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50
제149화
설국환의 옆에 있던 노인이 그의 팔을 잡았다.
“진정하게, 설제. 저 아이의 말을 좀 더 들어 보세나.”
설국환이 마령 문가의 도호 창천도군 문찬경의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놓으시오, 문 가주. 저놈에게 망신을 당하고도 아량을 베풀 참이오? 나는 그렇게는 못…….”
“닥쳐라, 국환. 때와 장소를 가려 말을 뱉어내라고 얼마나 타일렀더냐? 이제는 상대조차 가리지 않는구나. 네가 창천의 칼을 받아낼 성싶더냐?”
설국환에게 윽박지른 노인은 고암 설가의 가주 설국전(薛國全)이었다. 진천은 그들을 보며 마령 문가의 전대 고수들인 청운도군과 발산도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욕을 당한 문찬경이 낯빛을 붉혔다. 분을 삭이는 그의 모습에 설국환이 재빨리 사과했다.
“미안하오, 문 가주. 실언이었소. 저놈이 얼토당토않은 개소리를 쏟아내는 바람에 흥분이 과했소.”
문찬경은 설국환을 무시하고 진천과 시선을 맞추었다.
“오랜만이구나.”
진천은 얼른 포권을 취했다.
“진천이 창천도군 어르신을 뵙습니다.”
여섯 달하고도 이십 일만의 재회였다. 노소는 잠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문찬경이 대화를 개시했다.
“네 발언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모르지 않을 테지? 너는 방금 정맹과 적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추호도 그런 뜻은 없었습니다. 저는 다만…….”
설국환이 진천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어쭙잖은 변명으로 빠져나갈 요량이거든 꿈…….”
설국환도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문찬경이 그의 말을 끊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맡겨 두게, 설제.”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누구라도 억누른 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반발과 자중을 두고 저울질하던 설국환은 후자를 택했다. 마령 문가 출신답지 않게 순유한 성품이지만 창천도군은 화가 나면 맹주에게도 맞서는 강골이었다. 그와 붙는다면 득보다는 실이 클 터였다.
설국환이 입을 다물자 문찬경이 다시 진천을 보았다.
“계속해 보거라.”
진천은 준비해두었던 말을 쏟아냈다.
“제게 사부들이 남긴 죄업을 조금이나마 씻을 기회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주안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명은 거두어주시길 간곡히 청하옵니다. 제 재주는 사부들에게 물려받은 무공 밖에는 없습니다. 그 무공으로 사부들처럼 무도한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마인들을 징치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선업을 쌓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뜻과 기개는 가상하나 무모한 짓이다. 마련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명석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네가 그걸 모를 리 없을 터. 어째서 이란격석의 우를 범하려는 게냐?”
“생사는 하늘에 맡기고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허어, 답답한지고. 정녕 본맹의 배려를 모르겠단 말이더냐? 네게 금족령을 내린 것이 너와 네 친인들을 보호하기 위함임을.”
“알고 있습니다, 어르신.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련과 싸우겠다는 말이더냐? 네가 또 한 번 그들을 건드리면 마련은 결코 참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길을 열어줄 수밖에 없다.”
“저희에겐 나름대로 대비책이 있으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권왕을 믿는 게로구나. 하지만 그는 혼자고 마련의 무왕은 둘이다. 아무리 권왕이라도 홀로 마왕과 장왕을 감당할 순 없음이야.”
“삼보장엔 권왕 어르신만 계신 게 아닙니다.”
“무슨 말이더냐? 권왕 말고 다른 무왕이 너희에게 가세하기라도 했다는 게냐?”
물 흐르듯 이어지던 대화가 진천의 침묵으로 뚝 끊겼다.
그를 주시하는 열한 쌍의 눈들을 둘러보며 진천이 입을 열었다.
“며칠 내로 검왕 어르신께서 삼보장을 찾으실 예정입니다.”
두어 명이 동시에 짧은 경악성을 터뜨린 후 무거운 정적이 장내를 내리눌렀다.
진천이 밝힌 내용은 천하가 뒤집어질만한 사안이었다. 검왕은 권왕과 더불어 팔대무왕의 으뜸을 다툰다는 무존(武尊)이었다. 그들 둘을 품었다면 세평회는 사패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세력이 되는 셈이었다.
