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52
제151화
진천은 해가 떨어진 직후 정맹을 떠났다.
외조부와는 은밀한 행보를 통해 마왕이나 장왕과 마주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겠다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 반나절 내내 집요하게 설득한 결과였다. 보금자리에서 안주하기보다는 시련을 통해 성장하도록 해달라는 외손자의 거듭된 간청에 요지부동이던 강운은 한 발 물러섰다.
정심원도 판결을 번복했다. 그들의 결정에 검왕이라는 변수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불문가지였다.
목표했던 성과를 달성한 진천은 며칠 더 머무르며 정파 무림의 명숙들과 교분을 가지라는 성대진의 권유를 뿌리치고 정맹을 나섰다. 검왕과 명에 앞서 삼보장에 귀환해야 할뿐더러 끊임없이 선휴각으로 몰려드는 명사들과의 인사가 번거로워서였다.
일신을 벗어난 진천은 서쪽으로 경신을 전개했다. 빠른 속도로 서행(西行)하던 진천은 다음 날 새벽 방향을 북(北)으로 틀었다. 원주 강가에 들를 참이었다.
날이 밝을 무렵 원주에 당도한 진천은 강가촌으로 향했다. 이십 만 평의 대지에 일천오백여 강가 직계들이 모여 사는 강가촌은 고색창연한 와옥들과 마을 전역을 붉게 물들인 단풍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둔덕을 오른 진천은 처음 강가를 찾았을 때 잠시 은신했던 느티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부지런히 낙엽을 쓸고 있던 하인들이 고개를 돌려 이른 아침의 이방인을 바라보았다. 진천은 시치미를 뚝 떼고 그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놀랍게도 백여 장을 가는 동안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강가의 허술한 경계가 누구도 그들의 터전을 침입하지 못할 거라는 과도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지만 진천은 쓴웃음이 났다.
진천은 전날 강찬과 만났던 집으로 들어갔다. 정문을 무사통과한 진천에게 마당을 오가던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하남신룡!”
진천은 그를 알아본 이에게 포권을 취했다.
“주무(主務) 어르신을 뵙고 싶습니다.”
대소동이 벌어지고 촌각도 지나지 않아 강찬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네가 여긴 어떻게? 어제 정맹에 있었다면서…….”
진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서구가 강찬에게 그의 최근 동향을 알려주었을 터였다.
“외조부님을 뵙고 주안으로 돌아가던 길입니다.”
“잘 왔다. 들어가자꾸나. 지난번에 맛을 보여주지 못했던 설산삼주를 꺼내 오마.”
강찬이 진천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식전부터 술을 대접하겠다는 강찬의 말에 진천은 고소를 금지 못했다.
“죄송하지만 시간이 넉넉지 않습니다. 가는 길에 지인을 보러 잠깐 들렀을 뿐입니다.”
강찬이 불거져 나온 흰 눈썹을 씰룩였다.
“지인이라면?”
“삼보장주의 영애가 이곳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그래. 그 아이라면 나도 잘 알지. 아주 어여쁜 아이더구나. 여하간 들어가자. 그 아이를 불러오도록 사람을 보내마. 너하고 할 얘기가 태산이다.”
진천은 강찬이 무슨 얘기를 나누고자 하는지 알았다. 전서구는 그가 어제 정맹을 방문했다는 사실에 더해 검왕에 대해서도 전했을 것이었다. 굳이 강찬과 그 사안을 두고 밀담을 나누고 싶진 않았기에 진천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어르신께서는 아시겠지만 저는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러 급히 삼보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진천이 주위를 둘러보며 짐짓 목소리를 낮추자 강찬이 헛기침을 했다.
“허험, 알다마다. 본가에서 내가 모르면 누가 알겠느냐. 알았다. 바쁜 사람을 붙잡고 시간을 허비하게 할 순 없지. 내가 친히 내원으로 데려다주마. 따라오너라.”
의도한 대로 강찬이 안내인을 자처하도록 만든 진천이 얼른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강찬의 주름투성이 노안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진천은 은연중 강찬을 압박했다.
곁에서 걷는 진천이 걸음을 빨리하자 강찬도 덩달아 속보가 되었다. 거의 뛰다시피 걸은 노소는 일각도 지나지 않아 내원에 이르렀다.
“내원은 원래 금남의 구역이라 출입에 엄격한 통제가 있으나 나와 함께라면 아무 문제없다.”
