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56
제155화
진천은 권왕의 청에 따라 명과의 일전을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그의 복기가 끝나자 권왕이 대뜸 검왕을 비난했다.
“참으로 대책이 없는 위인이도다. 하마터면 너는 물론이고 자기 제자까지도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수수방관했다니. 소 형의 무심함이야 뼛속 깊이 알고 있다만 이건 무심함을 넘어 무책임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진천은 검왕을 변호해주고 싶은 마음은 한줌도 일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관계는 바로잡아야 했다.
“그녀는 검왕 어르신의 제자가 아닙니다, 큰 형님. 직접 그렇게 밝히셨습니다.”
“뭐라? 그 아이가 소 형의 검공을 구사했다면서?”
“그녀에게 무학을 전수하긴 했으나 검왕 어르신은 목적은 후인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겨룰 강자를 키우는 데 있는 듯싶습니다.”
진천의 추론에 권왕이 혀를 찼다.
“츳, 무슨 말인지 알겠다. 소 형다운 짓이다. 무공을 익히지 않고도 초절정 극상의 무력을 발하는 아이이니 그의 검공을 체득하면 금세 절대지경에 이를 테지. 한마디로 소 형은 그 아이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후 잡아먹겠다는 심산이로구나.”
다소 거친 표현이었지만 아주 틀린 비유는 아니었기에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으로서 궁금하긴 하구나. 그 아이가 얼마만큼 강해질지. 사실 상 당금 무림 최강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소 형이 무적지체라는 반인반괴를 꺾을 수 있을지. 너는 어떻게 보느냐, 아우야?”
‘잘 모르겠다’는 대답에 만족할 권왕이 아니었기에 진천은 추측하는 바를 꺼내놓았다.
“정확히 반반의 승부입니다, 큰 형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검왕 어르신은 머지않아 하강세에 접어들 것입니다. 그분으로서는 정점에 있을 때 그녀와 겨루고 싶을 테지요. 그러려면 그녀가 수 년 내에 검왕 어르신에 필적할 무위에 도달해야 합니다. 검왕 어르신과 그녀의 대결은 그때 일어날 것입니다. 그 시기를 결정하는 이는 당연히 검왕 어르신일 테고요. 상호 간에 우열을 가리기 힘든 시점일 테니 승부도 팽팽할 게 틀림없습니다.”
“언제쯤 역사적인 용호상박을 구경할 수 있을지 예측해 보거라, 아우야.”
“…….”
“어서.”
“……길면 십 년, 짧으면 오 년입니다.”
“좀 더 좁혀봐라. 어느 쪽에 가까울까?”
“정말 모르겠습니다. 오 년에서 십 년을 잡았지만 이삼 년 이내가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이십 년 후에도…….”
“됐다, 이 녀석아. 그런 소리는 누가 못하느냐?”
묻기에 답한 죄밖에 없는 진천은 쓴웃음을 지을 따름이었다.
권왕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소 형이 네 승리를 인정한 건 의외로구나. 그는 번거로움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정이다. 양패구상으로 판정하고는 그 골짜기에서 나오지 않으려 들었을 성 싶은데.”
“큰 형님 말씀대로 검왕 어르신은 그녀와 제가 공히 패한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
“역시! 허면 어째서 그가 주안으로 오겠다고 한 게냐?”
“그녀가 저와 동행하기를 원했습니다.”
“오호라.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천하의 소 형에게 코뚜레를 건 아이가 나오다니.”
진천의 입가에 달린 고소를 본 권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다가 아닌 게로구나.”
“실은 제가 주안 행을 꺼리시는 검왕 어르신을 설득했습니다. 그녀가 삼보장에서 저와 함께 있으면 제게 자극을 받아 더 빨리 강해질 거라는 말이 주효했던 듯싶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결국 그 목석을 구워삶은 건 네 녀석의 혓바닥이었구나. 그 위인의 뱃속에 도사린 욕심을 간파하고는 제대로 찔렀던 게야. 여하간 장하다, 아우야.”
칭찬인지 조롱인지 헷갈렸지만 진천은 전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뾰족 바위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권왕이 개구리처럼 폴짝 뛰어내렸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몸이 근질근질하구나.”
진천은 권왕이 무슨 얘기를 할지 알아차렸다.
“이번에도 생환결을 운용했다면 또 무력이 늘었을 테지? 정맹의 일은 나중에 듣고 우선 네가 얼마나 발돋움했을지 확인해야겠다. 따라오너라.”
