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53
제152화
강민과 도객들의 도기가 맞닿는 지점에서 진천은 수직으로 솟구쳤다.
칼바람이 그의 하체를 침범했으나 그의 팔에 안긴 노미현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아슬아슬하게 포위망을 벗어난 진천은 상승이 멈춘 꼭짓점에서 추락하지 않고 수평으로 날아갔다. 그가 현시한 신기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된 강가 도객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강민마저도 넋을 잃고 육지비행술을 구사하는 진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초절한 경신으로 강가 무인들을 가볍게 떨쳐낸 진천은 전날 강선과 추격전을 벌였던 숲으로 이동했다. 벼랑 가장자리에 내려선 진천은 그의 옷을 노미현에게 건네주려다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님을 알고는 뜻을 접었다.
“조금만 참구려. 곧 옷을 구해주겠소.”
진천의 말에 노미현이 황급히 외쳤다.
“나를 두고 가지 말아요.”
몰라보게 수척해진 노미현의 모습이 진천은 못내 안쓰러웠다. 늘 당당하던 그녀가 여과 없이 드러내는 불안은 그간의 마음고생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물론이오. 삼보장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함께 움직일 거요.”
진천이 노미현을 안심시켰다. 노미현의 봉목에 눈물이 고였다.
“당신을 보아서 다행스러우면서도 비참하네요.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이고 싶진 않았는데.”
“…….”
“나는 어리석었어요. 그런 자를 믿고…….”
진천이 말을 잇지 못하는 노미현을 달랬다.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오.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 없소.”
노미현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
“오해하지 말아요. 나는 그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아까 갑자기 내 방에 들어온 그가 강제로 옷을 찢더니…….”
말끝을 흐리는 노미현의 까만 동공에서 시퍼런 원독이 묻어났다.
“알고 있소. 그의 만행에 대해서는 나중에 책임을 물읍시다.”
진천은 기실 강민에게 깔려있던 노미현을 본 순간 그녀가 마혈과 아혈이 찍힌 상태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서슴지 않고 강민을 제압한 것이었다.
낯 뜨거운 상황을 화제로 삼기가 부담스러웠는지 노미현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감싼 이불을 단단히 여민 진천은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원주 인근의 산촌에서 가까스로 여인의 의복을 구한 진천은 우경으로 넘어갔다.
주안까지 내내 노미현을 안고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우경의 마방에서 소형 이륜마차를 구한 진천은 노미현을 안에 태우고 마부석에 앉았다.
아무도 낡은 마차를 모는 죽립인이 당금 강호 최고의 풍운아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진천은 반 년 전 원주로 왔던 길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우경을 떠난 진천은 문기와 소추를 거쳐 당진에 이르렀다. 그 동안 두 번이나 쉼 없는 질주에 지친 말들을 바꾸어야 했다. 당진의 객잔에서 일박을 한 진천과 노미현은 다음 날 일출과 동시에 출발했다. 정오가 되기 전에 오로에 도달한 진천은 말을 바꾼 후 즉시 마차를 몰았다. 강행군에 골병이 들 지경이었음에도 한시라도 빨리 삼보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노미현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
해질 무렵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정맹과 중립지대의 경계선 역할을 하던 보경산맥에 이른 진천은 객잔이 하나밖에 없는 소촌에서 다시 하루를 묵었다. 노미현은 전날보다는 많이 안정된 상태였다.
이른 아침 객잔을 나온 진천은 남행했다. 노미현을 안고서 보경산맥을 넘을 수도 있었지만 그녀 자신이 마차를 이용하기를 고집했다. 그에게 살을 맞대는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그녀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진천은 순순히 노미현의 뜻에 따랐다. 남북으로 칠백 리에 걸쳐 뻗어있는 대산맥이었지만 산촌이 보경산맥의 아래쪽 꼬리에 위치한지라 크게 우회하는 것도 아니었다.
온성과 길주를 경유한 진천은 오후 늦게 봉천에 당도했다. 봉천에서 주안까지는 일백오십 리 길이니 서두르면 해가 지기 전에 삼보장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환락의 도시’로 중원 전역에 널리 알려진 봉천이었으나 일몰 전에는 ‘유령의 도시’라는 별칭이 더 어울리는 땅이었다. 봉천의 중앙에 솟은 삼십삼 층의 도화각이 길고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운 가운데 진천은 인적이 거의 없는 대로를 관통해 북으로 내달렸다.
