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5
제14화
이틀 전처럼 노덕과 고량, 그리고 진천이 객잔의 탁자에 둘러앉았다.
그날과 달리 그들 외에 다른 손님은 보이지 않았고 국수와 술을 내올 장초도 없었다. 썰렁한 객잔 안의 분위기는 더욱 썰렁했다. 노덕은 고량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고 고량의 시선 역시 허공을 배회했다.
그나마 양자와 친분을 쌓은 진천이 중간에 자리한 덕분에 상대방의 숨소리마저도 불편하게 느껴질 어색함이 완화되었다. 그러나 진천은 섣부른 화해의 중재를 삼갔다. 지금의 만남은 의숙부와 조카 사이의 앙금을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마련된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노덕이 설명하는 동안 고량은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그는 긴요한 질문을 위해 딱 두 번 입을 열었을 뿐이었다.
한때 보석을 다뤘기에 그 방면에 지식이 상당한 노덕은 고량이 어떤 물건을 어디서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주었다. 귀도가 훔친 장물을 무작위로 팔다가 잘못 걸리는 날엔 경을 치를 게 뻔했다. 가공품은 절대로 손을 대지 말고 가급적 금을 녹여 덩어리로 만들거나 원석을 깎아 형태를 바꾼 후 암상(暗商)들과 거래하라는 등의 조언을 건네며 노덕은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리하도록 재삼재사 당부했다. 고량은 시종일관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했다.
회합은 짧았다.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노덕의 밑천이 떨어지자 고량은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는 진천에게만 인사를 하고 객잔을 나갔다. 진천은 노덕에게 눈짓을 한 후 고량을 따라나섰다. 진천이 돌아올 때까지 노덕은 휑뎅그렁한 객잔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객잔 문이 열리더니 진천이 발을 들여놓았다.
“늦었습니다, 대인. 나산까지 배웅하느라.”
“잘했네.”
미소를 지었음에도 노덕의 얼굴은 침울해 보였다.
“자네가 같이 있지 않았다면 그는 내 목을 졸랐을지도 모르겠구먼. 차라리 그랬으면 덜 괴로웠을 텐데. 나는 그를 볼 면목이 없어 감히 사과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네.”
“그의 자중은 저와는 무관합니다, 대인. 고 형은 스스로 선택을 했습니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진천이 노덕을 위로했다.
어젯밤 고량과 대화를 나누며 진천은 노덕의 부탁대로 고숭의 죽음에 얽힌 내막을 가감 없이 전해 주었다. 놀랍게도 고량은 별반 충격을 받은 모습이 아니었다. 이미 심증을 굳히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주제넘은 소리인 줄 알지만 고 형에게 제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다른 이가 너에게 잘한 일들은 돌에 새기고 너에게 잘못한 일들은 물에 새기라.’는 말입니다. 어릴 때 나무족의 디안 할아버지에게 들은 말인데 너무 멋있어서 제 신조 중에 하나로 삼았습니다.”
“훌륭한 말이구먼. 하지만 이 엄혹한 세상에서 실천하기엔 너무 어려운 말이기도 하네. 자네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흉내조차 내지 못할 걸세.”
진천이 낯을 붉혔다.
“아닙니다. 저도 생각만 그럴 뿐 늘 어기고 있습니다. 다만 그러려고 노력할 따름입니다.”
노덕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진천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잔살광마 같은 악인에게서 자네처럼 선한 제자가 나왔는지 신기하구먼.”
진천의 낯빛이 더욱 붉어졌다.
잔살광마는 살인자였다.
그와 더불어 잔귀쌍마라 불리는 귀도마의가 신분이 밝혀졌음에 반해 잔살광마의 정체는 아직도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활동 기간도 귀도마의에 비해 훨씬 길었다. 그의 표식이 처음으로 나타난 시점에서 마지막 희생자가 나왔던 때까지의 기간은 삼 년이 넘었다. 잔살광마는 그동안 천 명에 가까운 무고한 이들을 살해했다.
평균으로 따지면 매일 한 건의 살인을 저지른 셈이지만 실제로는 들쭉날쭉했다. 어떨 때는 하루에 삼사십 명을 죽이고 또 어떨 때는 몇 달 내내 잠적하곤 했다.
