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58
제157화
예진은 샐쭉해졌다.
도화각의 상모(上母)들과 호화두(護花頭)가 허리를 접은 상태로 맞이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던 귀공자는 이곳에서는 하잘것없는 인사에 불과했다. 그는 삼보장에 들어온 이후 시종일관 저자세였다. 도화각에서 한껏 과시하던 거만함은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예진은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삼십삼 층으로 올라가면서 다들 열 명의 금봉황과 스무 명의 은봉황을 모조리 불러 모으는 특급귀빈들의 정체를 두고 설왕설래했다. 소혜(昭惠)는 오전에 동북 어딘가에서 떼로 몰려왔다는 부상(富商)들일 거라고 추측했고 월화(月華)는 무림세가의 전대고인들일 거라고 주장했다. 평소 백발백중을 자랑하는 그녀들이었지만 둘 다 틀렸다. 그들을 부른 이는 단 한 사람이었고 새파란 청년이었다.
대(大)상모의 지시에 따라 삼십 폭에 달하는 산수화 병풍 앞에 일렬로 섰을 때 예진은 초야를 맞이한 새색시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고는 청년이 자기를 간택해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일 년 반 전 금봉황이 된 이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간 그녀가 상대했던 손님들은 전부 배불뚝이 아니면 비실비실한 말라깽이들이었다. 구 할은 관(棺)에서 자는 게 더 어울릴 법한 산송장들이었고 나머지도 몸에서 구린내가 나는 퇴물들이었다. 그들에 대한 역겨움을 간드러지는 애교와 웃음으로 바꾸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그런데 중원십대거부 앞에서도 꼿꼿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던 대상모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어려워하는 엄청난 귀빈이 헌앙한 기상의 귀공자라니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차지하고 싶었다.
그녀들이 들어왔음에도 일별도 주지 않고 여유롭게 자작하던 청년이 술잔을 내려놓고 미희들을 좌에서 우로 훑기 시작했을 때 예진은 아직도 전술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중이었다.
그의 취향은 어느 쪽일까. 처연한 분위기? 밝은 모습? 아니면 단아한 느낌?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얼굴에 담을 수 있었지만 그건 다른 계집애들도 마찬가지였기에 선택을 잘 해야 했다.
마침내 청년의 시선이 그녀에게 이르렀을 때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표정을 그리고 있던 예진은 불운을 한탄했다. 이래서야 막강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청년을 낚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예진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청년의 눈길이 그녀에게 붙어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눈빛의 의미를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청년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그의 동공에 깃든 안광은 그녀를 고르기 직전 늙은이들이 보이곤 했던 그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뜻밖의 행운에 감사하며 예진은 뒤늦게 가장 자신 있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그러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청년이 돌연 숯처럼 검은 눈썹을 찡그렸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잘못 된지는 몰랐지만 실착임에는 분명했다.
재빨리 미소를 지운 예진은 행운이 그녀를 떠나지 않기를 애타게 빌었다. 다행히도 청년의 눈은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 머물러있었다. 잠시 후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청년의 입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소리가 빠져나왔다.
“화장을 지워라.”
예진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명령이었다.
티끌 한 점 없는 백옥 같은 피부를 자랑하는 다른 계집애들과는 달리 그녀의 볼엔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얼마 전에 주평에서 왔다는 거상을 졸라 화연소(花宴沼)로 나들이를 갖다 온 후 생긴 잡티였다. 양산을 쓰지 않고 가을 햇살을 만끽한 것이 화근이었다.
주근깨 같은 잡티를 없애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별무소용이었다. 그녀를 담당하는 상모는 잔소리를 넘어 금봉황에서 퇴출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걸 발라도 안 되고 저걸 먹어도 낫질 않으니 예진으로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깨가 박힌 껍질을 통째로 벗겨내고 싶었다.
보름 동안 번번이 경쟁자들에게 밀려난 예진은 정말로 하급의 기녀로 전락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공포에 떨었다. 그렇게 될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가뜩이나 얼굴에 난 ‘옥에 티’로 심란하던 차에 하필이면 마음을 뒤흔든 공자에게서 그걸 드러내라는 명을 받았으니 예진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민낯을 보이기는 죽기보다 싫었지만 예진은 상모들이 그녀의 얼굴을 닦아내도록 내버려두어야 했다. 이제 곧 닥칠 횡액을 저주하면서.