성큼성큼 대문을 들어서며 자신의 위신을 과시한 강찬이 은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더욱이 너는 외인이 아니지 않으냐?”
진천은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구중궁궐인 양 여러 겹의 담벼락을 두른 내원 깊숙이 들어간 두 사람은 기다랗게 늘어진 단층와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아이는 여기에 묵고 있을 게다. 나오라고 할까? 아니면 우리가 들어갈까?”
어인 일인지 강찬이 다 와서 망설이는 기색이었지만 진천은 밀어붙였다.
“들어갔으면 합니다.”
강찬이 쭈뼛거렸다.
“어, 그래. 그런데…….”
말끝을 흐리던 강찬이 갑자기 손뼉을 치며 뒷말을 이었다.
“아직 이른 시각이 아니더냐? 그 아이가 자고 있을 지도 모르잖느냐? 설혹 이미 깨어있다고 해도 너를 보기 전에 단장할 시간은 줘야 하지 않겠느냐? 우선 그 아이에게 네가 보러왔음을 알리자꾸나.”
강찬이 근처를 지나던 시비를 불러 노미현에게 전할 내용을 이르고는 와옥에 들여보냈다. 잠시 후 시비가 조르르 달려 나왔다.
“아씨는 공자님을 만나지 않겠답니다. 혼약을 앞둔 몸이니 양해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시비의 보고에 강찬이 진천의 눈치를 살폈다. 진천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진천은 전후사정을 파악했다.
결례를 무릅쓰고 강찬을 재촉해 내원으로 직행한 것은 삼보장 귀환이 시급을 다투는 일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애당초 강가에 들르지도 않았을 터였다.
진천은 노미현의 처지가 염려스러웠다. 두 달 보름 전 강운을 따라 삼보장을 떠났던 노미현은 그 이후 감감무소식이었다. 노덕과 고량, 그리고 차소영이 번갈아가며 근황과 안부를 묻는 서신을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
진천은 이를 불길한 신호로 받아들였다. 노미현의 상황은 그에게 여상구의 연인들이었던 혜령과 주연을 상기시켰다. 마령 문가의 여인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그녀들은 둘 다 비극을 맞이하고 말았다. 노미현도 그녀들처럼 강가 여인들의 텃세에 시달리지 말라는 법이 없었기에 진천은 걱정을 떨치기 어려웠다.
어떤 의미에서 노미현은 혜령과 주연보다도 사정이 나빴다. 그녀들의 경우 얼마간은 화월도군의 총애 덕분에 안전했지만 노미현에겐 그녀들과 같은 보호막이 없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강민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가 패배의 충격을 추스르고 노미현을 지키려 들지는 심히 의문이었다. 강민이 그녀를 방기한다면 노미현은 고립무원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진천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그녀가 운신에 제약을 받는 상황이었다. 강가를 떠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면 뇌옥에 갇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유를 박탈당한 데다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한다면 아무리 심지가 단단한 노미현이라도 버티기 어려울 터였다.
강찬을 유도해 내원으로 직행한 것은 강민에게 대비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전날 강가의 지리를 조사해두었기에 진천은 내원이 강찬의 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설령 강민이 서둘러 노미현을 확보한다고 해도 강찬을 앞세우면 그녀와의 대면을 막지는 못할 거라 보았다.
그러나 강가 내에서 강찬의 입지는 강민의 아래에 있음이 분명했다. 노미현의 거처에 이르렀을 때 거침없이 나아가던 강찬이 돌연 입옥을 주저한 건 강민에게서 전음이 날아왔기 때문일 것이었다. 시비가 전한 노미현의 거절도 그녀의 뜻이 아니라 강민의 지시였을 터였다.
십 할의 확신을 가지진 못했지만 진천은 본능이 시키는 바를 실행하기로 했다.
“그녀를 보고 가야겠습니다, 어르신.”
강찬에게 일방적으로 선언한 진천은 그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와옥으로 들어섰다. 당황한 강찬이 허둥지둥 그를 쫓았다.
복도 양편에 여러 개의 방이 나왔다. 진천은 좌우를 살폈다. 그러고는 바로 노미현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 그가 포착한 이는 그녀가 아니라 강민이었다.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었지만 강민은 진천의 기감을 속이지는 못했다.