잔살광마는 두 가지 이유로 주목을 받았다. 하나는 그가 살수를 쓴 이들이 거지나 빈민 같은 하층민들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들을 해친 방식이 지나치게 잔혹하다는 것이었다. 전자는 정맹의 늦은 개입을 초래했고 후자는 만인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잔살광마는 육포를 뜯듯 희생자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 그러고는 두개골을 부수고 뇌를 파먹었다. 뇌가 사라진 시체 자체가 잔살광마의 표식이었다.
잔살광마가 벌이는 기괴한 살인 행각의 이유를 두고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그가 청부를 받아 살행에 나섰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데는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대가를 받기 어려울 터이기 때문이었다. 잔살광마가 죽인 이들은 곁에 있어도 모르고 없어도 표가 나지 않는 소위 ‘하잘것없는’ 부류였다.
사사로운 원한 때문이 아님도 분명했다. 그러기엔 희생자들 사이의 연관성이 너무 부족했다. 결국 ‘살인에 굶주린 미친놈’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잔살광마를 잡기 위해 무림의 협객들이 동분서주했지만 일 년이 지나도록 그의 그림자조차 밟지 못했다. 그러나 정맹의 고수들이 본격적으로 나서자 상황이 달라졌다. 잔살광마는 살행을 중단하고 완전히 종적을 감출 때까지 네 번이나 정맹의 무인들과 충돌해야 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충돌이라기보다는 조우였다. 잔살광마가 싸움을 피하고 불문곡직 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다. 잔살광마가 구사한 경신은 전날 귀도마의가 펼쳤던 것과 흡사했다. 경공의 대가이자 우연히 둘 모두와 대면했던 비영문(飛影門)의 곽상구(郭尙究)는 동일한 신법이라 단언했다.
하지만 잔살광마와 귀도마의가 동일인일 가능성은 전무했다. 잔살광마가 복면을 착용하고 있어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곽상구에 따르면 귀도마의와는 신장에서 한 뼘 이상의 차이가 났기 때문이었다. 귀도마의 구양은 오 척을 겨우 넘는 단신이었다.
공교롭게도 곽상구는 쌍마를 마지막으로 본 유일한 목격자가 되었다. 신묘한 신법과 무시무시한 도법을 과시하며 곽상구가 포함된 추포조를 따돌린 잔살광마는 그 이후 강호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진천의 안색을 살피던 노덕이 심중의 말을 꺼냈다.
“듣기 거북할 줄 아네만 이십삼 년 전 우연히 자네 사부에게 희생당한 이를 본 적이 있네. 실로 목불인견의 참상이었네. 수십 조각으로 찢긴 몸뚱이라니. 눈이 파이고 코가 베인 데다 입이 뭉개져 표정을 알아보기 힘든 데도 피투성이 얼굴에는 죽기 전에 그가 느꼈을 공포가 생생히 남아 있었다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자네 사부가 왜 그렇게 잔인하게 죽였는지가 아니라 어째서 그를 선택했느냐에 있었다네. 그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네. 저자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위한 당과를 파는 장돌뱅이였지. 신분이 달라 허물없이 어울린 적은 없었으나 우리 둘 다 주안의 토박이인지라 오며 가며 여러 번 마주쳤다네. 그는 한 마디로 만인 중 하나 볼까 말까 한 무골호인이었네. 평생 남에게 원한을 살 일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토록 험한 꼴을 당하다니. 지금까지도 배 속에 묵직한 돌덩이가 들어 있는 기분일세.”
“죄송합니다, 대인.”
진천의 사과에 노덕이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이런, 자네가 사과할 일이 아닐세. 나는 다만 자네라면 자네 사부가 그런 선량한 이들만 골라 살해한 까닭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오래된 기억을 들춰낸 것뿐이네.”
“사부는 정신이 온전치 못했습니다.”
“별호가 알리는 대로 광인이었다는 말인가?”
반사적으로 물었던 노덕은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진천에게서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노덕이 질문을 바꾸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들과 사제지연을 맺었는가?”
“제 어머니의 뜻이었습니다.”
“자네 모친이? 그녀는 그들과 이전부터 교분이 있었던 겐가?”
“……어머니는 사부들 중 한 분과 인연이 있었습니다.”
진천이 그 주제로 대화를 잇는 걸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노덕은 조금 더 밀고 나갔다.
“그녀는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는가?”