하지만 천당과 지옥을 오락가락하던 경험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녀의 잡티를 보고 실망할 귀공자와 비웃을 계집애들을 생각하니 야속하고 분하기 그지없어 예진은 눈물을 떨구었다. 그러다 청년이 내뱉은 말에 귀를 의심했다.
“아름답구나. 그녀로 하겠다.”
얼마나 황홀했던가. 얼마나 통쾌했던가.
그녀의 망신을 즐길 준비를 하던 계집애들이 일제히 낯짝을 구기는 광경을 예진은 보지 않고도 훤히 알았다. 썰물 빠지듯 물러가는 금은봉황들의 뒤통수에 한바탕 웃음을 쏟아내고픈 욕망을 참느라 예진은 남 몰래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청년의 옆자리에 앉아 술시중을 들며 예진은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전심전력을 쏟았다. 그가 다시 도화각을 찾았을 때 계집애들을 불러 모을 것 없이 바로 그녀를 지명하게끔 가진 바 모든 역량을 발휘할 참이었다.
그러나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예진은 기대치를 높여 잡았다. 단순히 단골로 만드는 정도를 넘어 잘 하면 그의 코를 꿸 수도 있음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택한 귀공자는 용이 아니라 봉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홀딱 반했음을 자각한 예진은 가볍게 찔러보았다. 갑갑한 도화각을 벗어나 시원한 산바람을 쐬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그는 선뜻 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예진은 과감하게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기왕 갈 거면 단풍으로 유명한 야율산으로 갔으면 좋겠지만 거기는 봉천 밖이라 상모가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그녀의 푸념에 그는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너무 일이 잘 풀려 예진으로서는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소피를 핑계로 잠시 밖으로 나온 예진은 대기하고 있던 상모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들었다. 짐작대로 청년은 보통 신분이 아니었다. 상모는 그가 오대세가 중에서도 위세가 드높은 마령 문가 출신일뿐더러 정맹에 셋 밖에 없다는 이십대 용호라고 귀띔해주었다. 풍뢰도라는 근사한 별호도 갖고 있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인물이었다.
그녀가 금봉황이 된 이후 도화각이 맞이했던 최고의 귀빈은 고암 설가의 중년인이었다. 이름이 설구식이라고 했던가. 그도 용호단에 든 절정의 무인이라고 했다. 그를 모시고 온 부상(富商)들은 하나같이 하인인 양 굴었다. 열 명의 금봉황을 전부 부른 중년인은 둘을 지목하고는 양옆에 앉혔다. 그는 예진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가 고른 설련(雪蓮)과 주은(珠誾)은 공히 육감적인 몸매로 사내를 꾀는 유형들이었다. 그녀들의 지칠 줄 모르는 자랑질에 배알이 뒤틀렸던 예진은 몇 배로 되갚아 줄 기회가 생겨 신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비가 없지는 않았다.
온갖 기교를 부려가며 청년을 태우고 녹인 긴 밤이 지나고 새벽이 왔을 때 예진은 규칙에 따라 거처로 돌아가야 했다. 그녀의 몸에 모든 힘을 쏟아내고 곤히 잠든 청년의 얼굴을 보며 예진은 그가 간밤의 약속을 잊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원기 왕성한 청년의 욕정을 남김없이 풀어주느라 녹초가 되었음에도 예진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꿈처럼 다가왔던 행운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다. 불안감에 시달리며 하루 종일 눈을 붙이지 못하고 있던 예진은 미시(未時) 말에 그녀의 방으로 불쑥 들어온 청년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바깥의 호화나찰들은 졸고 있단 말인가.
그녀를 안아든 청년이 창문을 열었을 때는 어리둥절했다. 뭐하자는 거지? 그러다 그가 느닷없이 창밖으로 뛰어내리자 까무러치고 말았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십팔 층에서 떨어지면 뼈도 추리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염라전이 아니라 마차 안이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이가 청년임을 알아차린 예진은 기뻐서 고함을 지를 뻔했다.