진천과 노미현을 태운 마차가 봉천을 벗어나기 직전 별안간 요란한 호각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더니 무리를 지은 무사들이 나타나 사방을 뛰어다녔다.
진천은 고삐를 잡아당겼다. 무슨 사달이 벌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앞서 가던 마차들이 하나둘 멈춰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인 것이었다.
진천의 앞으로 열서너 대의 마차들이 늘어서있었다. 뒤에도 계속해서 마차가 달라붙었다. 길을 막은 무사들이 마차들을 꼼꼼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진천은 죽립을 벗고 무사들의 명령에 따라 다른 마부들처럼 마차에서 내려와 대기했다.
각자 다른 병장기를 휴대한 무사들은 사뭇 강압적이었다. 앞줄에 있던 여덟 필의 말이 끄는 특급마차의 주인은 연유를 물어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마차에서 끌려 내려와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그 광경을 본 마부들과 승객들은 벌벌 떨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진천에게도 두 명의 무사가 붙었다. 그 중 한 명이 닫힌 마차 문을 가리키며 윽박질렀다.
“뒈지고 싶으냐? 문을 열어두라고 하지 않았더냐?”
다른 한 명은 불문곡직 진천을 공격했다.
진천은 명치를 가격하는 무사의 주먹을 잡아 그를 넘어뜨렸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놀란 나머지 무사가 칼을 빼들고 진천에게 달려들었다. 진천은 칼을 흘리며 그를 끌어당겨 엄지로 지당혈(志堂穴)을 눌렀다. 마혈이 찍힌 무사는 고꾸라진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몸은 마비되었지만 혀는 멀쩡한지라 진천에게 제압당한 무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악적이다!”
그들의 고함과 상관없이 소동을 감지한 주변의 무사들이 일제히 진천에게 몰려들었다.
“잠깐!”
진천의 제지에 아랑곳없이 무사들이 칼을 휘두르고 창을 찔러댔다. 진천은 회보(回步)를 밟으며 그들의 혈도를 짚었다. 순식간에 열댓 명의 무사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뒤늦게 가세했던 무사들은 황급히 진천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호각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일군의 무인들이 달려왔다. 진천은 상의에 새겨진 표식으로 그들이 성주 성가의 무인들임을 알았다.
“무슨 일이냐?”
오 척을 겨우 넘을 듯한 단신이지만 어깨가 떡 벌어져 다부진 느낌을 주는 오십대의 중년인이 바닥에 널브러진 무사들을 일별하곤 진천에게 강렬한 시선을 쏘며 물었다. 진천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는 무사들 중 지위가 높아 보이는 자가 대답했다.
“저자가 검문에 응하지 않고 저희를 공격했습니다.”
중년인의 대응은 진천의 예상 밖이었다. 그의 입에서 대뜸 ‘죽여라!’라는 명이 나오자 진천은 어이가 없었다.
진천은 중년인의 입에서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이 먼저 나올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 신분을 밝힌 후 무사들의 과도한 행태에 대해서 엄중히 항의할 참이었다.
최초에 그를 공격한 무사의 주먹질은 범인이 맞았다면 즉사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격이었다. 두 번째 무사가 휘두른 칼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진천은 절반의 분노와 절반의 실망을 느꼈다. 듣지도 못한 지시에 불응했다는 것을 빌미로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살인을 범하려 한다면 마도나 사파와 다를 바가 뭐가 있는가. 무사들의 무도한 작태는 그들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이들의 책임이었다. 그런데 전후사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상황에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할 성주 성가의 무인이 맥락 없이 즉살령(卽殺令)을 내렸으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진천은 씁쓸했다. 결국 아랫물은 윗물의 반영일 뿐이었다. 위가 흐린데 아래가 맑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중년인의 명에 따라 칠 인의 무인이 진천을 합공했다.
무력과 조직력 양면에서 무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났으나 그들의 운명도 앞선 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천과 스쳤을 뿐인데 모두들 중심을 잃은 수숫단처럼 픽픽 쓰러졌다.
눈 깜빡할 새 일어난 ‘참극’에 중년인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헉!”
진천이 달려들지도 않았는데 뒷걸음질 치던 중년인이 품에서 호각을 꺼냈다.