진천이 말릴 새도 없이 권왕이 새처럼 날아올랐다. 진천은 하는 수 없이 성질 급한 의형의 뒤를 쫓았다.
노미현의 귀환을 반기느라 북적거렸던 마당은 다들 와옥으로 들어갔는지 텅 비어있었다.
진천은 권왕을 따라 지하연무장 입구에 들어섰다. 이백여 개의 계단을 내려가자 삼천 평의 공간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간간이 박힌 야명주만으로는 지하연무장을 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진천과 권왕은 어스름에 잠긴 호수 같은 지하연무장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의 기척을 감지하고는 가린이 동굴에서 나왔다. 진천은 대웅이 보이지 않아 안도했다. 그는 노미현을 피하지 않고 대면한 것이었다. 친인들과 더불어 있기에 가능했을 테지만 그로서는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을 행동이었다. 진천은 어려운 한 걸음을 뗀 대웅의 건투와 행운을 빌었다.
진천과 권왕이 비무를 벌일 기색이자 가린이 멀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인면요괴라 하지만 사람보다는 야수에 가까운 그의 면상에 흥분이 가득했다. 가린은 그의 오른팔보다 작은 노인이 진천을 비롯한 세평회의 인사들이 전부 달려들어도 상대가 되지 않는 절대강자임을 알고 있었다.
권왕은 가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강기를 둘러 수박만큼 커진 주먹에서 터져 나온 탄강이 빛살의 속도로 진천을 덮쳐가자 가린이 끄으응, 앓는 소리를 냈다. 직접 맞아본 적은 없지만 가린은 돼지 오줌통 같은 누렇고 둥근 기운이 그의 갑피를 단박에 박살낼 위력을 지녔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순간 가린의 튀어나온 입이 쩍 벌어졌다. 당연히 신기한 몸놀림으로 노인이 날린 강기를 흘려버릴 거라고 생각했던 진천이 직격을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깨진 건 진천의 동체가 아니었다. 그의 좌수에서 솟아난 백색의 칼이 노인의 강탄을 두 쪽으로 갈라버리는 장면을 목격한 가린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아우우!”
지하에서 울리는 굉음을 감지한 세평회 인사들이 여상구를 필두로 하나둘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나 그들이 유감스럽게도 권왕은 관전의 기회를 허락지 않고 고량과 차소영이 지하연무장에 들어서는 순간 손을 거두었다. 그의 굳은 표정을 본 여상구 등은 비무를 마친 진천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전에 없이 심각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권왕이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지하연무장을 가로질러 출입구로 나아갔다. 진천이 가만히 서있자 중간에 멈춰 선 권왕이 소리를 질렀다.
“뭐하는 게냐. 따르지 않고.”
쓴웃음을 지은 진천이 경신을 발해 권왕에게 붙었다. 진천의 친인들은 지하연무장을 나가는 노소를 우두커니 지켜보아야 했다. 권왕과 진천이 사라지고서야 모두들 모든 걸 지켜보았을 가린에게로 몰려갔다.
죽림의 공터로 돌아온 권왕은 뾰족 바위로 올라가지 않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를 내려다보며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진천은 맞은편에 좌정했다. 권왕은 진천을 뚫어져라 응시할 뿐 말이 없었다. 진천은 묵묵히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권왕의 오므라든 입술에서 무거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원주 강가에서 너를 처음 본 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때도 너는 내 눈을 놀라게 했다. 네 소문을 듣기는 했다만 그토록 대단한 무공과 무재를 지니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더랬다. 강가의 칼잡이들에게 쫓기며 네가 보인 임기응변의 재간과 절묘한 승부수들에 지켜보는 내내 절로 감탄이 나오더구나. 하지만 당시 네 무위는 내 발목 어림에 불과했다.”
권왕이 말을 멈추었으나 진천은 대꾸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너는 지난 반년 새 무릎과 허리를 거쳐 어느새 내 어깨까지 올라왔다. 경이롭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성장이나 마냥 기뻐하고 축하해 줄 수만은 없구나.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알 테지, 아우야?”
“네, 큰 형님.”
진천은 권왕이 무엇을 우려하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권왕은 거듭된 생환결의 부작용을 염려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번에 명과의 생사투에서 얻은 공력의 상승 폭이 컸다. 그녀의 손가락에 찔린 심장이 독정을 용해해 상처부위를 메웠기 때문이었다. 급증한 내력 덕분에 진천은 팔영보를 쓰지 않고도 창천도군이라는 강호를 압도할 수 있었다.