마차에서 둘은 사랑을 나누었다. 예진은 마부의 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껏 열락의 교성을 내질렀다. 그러면서 청년이 절정에 오르기 전에 가련한 신세에서 구해줄 것을 간청하며 첩으로 들이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여느 사내들과 마찬가지로 방사 후 약간 후회하는 기색이었으나 청년은 정사 도중 내뱉었던 말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주안의 객잔에 든 이후 그가 다시 한 번 그녀를 품을 때 예진은 몸이 단 그를 감질나게 만들며 확약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직후 청년의 태도가 미묘하게 변했다. 그녀가 애교를 떨어도 대꾸도 않고 천장만 응시하던 청년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잠시 후 돌아와서는 옷을 입으라고 재촉했다. 그의 표정을 본 예진은 만사가 글렀음을 직감했다. 결국 백일몽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속단하기엔 일렀다. 청년은 봉천으로 돌아가지 않고 반대쪽으로 나아갔다. 조심스럽게 행선지를 물으니 삼보장이라고 했다. 그 대답에 예진은 가슴이 벌렁거렸다. 당금 천하를 쩌렁쩌렁 울리는 기인이사들의 소굴로 들어간단 말인가. 설사 청년의 첩이 되지 못하더라도 평생 우려먹을 수 있는 얘깃거리가 생기는 셈이었다. 게다가 누가 알겠는가. 그 이상의 행운이 기다리고 있을지.
어린 날 엄마 치마폭을 잡고 따라갔던 장터에서 우연히 만난 점쟁이가 그녀를 두고 귀비를 넘어 왕후의 운명을 타고난 사주와 관상이라고 했던 말을 뇌리에 새겼던 예진은 어쩌면 오늘 그의 예언이 실현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삼보장에 들어오자 각각 청색과 백색의 기와를 얹은 커다랗고 고아한 삼층 건물 두 개가 보였다. 마치 다른 머리 색깔을 한 쌍둥이 같았다.
청년과 예진은 파란 기와집으로 안내되었다. 둘을 그곳으로 데려간 이는 어지간한 사내보다 체구가 크고 사내처럼 잘 생긴 여인이었다. 삼보장의 인사들에 관한 소문을 상기한 예진은 그녀가 금강권이라는 별호를 가진 무인의 연인이리라 짐작했다.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한 동안 도화각의 기녀들 사이에서 최고의 화제였다. 서로에게 일편단심인 한 쌍만큼 여인들의 부러움을 자아내는 이들은 드물었다. 기루에서 웃음과 몸을 파는 처지이든 여염의 처자든 금강권처럼 충직하고 듬직한 사내를 짝으로 삼고픈 마음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넓은 다실에 들어서자 너른 원형 탁자에 삼녀삼남이 앉아있었다. 한 명만 빼고는 바로 누군지 알 법한 유명 인사들이었다. 얼마 전까지 도화각과 그녀의 주인이었던 불로옹(不老翁), 남쪽 세상을 다스린다는 제왕의 손자로 알려진 해골 청년, 그리고 금강권.
까무잡잡한 피부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인은 채찍을 귀신 같이 부린다는 무림의 여걸일 터이고 도무지 인세의 사람 같지 않은 미모의 여인은 올 봄까지 각주의 장원에서 그와 동거했다던 삼보장주의 여식임에 분명했다. 나이를 종잡기 어려운 중년여자도 상당한 거물임에 분명했다. 제 주먹을 움켜 쥔 청년이 그녀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며 ‘문가의 상현이 자하검선을 뵙습니다.’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예진은 청년이 누차 이른 대로 눈을 살포시 내리깐 채 입도 벙긋하지 않고 조신하게 처신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바삐 움직였다. 은밀히 좌중을 둘러보며 예진은 많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옆에 금은봉황의 계집애들이 있었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떠벌리고 싶을 만큼 흥미로운 발견들이었다.
청년과 중인 사이에 몇 마디 대화가 오가던 중 낡은 마의를 걸친 평범한 사내가 다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예진은 오랜 경험을 통해 방금 나타난 사내가 확고한 서열 일 위임을 감지했다. 사내는 분명 당금 천하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하남신룡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