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6
제15화
노덕은 실소했다.
동그래진 눈으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진천이 대처에 처음 나온 촌놈임을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어서였다. 뒷골목 불한당들의 먹잇감이 되기에 딱 알맞은 행동이었다. 물론 진천이 흑도에게 당할 일은 없을 터였다.
달포 전 창인을 떠나 여기 팔정포(八井浦)까지 오는 도중 여러 악당이 그와 진천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성공한 경우는 없었다. 진천은 그들을 가볍게 제압한 후 좋은 말로 타이르고는 놓아주었다. 더러 패거리를 몰고 와 일을 크게 벌인 자들도 있었다. 그런 치들은 팔이나 다리가 부러짐으로써 대가를 치러야 했다.
수십 대의 마차가 오가는 드넓은 대로와 길 양편에 기라성처럼 들어선 고루거각들을 바라보며 진천이 결국 탄성을 내질렀다.
“아, 굉장하네요, 대인. 저번에 들렀던 우단(宇壇)도 놀라웠는데 여기는 거기보다 훨씬 번화하네요.”
“이를 말인가. 팔정포는 하남 무림 최고의 도시일세. 인구는 대략 십만 전후로 알고 있네만 요즘은 좀 더 불었을지도 모르겠구먼. 이곳의 지배 방파인 팔정파(八井派)의 기세가 워낙 대단하니.”
노덕은 팔정파에 관해 보다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려 했지만 진천은 엉뚱한 데 관심을 보였다.
“우물이 여덟 개라서 팔정이란 이름은 붙은 겁니까?”
“그런 걸로 아네.”
“부럽군요.”
노덕은 진천의 말이 진심임을 알고 있었다.
하남 무림은 삼대 변방 무림 중에서도 가장 척박한 지역이었다. 면적의 팔 할이 산악이라는 산서 무림이나 거의 전부가 초원으로 이루어진 평북 무림은 그나마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통했지만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거대한 불모지인 하남 무림은 늘 기아에 허덕이는 땅이었다. 하남 무림은 특히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렸다. 하남 무림에서 물은 황금과 대등한 가치를 지닌 귀물(貴物)이었다. 일 년 중 대부분은 말라 있지만 그나마 하남 무림의 유일한 젖줄이라 할 천보강(天寶江)의 상류를 장악한 수룡보가 하남칠강(河南七强)의 하나로 꼽히는 이유였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점이 있네만.”
“말씀하시지요.”
“일전에 대왕객잔 주인에게서 창인은 일 년 내내 비가 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식수는 어디서 얻는가? 그보다 더욱 이상한 건 창인에서 십여 리만 내려가면 나온다는 밀림일세. 비도 내리지 않는 곳에 어떻게 울창한 숲이 생길 수가 있는가?”
“알고 나면 간단합니다, 대인. 우선 창인의 지하에는 샘이 네 군데 있습니다. 물이 고여 있는 것은 아니니 샘이라기보다는 물줄기라고 하는 게 낫겠네요. 병든 고양이 오줌처럼 찔끔찔끔 나오긴 하지만 다행히 꾸준히 흘러나오는 터라 잘 받아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 밀림은 땅속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수맥으로부터 물을 취하는 겁니다. 충분치는 않겠지만 나무들이 사이좋게 나눠 먹고 있는 모양입니다. 창인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허허, 그랬구먼.”
노덕과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가던 진천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좌측으로 보이는 건물의 높이를 헤아리고 있는 듯했다. 노덕이 진천의 수고를 덜어 주었다.
“팔 층일세. 한 층이 일 장에서 이 장 사이이니 최소한 십 장은 넘을 걸세.”
“어마어마한 높이군요.”
노덕은 중원에 대도(大都)들에는 그보다 서너 배가 넘는 고층의 전각들이 흔하다는 말을 아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진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 노야에게 듣기로 중원에서 으뜸을 다투는 거도(巨都)인 일신(日新)에 가면 사오십 층의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마천루가 있다던데 대인도 가 보셨습니까?”
“그렇다네. 참으로 장관이지. 하지만 자네에겐 가급적이면 나중에 가 보라고 권하고 싶네. 일신을 보고 나면 다른 도시들은 다 시시해지니까.”
“알겠습니다, 대인.”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노덕은 진천이 하루빨리 천하제일도(天下第一都)를 견문하고 싶어 몸이 달아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팔 층도 이렇게 높은데 오십 층이라니 상상도 가지 않는군요. 목을 꺾고 올려다보아도 꼭대기가 보이지도 않겠습니다.”
