 별호가 나오자 경비무사들은 하마터면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혼절한 조장을 제외한 일곱 무사는 설구진의 저자세를 완전히 납득했다.
설구진이 부랑자 같은 행색의 청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모습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많은 이들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그들 중 누군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하남신룡이다!”
그의 고함은 소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적이 쳐들어오기라도 한 듯 도처에서 무인들이 뛰쳐나왔다. 한적하던 대로가 대번에 군중으로 덮였다. 수백의 숫자는 금세 삼사천으로 불어났다.
“비켜서라들.”
내공을 담아 설구진이 호통을 치자 길을 막고 있던 무리가 도끼에 찍힌 장작처럼 반으로 갈라졌다. 그에게 달라붙는 수천 쌍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진천은 경직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를 유지했다.
수천 군중을 그림자처럼 달고서 반각쯤 걷자 낯익은 이가 달려왔다. 집법단주 성대진이었다. 오 척에도 미치지 못하는 단신이지만 두드러진 존재감을 드러내며 등장한 성대진이 모기떼처럼 진천을 쫓고 있던 군중을 쫓았다.
“무슨 구경거리라도 났느냐? 물러들 가라.”
정맹 내에서 염왕과 동격으로 군림하는 집법단주의 명을 거역하는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대로가 순식간에 썰렁해졌다.
위엄을 과시한 성대진이 아직도 남아있는 설구진을 노려보며 무언의 압력을 가했다. 진천을 가로채려는 그의 횡포에 설구진은 소심하게 저항했다.
“하남신룡의 부탁으로 집법전에 데려다주던 참이었습니다.”
진천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굳이 사실관계를 바로잡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가 갈 곳은 집법전이 아니다.”
설구진이 진천을 대신해 물었다.
“그럼 어디로……?”
백미를 일그러뜨리며 성대진이 설구진의 말을 잘랐다.
“내가 너에게 보고를 해야 하느냐?”
성대진의 눈빛이 사나워지자 설구진은 더 버티지 못하고 꼬리를 말았다.
“성 단주께서 나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설구진이 진천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허락되면 만복전(萬福殿)을 찾아주시오, 하남신룡. 설가에서만 즐길 수 있는 귀한 수오차(茱梧茶)를 대접하리다.”
진천은 대꾸를 주지 않았다.
진천은 성큼성큼 앞서 가는 성대진의 뒤를 따랐다.
성대진의 엄포가 이미 널리 퍼져서인지 아무도 그들 노소 근처에 접근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모퉁이를 돌 때마다 수백 개의 새로운 시선들이 진천에게 꽂혔다.
얼마간 걷던 진천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 중인지요?”
성대진에게서 예상외의 대답이 나왔다.
“소화원(素花院)이다.”
진천은 오재승이 건네준 전도(全圖)를 통해 육십만 평에 달하는 정맹의 내부구조를 숙지하고 있었다. 성대진이 이끄는 방향이 맹주전이나 정무전(正武殿)과는 반대쪽이라 의아했기에 질문을 던졌던 진천은 뜻밖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했다.
보안이 보장되지 않는 장소를 택한 정맹 수뇌부의 의도를 헤아린 진천은 고소를 지었다. 그로서는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가을임에도 봄날처럼 꽃들이 만발했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백색의 기화(奇花)들이 흐드러지게 핀 화원을 가로지른 진천은 육각 정자에 이르러 성대진과 함께 멈춰 섰다. 정자에는 십일 인의 노인이 어깨를 맞대고 일렬횡대로 서있었다. 안면이 있는 이는 한 명 뿐이었지만 진천은 그들 모두의 별호와 성명을 알고 있었다.
저마다 백염을 드리운 노인들은 정맹 용좌 위(位)의 무호(武豪)들이었다. 그들은 정맹의 최고의결기구인 정심원의 구성원들이기도 했다. 맹주인 북천도왕 강운도 정심원의 일원이었다. 정심원은 그를 포함한 오대세가의 가주들을 망라했다.
진천은 묵직한 안광들을 뿜어내는 정자의 노인들을 향해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세평회의 진천이 정심원 어르신들을 뵙습니다.”
정중앙에 선 장신의 노인이 대표로 진천의 인사를 받았다.
“어서 오거라. 내가 누군지 아느냐?”
“네, 어르신.”
노인은 사평 팽가의 가주이자 정파제일검(正派第一劍)으로 불리는 유운검군(流雲劍君) 팽자방(彭滋邦)이었다. 팽자방은 현 정심원의 최(最)연장자이기도 했다. 그의 나이는 팔십구 세였다.
팽자방은 시간을 끌지 않고 본론으로 직행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맹주를 대신해 네 처분에 대한 본맹의 결정을 알려주마.”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입술이 마른 팽자방이 혀로 침을 묻힌 후 말을 이었다.
“잔귀쌍마의 죄업을 고려하면 그들을 사승으로 둔 너를 즉참해야 마땅하나 선업을 지어 선대의 죄과를 조금이나마 지우게 해달라는 네 간청을 받아들여 속죄할 기회를 주겠노라.”
팽자방이 뜸을 들이자 진천은 마지못해 예를 표했다.
“크나큰 관용과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진천은 팽자방의 목구멍에 대기하고 있는 말이 어떤 내용일지 알고 있었다. 짐작대로였다.
“너는 앞으로 네가 맹세한 바대로 빈민구휼에 모든 노력을 다 하도록 해라. 단, 본맹이 허락할 때까지 주안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만약 이를 어기고 타지에 나가 분란을 일으킬 시엔 본 정심원의 판결에 불복한 걸로 간주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릴 것이다.”
진천은 팽자방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중인을 충격에 빠뜨렸다.
“죄송하지만 저는 따를 수 없습니다. 부디 재고해 주시기…….”
진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팽자방의 좌측 끝에 섰던 매부리코의 노인이 노기를 터뜨렸다.
“뭐라? 이런 건방진 놈. 알량한 명성을 얻더니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권왕을 믿고 그리 오만방자하게 구는 모양인데 자리를 잘못 잡았다. 네놈은 지금 그 망언만으로도 목을 내놓아야 할 터. 경망스럽게 혀를 놀린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당장이라도 출수할 것처럼 기세등등한 노인은 고암 설가의 이인자 설국환(薛國桓)이었다. 그는 가문의 평화를 위해 가주 자리를 사촌 형에게 양보했지만 자기가 설가의 실질적인 최강자라고 십 년 째 떠벌리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경망스러운 혀’ 운운하자 정심원 원로들 대부분이 혀를 찼다.
하지만 진천에 대해서는 설국환의 심정과 대동소이했다. 권왕을 뒷배로 두었다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망둥이의 행태를 묵과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