침묵의 벽을 깬 이는 대화의 주도권을 문찬경에게 넘겨주었던 팽자방이었다.
“검왕이 너희와 함께 마련과 싸우기로 했다는 말이냐?”
진천은 애매하게 답변했다.
“그분은 삼보장의 귀빈이 되실 것입니다.”
팽자방이 집요하게 캐묻기 전에 진천이 화제를 돌렸다.
“다시 한 번 청하거니와 부디 결정을 재고해 주십시오. 저에게 마인들을 척결한 기회를 허락해 주시면…….”
설국환이 진천의 말을 잘랐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세사에 무관심하고 번잡함을 싫어하는 걸로 정평이 난 검왕이 어째서 스스로 난장판에 뛰어들려는 게냐?”
설국환의 말은 모두의 의문을 대변했다. 진천은 그를 직시했다.
“삼보장에 오시면 그분을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때 직접 물어보시지요.”
설국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진천의 뒤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성대진이 의견을 밝혔다.
“제가 보기엔 사실인 듯합니다. 이 아이가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할 까닭이 없잖습니까? 이 아이는 권왕과도 호형호제 하는 사이입니다. 몇 달 전이라면 누가 그런 이야기를 믿었겠습니까? 터무니없는 낭설이라 치부했겠지요.”
성대진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정심원의 원로들은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네 진정한 재주는 사람을 홀리는 데 있는 모양이구나. 어떻게 그 사귀기 어려운 이들을 둘이나 끌어들였느냐?”
성대진의 질문에 진천은 쓰게 웃었다. 구(舊) 사왕은 공히 친우가 없는 외톨이로도 유명했다.
“저로서는 두 분이 부족한 저를 좋게 보아주셔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열한 명의 원로들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동료들과 암묵적인 동의를 이룬 후 팽자방이 대표로 말했다.
“네 재고의 청을 받아들이마. 우리의 논의가 끝날 때까지 선휴각(先庥閣)에서 대기하도록 해라.”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성대진이 진천을 불렀다.
“가자, 데려다주마.”
문찬경이 인사를 하고 떠나려는 진천을 잡았다.
“잠깐 기다려라.”
진천을 세운 문찬경이 팽자방에게 말했다.
“나와 화월의 표는 다수의 결론에 따르는 것으로 일임하겠소.”
“회의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창천?”
“그렇소. 따로 할 일이 있소.”
중인이 문찬경과 진천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문찬경의 입에서 모두가 예상한 말이 빠져나왔다.
“네게 설욕전을 하고 싶은데, 받아주겠느냐?”
진천은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소문은 삽시간에 정맹 전역에 퍼졌다.
아름다운 꽃밭을 망칠 수 없다는 이유로 진천과 문찬경은 자리를 옮겼다. 성대진이 소화원에서 가까운 태평전(太平殿) 경내를 비무장소로 제안했다. 정심원의 원로들은 정무전으로 향하지 않고 두 사람을 따라왔다. 회의보다는 싸움구경이 더 재미난 법이었다.
진천과 문찬경이 태평전에 이르렀을 때는 불과 일 각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소문을 듣고 달려온 군중이 구름떼처럼 모여들고 있었다. 하지만 성대진이 광장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바람에 대부분은 담장 밖에 머물러야 했다. 태평전으로의 입장이 허락된 이들은 정심원의 원로들을 포함해 오륙십 명에 불과했다. 대다수가 정맹의 상징이라 할 용호단에 든 고수들이었다.
관전자들이 적어 이천 평 넓이의 광장은 한적해 보였다. 진천은 문찬경과 칠팔 장을 격하고 섰다. 참관인을 자임한 성대진이 주의사항을 읊는 것도 생략한 채 바로 비무개시를 알렸다.
그의 입에서 시작하라는 소리가 떨어졌지만 진천과 문찬경 모두 서로에게 달려들지 않고 제자리를 고수했다. 문찬경을 발도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진천을 주시하며 서서히 기운을 끌어올리던 문찬경이 마침내 칼을 뽑았다. 그에 맞추어 진천의 좌수에서도 절멸삭이 흘러나왔다.
우우웅.