“허허, 그렇긴 하네만 여기 팔룡각(八龍閣)도 꽤 유명한 곳이라네. 각 층마다 대륙 각지의 별미를 맛볼 수 있다고 들었네. 말이 나왔으니 들어가 요기를 하는 게 어떤가. 이제 강만 건너면 중원인데 하남 무림에서의 마지막 한 끼쯤은 사치를 부려도 될 것 같네만. 내가 내겠네.”
“그럴까요.”
진천이 선뜻 노덕의 제안에 응했다.
노덕은 팔룡각의 팔면마다 난 문 중 ‘소미(炤味)’라는 글자가 붙은 곳으로 진천을 데려갔다.
입구에서 경비인지 점소이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이십 대 초반의 점박이 사내가 오랜 여정의 여파로 행색이 남루해진 노소를 가로막았다. 노덕이 얼른 손바닥을 펼쳐 대륙 전역에서 통용되는 은전 두 닢을 슬쩍 보여 주었다. 주제를 모르고 팔룡각에 들어서려던 두 거지 노소를 내쫓을 심산이었던 점박이가 일순 당황했다. 노덕이 뒷짐을 졌다.
“안내하게.”
노덕의 음성에 담긴 위엄에 점박이가 움찔했다.
“저는 여기를 지켜야 합니다.”
“그런가. 그럼 수고하게.”
“네.”
노덕과 진천이 주렴을 젖히고 쑥 들어가자 엉겁결에 그들의 통과를 허락한 점박이가 당장 뒤쫓아 가서 목덜미를 낚아채야 하는지를 두고 뒤늦게 갈등했다. 그러나 이미 떠난 마차였다. 그들을 끌어내다가 말썽이라도 일어나면 긁어 부스럼이 될 터였다. 그로서는 늙은이와 그의 하인이 집사의 주목을 끄는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기를 빌 뿐이었다.
점박이의 고민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선 진천과 노덕은 입구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손님은 일견에도 오십 명은 넘어 보였다. 그럼에도 창인 대왕객잔의 서너 배는 됨 직한 넓이 탓인지 붐비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주문을 받으러 두 사람에게 다가온 점소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람이 어떻게 소미관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의아해하는 기색이었다.
“작설탕(雀舌蕩) 두 그릇만 내오게. 이건 자네 걸세.”
점소이의 입에 쭉 찢어졌다. 노덕이 바둑알만 한 동편(銅片)을 식탁 끝에 올려놓았기 때문이었다. 행여나 다른 동료들이 볼세라 잽싸게 구리 조각을 챙긴 점소이가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어르신. 후딱 대령합지요.”
점소이가 날듯이 물러가자 노덕이 양해를 구했다.
“근사한 요리를 대접하고 싶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형편으로는 무리일세. 우선은 이 정도로 참아 주게나.”
“하하, 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음식값이 비싼 모양이군요.”
노덕이 쓴웃음을 지었다.
“방금 시킨 작설탕만 해도 이런 곳에서는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하지만 평민들의 이틀 노임은 될 걸세.”
“그렇군요.”
“기실 이건 아무것도 아닐세. 나도 여기는 처음이지만 내가 알기로 한 층씩 올라갈수록 가격이 두 배로 뛴다고 하더구먼. 그러면 팔 층은 어떻겠는가. 한 끼 식사가 어지간한 가구의 일 년 치 식비보다 비쌀 걸세. 주안에도 팔룡각 같은 특급 객잔이 있다네. 지금은 근처에 얼씬거릴 엄두조차 못 내지만 망하기 전에도 특별한 날에나 가곤 했더랬지. 이런 곳은 세상의 불공평함을 상징하는 장소일세. 위로 오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공간이기도 하네. 모두들 맨 위층에 들기를 갈망하지만 실제로 바람을 이루는 이는 극소수이니.”
항상 밝은 미소를 달고 다니는 진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불필요한 자조로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음을 자각한 노덕이 화제를 전환했다.
“그건 그렇고 아까 길에서 요즘 팔정파의 기세가 대단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혹시 그에 관해 들어 보았는가?”
“아닙니다, 대인.”
진천이 고개를 저었다.