삐삐삐 삐삐.
날카로운 호각성이 대기를 찢었다. 잠시 후 한 무리의 무인들이 새롭게 달려왔다. 대동한 무사들까지 합치면 일백에 가까운 숫자였다.
중년인과는 달리 육척에 가까운 장신의 노인이 전면에 나섰다.
“어떻게 된 일이냐?”
중년인이 보고했다.
“저자가 마구잡이로 살수를 펼쳤습니다, 삼숙.”
진천은 노인의 반응을 지켜보기로 했다. 대화가 통하는 상대일 것인가. 아니면 중년인처럼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무뢰한일 것인가.
후자였다.
“당장 저 망둥이를 잡아 죽여라!”
안광에 내공을 담아 진천은 노려보던 노인이 중년인과 똑같은 명령을 내리자 진천은 기대를 접었다.
진천은 기가 막혔다.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무사들과 무인들이 그에게 달려들었고 그는 제자리에서 방어만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터였다. 바닥에 쓰러진 스무 명 모두 마혈이 찍혔을 뿐 생명에는 아무 지장이 없음도 어렵지 않게 알아낼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달의 시초와 경과를 되짚어보는 게 순서가 아니겠는가. 아니, 그 전에 그가 ‘누군지’부터 확인해야 마땅했다.
진천은 중년인과 노인이 예외이기를 바랐다. 성주 성가, 나아가서는 오대세가 전체와 정파 무림에 속한 무인들은 그들과 다르기를 바랐다. 하지만 목전의 한 쌍이 별종들이 아님을 알기에 진천은 속이 쓰렸다.
마도를 타도하고 사파를 타파한들 정파를 개혁하지 않으면 창인처럼 선량한 삶을 사는 한 누구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의 건설은 불가능할 것이었다. 가야 할 길은 멀고도 멀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인생은 그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을 만큼 길지는 않을 것이었다.
애꿎은 이들을 상대로 불필요한 손찌검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진천은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의 신형이 칠팔 장이나 솟구치자 모두가 놀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놀라기엔 일렀다. 당연히 정점에서 하강을 시작해야 할 진천이 공중에 그대로 머물러 있자 노인의 눈이 튀어나올 듯했다. 노인은 진천이 현시한 그 한 수가 얼마나 엄청난 신기인지 이해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경지였다.
노인은 입 속이 바짝 말랐다. 하잘것없는 무사 나부랭이들과 가문의 방계 피라미들 몇몇을 쓰러뜨렸지만 내기를 탐색해 본 결과 별 볼일 없는 자라고 여겨 살명(殺命)을 내렸는데 이제 보니 상상불가의 고수였다.
진천이 천천히 떨어져 내리자 그에게 쇄도하던 무인들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노인이 처음에 했어야 할 질문을 던졌다.
“귀하는 뉘시오?”
진천이 대답하기 전에 숨죽인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군중 속에서 누군가 부르짖었다.
“하남신룡!”
대번에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하지만 진천이 입을 열자 웅성거림은 즉시 잦아들었다.
“나는 세평회의 진천이오.”
포권을 생략하고 자기소개를 한 진천이 냉담한 눈빛으로 노인을 응시했다. 노인은 창에 찔린 듯 움찔했다.
“진즉 귀하의 별호나 성명을 알려주었으면 아이들이 결례를 범하지 않았을 것을 그랬구려. 아니, 귀하를 탓하는 게 아니외다. 귀하를 몰라보고 시험하려 든 건 어디까지나 본가의 실책이니 내가 성주 성가를 대표해, 그리고 아이들을 대신해 정식으로 사과하겠소, 하남신룡. 상호 간에 오해로 빚어진 일이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구려.”
노인의 뻔뻔함에 진천은 다시 한 번 기가 찼다. ‘넓은 마음’으로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그가 ‘하남신룡’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스스로를 지킬 무력이 없었다면, 아무 잘못도 없이 목숨을 잃었을 게 아닌가.
진천은 노인이나 중년인, 혹은 최초에 그를 공격했던 무사들에게 개별적으로 시시비비를 따져 죄를 묻는 대신 일을 키우기로 작심했다. 오늘의 사건을 계기로 적어도 정파가 장악한 지역에서는 무인들의 행패에 의한 무고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