진천은 통보도 없이 강민의 내기가 일렁이는 방의 문을 열었다. 열두 평가량의 널찍한 침실이 그를 맞이했다. 진천이 아는 노미현의 취향과는 상반된 화려한 분위기였다.
왼쪽 벽에 붙은 침상 위에서는 노미현과 강민이 알몸을 포개고 있었다. 진천이 방에 들어서자 강민이 호통을 쳤다.
“무슨 짓이냐?”
노미현에게 이불을 덮어준 강민이 재빨리 하의를 걸치고 침상을 빠져나왔다. 민망한 광경에 강찬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진천은 강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녀와 얘기를 하고 싶소.”
진천의 말에 강민의 면상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과할 생각은 않고 그 무슨 개소리냐? 썩 물러가라, 미친놈. 네 죄는 의관을 갖춘 후에 묻겠다.”
진천은 강민의 요구를 묵살하고 침상으로 걸어갔다. 진천이 다가가자 강민이 다짜고짜 공격을 가했다. 목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드는 수도를 왼손으로 가로막으며 진천이 강민의 명치에 우수를 찔러 넣었다. 강민은 상반신을 틀어 진천의 반격을 빗겨냈다. 하지만 진천의 다리에 걸려 중심을 잃었다. 진천은 그의 등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마혈을 찍었다. 일합도 버티지 못하고 제압당한 강민이 악을 썼다.
“이게 무슨 행패냐? 네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멍청하게 보고만 있을 겁니까, 할아버지? 어서 나가서 사람들을 불러와 그놈을 천참만륙하라고 이르시오.”
강민의 모욕적인 언사에도 강찬은 분기를 드러내지 못했다.
진천은 침상으로 가서 이불을 거뒀다.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던 노미현이 진천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담긴 복잡한 감정에 진천은 가슴이 아팠다. 진천이 혈도를 풀어주자 노미현이 얼른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겼다.
침상 구석에 아무렇게나 팽개쳐 진 그녀의 옷을 집어 건네주려던 진천은 그냥 내려놓았다. 그가 들이닥치기 전에 차분히 벗길 여유가 없었던 강민이 정사의 장면을 급조하기 위해 찢어버린 모양이었다.
“괜찮소, 노 소저?”
진천의 질문에 노미현이 대답 대신 눈물을 흘렸다.
“삼보장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원한다면 같이 갈까 하오만?”
이번에도 노미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진천은 그녀를 이불 째 안아들었다.
“집에 갑시다.”
뜻밖의 사태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갈팡질팡하던 강찬이 괴성을 질러대는 강민을 두고 진천을 졸래졸래 쫓아 나왔다.
“진정해라, 얘야. 이렇게 가버리면 나중에 몹시 난처해질 게다.”
진천이 걸음을 멈추자 강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온당한 방식이 아님을 아오나 이럴 수밖에 없음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강찬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보인 진천은 와옥을 나갔다. 바깥에는 강민의 고함소리를 듣고 달려온 강가의 도객들이 포진해 있었다.
진천은 뒤따라 나온 강찬에게 눈빛으로 도움을 청했다. 우유부단한데다 딱히 권위도 없는 강찬은 우물쭈물했다.
칼을 뽑아든 도객들의 표정은 살벌했다. 와옥 안에서 강민의 악다구니가 계속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강가의 도객들은 강민을 암습한 진천이 그의 여인을 강탈해가고 있다고 여길 터였다.
내원으로 몰려드는 도객들의 수가 불어나자 진천은 결단을 내렸다. 해명이 통하지 않을 터이거니와 강가의 무인들을 상대로 드잡이 질을 할 수는 없었기에 회피가 상책이었다.
진천이 신형을 띄우려는 찰나 와옥 내부의 누군가 혈도를 풀어주었는지 강민이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강기를 뻗어낸 그의 귀두도가 진천을 내리찍었다. 다급히 팔영보를 발한 진천은 강민에게서 떨어졌다. 강민의 칼에서 분출되는 도기(刀氣)에 스치기만 해도 노미현은 목숨을 잃을 터였다.
진천의 조문을 간파한 강민은 그의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해 허공과 좌우에 도기의 그물을 펼쳤다. 진천은 어쩔 수 없이 강가 도객들이 운집한 벽으로 밀려났다. 수십 명의 도객이 반사적으로 진천을 노리고 칼을 찔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