“원래부터 팔정파는 전통의 강호로 꼽힌다네. 무인들의 이합집산이 심하고 문파들이 수시로 명멸하는 하남 무림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지. 하남칠강(河南七强)이라고 하지만 ‘칠’이라는 숫자는 언제 바뀔지 모르네. 하지만 그것이 십(十)으로 늘건 오(五)로 줄건 팔정파는 변함없이 포함될 걸세. 워낙 탄탄한 기반을 갖고 있으니. 그런데 팔정파의 근간의 성세는 단순한 안정감을 넘어서는 특별한 현상일세. 변방 무림을 무시하는 중원에서까지 주목하고 있을 정도이니.”
“뛰어난 인물이라도 나왔습니까?”
“허어, 그렇게 바로 맞추면 한껏 뜸을 들인 내가 민망하지 않은가. 그렇다네. 팔정파는…….”
마침 점소이가 음식을 내오는 바람에 노덕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점소이가능숙한 손놀림으로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사발 두 개와 반찬 종지들을 탁자에 차려놓고는 물러가자 노덕이 시식을 권했다.
“맛을 보게나.”
진천이 마다하지 않고 수저를 들었다. 그가 탕을 휘젓는 것을 보며 노덕이 미소를 지었다.
“작설탕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참새 혀를 끓인 것은 아니라네. 그건 아천(亞川)에서만 잡히는 곤어(鯤魚)라는 생선의 뱃살일세.”
속을 들킨 진천이 머쓱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하, 네. 맛있어 보이네요. 대인도 어서 드시지요.”
식사를 하며 노덕이 좀 전에 하다만 얘기를 계속했다.
“팔정파는 엄청난 후예를 배출했다네. 이 년쯤 되었나. 하남 무림에서 중원 무림의 내로라하는 후기지수들을 능가하는 신성이 나타난 게. 당시 포성에서…….”
노덕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진천의 표정이 이상해서였다. 노덕이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입구에 방금 들어온 듯한 손님 넷이 보였는데 그중 한 사람이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사십 대 중반의 중년인이었다. 노덕과 눈이 마주치자 입이 점점 벌어지더니 중년인이 돌연 손뼉을 쳤다.
“틀림없어. 당신, 주안의 삼보장주지?”
가타부타 응답을 주지 않는 노덕을 노려보던 중년인이 그의 침묵을 긍정의 답변으로 받아들였는지 파안대소했다.
“파하하핫, 이럴 수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주안일보(宙安一寶)를 이런 데서 마주치다니.”
중년인의 목소리가 하도 큰 탓에 소미관의 객들이 그에게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눈 화살을 개의치 않고 중년인이 더 크게 소리쳤다.
“흠, 이제는 명성이 아니라 악명이라고 해야 하나. 원치 않는 여인을 범해 강제로 아내로 삼고는 더 참지 못하고 진실을 폭로하려던 그녀에게 흉한 약물을 써서 의식 불명으로 만든 위인이니.”
객잔 안이 웅성거렸다. 중년인의 일행 중 한 명이 그에게 물었다.
“저 노인이 정말 그자요, 소(蘇) 형?”
중년인이 느물거리며 대답했다.
“그렇다니까. 폭삭 늙은 데다 누더기를 걸치긴 했지만 팔 년 전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내가 한 번 본 사람을 잊지 않는다는 걸 알지? 더군다나 나에게 심한 망신을 준 자를 몰라본대서야 말이 안 되지. 뭐, 거래를 안 하면 그뿐이지 나더러 불쌍한 년들을 상대로 과도한 이윤을 챙기려 든다고 여러 사람 앞에서 터무니없는 모함을 한 작자가 자기는 뒤로 추악한 짓을 일삼았다니. 이거야 원 더러워서, 퉷.”
소미관 관계자들을 의식해서인지 침을 뱉은 시늉만 하고는 중년인이 노덕이 앉은 곳으로 걸어왔다. 그가 일행 중에서 제일 서열이 높은 듯 그의 뒤로 세 명이 줄에 꿰인 굴비처럼 줄줄이 따라왔다.
식사를 중단한 손님들이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더니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그래도 명색이 주안 제일의 거부 소리를 듣던 거물인데 이 층도 아니고 고작 일 층에서 싸구려 작설탕이나 깨작거리고 있다니. 아니, 폭삭 망했다던데 아직도 팔룡각 같은 데를 드나드는 게 더 황당한 건가? 아무튼 이렇게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군, 노 장주. 우리는 삼 층에 예약이 되어 있지만 이것도 인연인데 잠시 합석할까? 팔 년 전의 빚을 갚고 싶은데.”
노덕의 허락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중년인이 의자의 등받이를 앞으로 하고 그의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는 맞은편의 청년은 안중에도 없었다.