“그렇습니다.”
“그랬구먼.”
진천을 배려한 노덕이 호기심을 억누르고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다. 그러자 진천이 자발적으로 몇 마디를 보탰다.
“어머니도 사부들의 강호에서의 행적과 관련하여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게 두 가지를 지키라고 당부하셨지요.”
노덕이 관리가 안 돼 심하게 엉켜 있는 백염을 쓰다듬었다.
“흠, 하나는 알겠네만. 강호에 나가면 사문을 밝히지 말라는 것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나와 의질에게는 알려 주었는가?”
“대인과 고 형의 비사(秘史)를 들었으니 제 것도 털어놓아야 공평하지요. 그리고 대인도 고 형도 다 믿을 만한 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허허, 이것 참. 몸 둘 바를 모르겠구먼. 하잘것없는 늙은이를 좋게 봐 줘서 고마우이. 설사 송곳으로 눈알을 찔린대도 자네의 사문에 관해 발설하지 않을 것을 맹세함세.”
“안 그러셔도 됩니다, 대인.”
“그래, 말로 하는 맹세는 의미가 없지.”
“그런 뜻은 아닙니다.”
“알겠네. 한데 자네 모친이 명했다는 다른 하나는 뭔가?”
“사부들의 무공을 변형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눈썰미가 좋은 이들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제 재주가 빈약한 탓에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한다고 했지만 어느 정도나 해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손을 보는 중입니다.”
“흠, 혹시 어제 염방주를 상대로 보여 준 투석기(投石技)가 도의의 표창술에서 비롯된 것이었던가?”
“그렇습니다.”
“허허, 한낱 돌팔매질로 절정의 경계에 든 고수를 곤란하게 만들기에 깜짝 놀랐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었구먼. 객잔 주인 말로는 자네가 엄청난 천재라던데…….”
노덕은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털보 장초가 소리도 요란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허 노야 말로는 중원에 가기로 했다던데 정말이냐?”
괜히 노덕을 쏘아본 장초가 씩씩거리며 진천에게 물었다. 진천이 싱긋 웃었다.
“하하, 맞아요, 장 아저씨. 후딱 다녀올게요.”
장초의 두툼한 볼살이 푸들거렸다.
“저번에도 똑같은 소리를 하고 떠나더니 일 년이나 걸리지 않았느냐? 중원은 밀림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험한 곳이다, 이 녀석아.”
“그럭저럭 용호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장 아저씨.”
“그 말이 아니잖으냐? 너는 아직 노괴들의 무학을 완벽하게 탈바꿈시키지 못한 걸로 아는데 너무 이른 것 아니냔 말이지.”
“조심할게요.”
“흥, 허 노야 앞에서 입술을 깨물었다니 말린다고 들어먹을 리 없겠지. 젠장, 그쪽으로는 더러워서 오줌도 누지 않았는데.”
“어, 같이 안 가도 돼요, 장 아저씨.”
“누가 그런대? 내가 달라붙어 봐야 짐만 될 뿐이지. 하지만 앞으로 귀를 활짝 열어 두고 있을 테니 필요하면 언제든지 우리를 불러라. 네가 어디에 있든 불원천리 달려가마.”
“고마워요, 장 아저씨.”
“언제 출발할 거냐? 아까 그치와 나산으로 향하던데 설마 당장 가려는 건 아니겠지? 푸줏간 성가하고 대장간의 배씨 놈들이 알면 길길이 날뛸 텐데.”
진천이 노덕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알아요, 장 아저씨. 여기 친구들은 물론이고 밀림의 형제들에게도 인사를 해야 하니 빨라야 사나흘 후에나 떠나게 될 거예요. 그래도 괜찮을는지요, 대인?”
노덕이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마다. 사나흘이 아니라 열흘이라도 기다릴 수 있으니 자네 편한 대로 하게나.”
“고맙습니다.”
“어이하여 매번 내가 해야 할 말을 자네가 하는가. 제발 그러지 말게나.”
“하하, 네.”
털보 장초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껄껄, 좋아. 오늘 대왕객잔의 술을 모조리 마셔 보자꾸나. 가서 방울을 울려 주당들을 모아라, 천아. 노인장은 날 좀 거들어 주쇼.”
장초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진천과 노덕이 각각 벽과 주방 쪽으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