진천을 지그시 바라보던 권왕이 에둘러가지 않고 물었다.
“네 수명이 얼마나 남았을 것 같으냐?”
너무나 직설적인 질문에 진천은 쓰게 웃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진심이었다. 언제 죽을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진천은 남은 날이 그리 길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무조건 십 년은 넘지 않을 터였다. 오 년도 안 될지도 몰랐다. 어쩌면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진천은 상념을 중단했다. 각오했던 바이니 구태여 마음에 그늘을 드리울 필요가 없었다.
진천에게서 불길한 대답이 나올까 봐 저어했는지 권왕은 평소와 달리 집요하게 추궁하지 않고 넘어갔다.
“인명은 재천이니 하늘에 맡길 뿐. 하지만 늙은 형을 앞서는 불경은 범하지 말거라, 아우야.”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으나 진천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큰 형님.”
미간에 서린 침중함을 지운 권왕이 화제를 바꾸었다.
“내공만 부쩍 늘어난 게 아니더구나. 이레 전 네 절멸도가 갑자기 일취월장해 있어 깜짝 놀랐는데 그 새 또 진일보했더구나.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생환결에 무학의 경지를 심화시키는 공능도 있었던 게냐?”
“아닙니다, 큰 형님. 절멸도법의 성취는 생환결과는 무관합니다. 근래 제 무공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면 전적으로 전날 외조부께 얻은 가르침 덕분입니다.”
칠주야에 걸친 외조부와의 극한 비무를 통해 진천은 탈태환골에 비견할 만한 변화를 겪었다. 진천은 절멸도법의 근본을 완벽히 이해하게 됨으로써 자기만의 무학을 구현하는 대종사로서의 진정한 첫걸음을 뗄 수 있었다.
며칠 전 정맹에서 치렀던 창천도군과의 재대결에서 일차전과는 달리 절멸도법의 뿌리를 노출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외가의 비전을 완벽히 이해한 덕분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창천도군은 물론이고 관전하던 정심원의 원로들도 그의 절기들이 원주 강가의 번천일백팔도와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터였다. 어설픈 변형으로써 경륜과 무공을 겸비한 대가들의 안목을 속이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권왕이 허연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러자 이마에 자글자글한 주름들이 춤을 추었다.
“나도 안다. 하지만 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는 미흡하다. 네 절멸참은 월교로 떠나기 전보다 한층 예리해졌다. 아까 네 칼이 나의 제왕천벽(帝王天壁)을 사선으로 잘라 들어왔을 때 간이 철렁했더랬다. 단순히 능숙해진 데서 오는 차이가 아니라 실질적인 진전이 있었음이야. 그렇지 않으냐, 아우야?”
진천은 솔직히 고백했다.
“실은 그녀와의 일전에서 작은 깨달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후의 공방에서 저는 이대로는 동귀어진이 불가피함을 직감했습니다. 그녀를 살리려면 절멸참을 비틀어야 했는데 고민할 시간이 없어 부지불식간에 상궤를 벗어난 수단을 썼습니다. 다행히 제 절멸참은 그녀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녀와 헤어지고 정맹을 거쳐 이곳으로 돌아오는 닷새 동안 줄곧 제가 마지막에 발한 일수에 대해 궁구했습니다. 제가 구사해놓고도 형태가 잡히지 않아 흐릿한 안개 속을 더듬는 기분이었는데 아까 큰 형님의 제왕천벽에 몰리는 도중에 문득 그 수로 돌파구를 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큰 형님께서 받아주신 덕분에 운 좋게 재현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허어, 이 맹랑한 녀석. 오냐오냐 했더니 이젠 나를 시험대상으로 삼는구나.”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큰 형님. 하지만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됐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척 할 것 없다. 속 보인다, 이 녀석아. 나를 밟고 올라서도 좋으니 비 온 뒤의 대나무 마냥 쑥쑥 자라려무나. 탕마멸사(蕩魔滅邪)의 위업을 이루려면 하루 빨리 우리 구닥다리들을 능가하는 무존이 되어야지. 이제 한두 번만 더 도약하면 우리와 대등한…….”
신 나게 떠들던 권왕이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그 이유를 알았지만 진천은 씁쓸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담담한 신색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