문찬경의 반월도가 웅장한 도명(刀鳴)을 토해내더니 강기를 머금었다. 도강을 일으킨 문찬경이 공중으로 도약했다. 칠팔 장의 거리를 단숨에 지운 문찬경의 칼이 진천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진천은 중인의 예상을 완전히 거스르는 방식으로 문찬경의 일도양단에 대응했다. 두 달여 전 섬전도와의 비무에서 선보였다던 신묘한 신법을 발해 피하는 대신 절멸삭을 들어 방어한 것이었다. 그 결과 역시 모든 이의 예상과는 반대였다.
흐물흐물한 진천의 절멸삭이 황소만한 금강석도 단번에 쪼갤 위력을 담은 문찬경의 반월도를 튕겨내자 지켜보던 이들이 일제히 입을 벌렸다. 이 공방의 결과는 진천의 공력이 문찬경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인의 놀람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문찬경은 공세로 일관했고 진천은 수비에 치중했다. 그러나 비무의 주도권을 쥔 이는 문찬경이 아니라 진천이었다. 여느 비무와는 상이한 양상이었다.
문찬경은 끊임없이 두드렸고 진천은 흔들림 없이 막아냈다. 비무가 시작된 후 진천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한 걸음도 떼지 않고 있었다. 문찬경이 일으킨 칼바람에 쩍쩍 갈라지고 깨지는 돌바닥 한 가운데서 진천만이 온전했다.
한쪽은 달라붙고 다른 쪽은 떨쳐내는 기이한 공방전이 일백초를 넘어가자 관전자들은 혀를 내둘렀다. 다들 두 사람이 현시하는 무학의 심오함과 그들이 과시하는 공력의 심후함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진천의 무위를 견식한 정심원 원로들의 가슴이 답답함으로 물들었다. 약관에도 이르지 않은 새파란 후기지수가 수십 년 동안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도호로 군림해온 창천도군을 사실상 압도하는 모습은 꿈속에도 보았다고 해도 믿기지 않았을 광경이었다.
관전하는 용호들은 하남신룡이 장차 팔대무왕을 능가하는 무존이 될 거라는 세간의 평이 그릇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의 비교대상은 무왕들이 아니었다. 그는 영세제일인으로 불리는 천무대제 이강과 견주어야 마땅했다.
오십여 쌍의 눈마다 오래지않아 절대지존(絶對至尊)으로 성장할 것이 확실시되는 청년에 대한 질시와 적의가 묻어났다. 북천도왕을 능가하는 무존의 치하에서 수십 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진천은 무력의 상승을 실감했다.
반 년 전 구인결에서 문찬경에게 거둔 승리는 상대의 양보로 얻은 행운일 뿐이었다. 문찬경이 비무 지속을 고집했다면 필패였을 터였다. 그 사실을 그도 알고 문찬경도 알았다. 그래서 진천은 그와 헤어지며 감사인사를 한 것이었다.
문찬경이 설욕전을 요구했을 때 진천은 전력을 다해 응대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그에 대한 예의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문찬경은 패함으로써 명예를 회복할 것이었다.
문찬경이 칼을 거두고 물러섰다.
삼사 장을 떨어진 그가 반월도를 도갑에 수습하자 진천도 절멸도를 집어넣었다. 양자는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격렬한 일전을 치르고도 두 사람 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하지만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지 모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진천은 문찬경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문찬경이 감상을 밝혔다.
“훌륭하구나. 실로 훌륭하구나.”
진천은 섣부른 겸양지덕을 보이지 않도록 주의했다.
“어르신께서 실망하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문찬경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앞으로 마련의 마인들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구나. 언제 천룡이 날아와 목을 떼어갈지 모를 테니. 장담컨대 네 발톱을 감당할 마두는 아무도 없을 게다. 아, 물론 마왕은 예외다. 장왕도 그렇고. 네 비늘은 이미 단단하기 이를 데 없으나 날개가 돋을 때까지는 그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길 바란다.”
“명심하겠습니다.”
진천을 지그시 바라보던 문찬경이 천공으로 시선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내 발목에 채인 족쇄만 없다면 나도…….”
듣는 귀가 많은지라 문찬경은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뒷말을 도로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